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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이 되기 전에 (282)화 (281/366)



〈 28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주인공이란 세상의 편애를 받는 존재다. 그렇기에 세상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주인공 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 흐름은 굉장히 강력해서 주변사람들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속으로 끌어들이곤 한다.


헌데 아주 가끔 그런 존재들이 있다.

철저히 주인공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혼자 도도하게 벗어나 있는 이들이 말이다.

재밌는 점은 그런 존재들은 대개 주인공에 버금가거나 혹은 그 이상가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존재들을 '대적자'라 부르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쪽에 속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주인공의 적으로 나타나곤 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나와 맞서고 있는 바이올라도 그 범주 안에 속하는 듯 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 강함은 말이 되질 않으니까.

지이이익-


몸이 제멋대로 끌려가며 발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그렇게 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바이올라는 커다란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그녀의 손이 내가 자신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기만을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좋은 꼴 보지 못할  자명한 상황.

해서 다리에 힘을 바짝 주며 바이올라의 손등에 찰싹 들러붙어있는 창끝을 슬며시 비틀었다.


지이익..

그제서야 제멋대로 끌려가던 발이 멈추었고, 그에 바이올라가 작게 혀를 차며 다시금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몸을 뒤로 물렸다.

'아무래도..'


작전을 바꿔야할 것 같았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뒷일을 생각해서라도 되도록 여력을 남겨두는 쪽으로 가려했는데 저쪽에서 따라주질 않았으니까.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쪽도 거기에 맞추는 수밖에.

그리 결심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명심해라. 모든 것의 기본은..


아까 바이올라와 맞부딪혔을 때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머릿속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내 스승이었던 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스승이라 생각하는 이의 목소리였다.

주인공 놈의 옆에 붙어있으면서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거다.


옆에 있기만 해도 떨어지는 콩고물이 많다는 것.


그렇기에 기실 지금의 내 무력을 이루고 있는 것들 중에 삼분의 일 정도는 그 콩고물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 중에서도 내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이의 목소리에 따라 호흡을 조절했다.


-스으으..

뱀이 풀숲을 길 때나 날법한 소리가 얇게 벌려진 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태세를 바꾼 순간, 내심 속으로 감탄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바뀐 거라고 해봐야 숨쉬는 법 하나 뿐인데 양손을 쫙 펼친채  향해 거리를 좁혀오던 바이올라의 꼬리가 쭈뼛하고 치솟더니 언제 거리를 좁혀왔냐는 듯 그대로 펄쩍하고 뛰어서 뒤로 물러났으니까.


-아, 바이올라 참가자? 무슨 일인가요?


-갑자기 뒤로 물러납니다!


바이올라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진행자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의문을 토해낸 순간, 얇게 내쉬는 숨결에 맞춰서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저벅-

그렇게 한 걸음.


자박-


두 걸음.

스으윽-

세 걸음.


고작  걸음.

허나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일인가요? 이안 참가자 갑자기 바이올라 참가자의 측면에서 나타났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거죠?


진행자들이 눈을 부릅뜨며 그리 외치고 있을  창대는 이미 바이올라의 옆구리를 노리고 휘둘러지고 있었다.


"큭..!"

대련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바이올라의 얼굴 위로 자리하고 있던 여유라는 이름의 가면이 깨어져나갔다.

황급히 팔을 움직인 그녀가 그것을 옆구리에다가 딱 가져다붙였다.


카아앙-!

강렬하기 그지없는 충돌음과 함께 바이올라의 몸이 옆으로 쭉 밀려났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힘을 얼마나  것인지 딱딱한 돌로 된 바닥에는 그녀가 밀려나며 생긴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일단 거리부터 벌려놓은 다음에 자신의 템포를 되찾아야 겠다고 판단을 내린 것일까.

창대와 맞부딪힌 팔뚝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상당한지 바이올라가 표정을 한껏 일그러뜨린채 몸을 슬며시 뒤로 기울였다.


허나 놓아줄 생각따위 없었다.

뒷꿈치를 들어올린 발을 그대로 앞으로 내딛었다.

-아아! 이안 참가자! 굉장히 신비로운 움직임이군요!

아마도 바이올라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내가 무대 위에서 쭉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그렇게 도망을 택한 그녀의 옆으로 따라붙어 쉬지않고 창을 휘둘렀다.


호흡조차 사치라는 것처럼 호흡 사이사이에다가 공격을 우악스럽게 욱여넣었다.


팡-!

카가각-!


한껏 혹사당한 팔의 근육들이 부들부들 경련하며 산소결핍을 호소해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창을 휘둘렀다.

놀라운 점은 그렇게 쏟아지는 파상공세들을 바이올라가 전부 피해내거나 막아냈다는 것이고.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은 막아내고.


어찌보면 수세에 몰려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에서 바이올라는 철저하게 선택과 집중을 행했다.


그게 어찌나 완벽한지 일견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였다.


바이올라의 모습에서 그러한 감상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아까 전부터 신이 나게 떠들어대고 있던 두 진행자의 입에서 탄성 비스무리한 것이 새어나왔다.


-대, 대단하군요..


-바이올라 참가자.. 완벽합니다!


그렇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맞고 안 맞고가 아니었으니까.

'이 정도면.'

가볍게 한 방 먹여줄 정도는 되는 것 같아서 바이올라의 머리 위를 노리고 창을 크게 휘둘렀다.


-후욱!


보이지 않는, 공기로 된 커튼을 잘라내는 느낌으로 창을 휘둘렀더니 수비에 전념하던 바이올라의 눈이 일순간 번뜩였다.

머리 바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방금의 그 한방을 급한 마음에 실수한 것이라 판단한 것일까.


줄곧 수비하는데 사용하던 손들을 빈틈없이 딱 붙인 그녀가 그것을 그대로  향해 내질러왔다.

"큭..!"

그에 당황한 척 황급히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거기까지도 예상했던 것일까.

일직선으로  내질러지던 바이올라의 손이 허공에서 기묘하게 비틀렸다.


꼭 마치 숲속을 가로지르는 늑대마냥 표홀한 움직임을 선보이며 바이올라의 손이  옆구리를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그게  옆구리와 맞부딪히기 직전에..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었다.


바이올라가 앞뒤 안 가리고 돌진해준 덕분에 무사히 그녀를 반경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으니까.

비틀어지는 몸에 맞춰서 애매하게 허공을 내젓고 있던 창을 그대로 손에서 놓았다.


정확히는 바꿔쥐었다.

앞이었던 왼손을 뒤로, 뒤였던 오른손을 앞으로.

그리하여 역수로 움켜쥔 창을 옆구리를 지렛대 삼아 휘둘렀다.


뭔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아까와는 소리의  자체가 달랐다.


그만큼 창대에서 느껴지는 저항감또한 차원이 달랐고.


그렇게 휘둘러진 창대로 하여금 갈라지고 조각난 것들이 살짝 비틀어진채로 내질러진 창끝에 찰싹 달라붙었다.

팔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창을 휘둘렀던 것은 기실 이 한 방을 위해서였다는 걸 바이올라는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모이고 모인 것들이 바이올라의 몸 어딘가와 맞부딪힌 순간-

파앙-!


한껏 집중되어 있던 것들이 하나의 점에서 일제히 폭발했다.

-아아아아!

-엄청난  방!


때맞춰 울려퍼진 두 진행자의 목소리 덕분에 굳이 뒷쪽을 확인하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바이올라의 몸이 저만치 날아갔으리라는 것을.

물론, 이쪽의 피해도 결코 적지는 않았다.

얼마 내뻗지 못하고 맞부딪힌 탓에  여파가 지렛대 역할을 했던 옆구리 쪽에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니까.

허나 그마저도 바이올라가 입은 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욱신욱신대는 옆구리를 느끼며 천천히 바이올라 쪽으로 돌아섰다.


마침 저멀리까지 날아가버린 그녀도 엎어져있는 상태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게 눈으로 확인한 바이올라의 상태는 딱봐도 심각했다.


급한대로  향해 내뻗던 손을 움직여  공격을 받아냈던 것일까.

내가 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통짜 철로 만들어진 건틀렛에는 거미줄을 생각나게 하는 실금들이 쫙쫙 펼쳐져 있었다.

투두둑-


바이올라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떨어져내리고 있는 것들의 고향은 다름아닌 그곳이었다.

충돌의 여파를 배겨내지 못하고 산산히 부숴져버린 쇳조각들이 마치 눈처럼 떨어져내렸다.

그뿐만이랴.


충돌에서 살아남지 못한 건 바이올라가 입고 있는 옷또한 마찬가지였다.


강력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손으로 잡아 찢기라도  것처럼 조각조각난 것들이 넝마처럼 변해버린 소매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었다.


덕분에 긴팔이었던 것이 민소매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해버렸건만 바이올라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웃어?'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내게 똑바로 시선을 고정한채 양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고 있었다.


"너는 정말.."

내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기껍다는 것처럼.

"..최고야!"

그 외침이 귀를 꿰뚫은 순간 직감했다. 그녀가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면 그게 등장하는 타이밍은 지금일 것이라고.

결과적으로 그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순간 바이올라는 이미 내 앞에 도달해있었으니까.


그야말로 중간과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도약.

그렇기에 어렵지 않게 눈치챌  있었다.

그녀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어쩐지..'

중간중간에 묘하게 바닥에 흔적을 남기더라니만.. 아무래도 이 순간을 위해서였나 보다.

"안 놀라네?"

그런  모습마저 기껍다는 듯 얼굴 위로 뛰우고 있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러오는 그녀를 상대로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그렇게 맞부딪힐 때마다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나간 것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기세가 옆에서 보기에 자뭇 살벌했던 것일까.

혹시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되도록 우리와 떨어지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던 심판이 뒤로 슬쩍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숨을 한 번 내쉬는 동안에도 몇 번이고 반복되던 공방 속에서 최종적으로 승기를 거머쥔 것은 다름아닌 내쪽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시 맞부딪히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철저하게 박살난 건틀렛쪽을 노렸으니까.

그런  의도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 바이올라가 그쪽으로 막을 걸 몸을 비틀기까지 해가며 반대쪽 손으로 막는 둥 나름대로 용을 쓰긴 했지만..

카앙-!

후두둑-

애초에 약점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생겨버린 시점에서  싸움은 내가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쉬지 않고 때려박히는 데미지를 배겨내지 못한 것이 박살이 난채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건틀렛대신 건틀렛이 박살나며 드러난 맨 살갗을 노리기만 하면 됐으니까.

아무리 몸을 단련했다고 한들 맨몸으로 감당할  있는 데미지에는 분명 한계가 있는 법.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올라의 왼팔이 퍼렇게 변한채 부풀어오르기 시작했고..

"큿.."


거기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은 쉬지 않고 이어지는 공방 속에서 바이올라를 자꾸만 멈칫멈칫하게 만들었다.

누가봐도 바이올라가 열세임이 분명한 상황.

이 상황을 이대로 방치해뒀다간 귀하신 황녀님의 팔이 또각하고 부러져버릴 것만 같았던 것일까.


"그만!"

보다보다 못한 심판이 나와 바이올라 사이로 끼어들었다.

역시나 꽤 하는 양반이었던 모양이다.


간합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와 막 다시 맞부딪히기 시작하려던 우리 둘을  자리에 멈춰세운 그녀가 바이올라 쪽을, 정확히는 곳곳이 푸르딩딩하게 물들어 멍이 들어있는 그녀의 팔을 바라보며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심판의 권한으로 시합중지를 요청합니다."

어딘가를 바라보며 그리 말하는 게 아닌가?

그에 광기로 이글이글거리던 눈동자를 하고 있던 바이올라의 입이 댓발 튀어나온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지?"


자신은 더 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짜져있으라고 말하려는 것일까.

이글거리는 수준을 넘어서 일렁이기 시작한 눈동자를 한채 바이올라가 심판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그 기세가 자뭇 살벌한 것이 여차하면 심판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행동에 호응하듯 사방에 위치한 관객석에서 심판을 향한 야유가 쏟아졌다.


-우우우우우!

-젖통 떼라!


그럼에도 심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심판의 행동에 순간적으로 눈이 홱 돌아버렸던 것일까.

참다못한 바이올라가 심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바이올라의 손에 잡힌 심판의 몸이 그녀쪽으로 강제로 돌아간 순간.

정확히는 심판의 발밑에서부터 무언가 솟구치는  확인한 순간..

앞뒤 가리지 않고 창을 내질렀다.


바이올라를 향해서.


푸욱-


섬뜩하기 그지없는 파육음이 대회장 안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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