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81)화 (280/366)



〈 28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어디  곳도 빼놓지 않고 전부 새빨갛게 익은 것이 꼭 잘 익은 홍시를 보는 듯 했다.

"이, 이런 곳에서 무슨 그런 말을.."


그런 얼굴을 한채로 바이올라가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고,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많이 당황한 상태라는 것을.


'하긴..'

생각해보면 그럴만 하긴 했다.


여태껏 나는 그녀 앞에서 순수하고 올곧은 기사의 이미지를 고수해왔으니까. 그래서 분명 그런 타입인줄로만 알고 있었던 내 입에서 갑자기 섹드립이, 그것도 남자가 먼저 내뱉을만한 것이 절대 아닌 걸쭉한 섹드립이 튀어나왔으니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뿐만아니라 바이올라는 상상력또한 굉장히 풍부한 편인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태껏 당황 속에서 허우적댈 이유가 없으니까.


자꾸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과 현실에 존재하는 것 사이에 얼만큼의 차이가 있을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바이올라의 서신이 자꾸만 아래쪽을 향했다. 사실상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고, 바이올라의 이성이 그런 본능적인 움직임을 필사적으로 막아세우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눈아래가 경련하듯 파들파들 떨렸고.


그런 식으로 스스로가 당황했다는 사실을 말 그대로 온몸을 이용해 표현하는 바이올라를 상대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해보인건 어디까지나 덤이었고.

"그런 말이라뇨?"

네가 말한 그런 말이라는  뭔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녀를 향해 날아가는 모든 것들 사이사이에다가 의구심을 끼워넣으니  그래도 빨갛던 바이올라의 얼굴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추가타를 꽂아넣으니 '으..'하고 앓는 듯한 음성이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뚫고 튀어나왔다.


이대로 가다간 내게 이상한 오해를 사게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단순히 해명이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둘 중에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바이올라는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무려 내게 반박을 해왔으니까.

"긴 편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은.. 남자가 입에 담기에는  상스러운.."


"네? 그 말이 왜요?"


"그러니까 내 말은.."


"전 그냥 제가 바이올라님보다 키가 큰 편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길다고 말했던 건데.."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당혹스러움을 숨긴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가던 바이올라가 그대로 합죽이가 되어버렸다.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그런 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홍시가 아니라 토마토같았다.


"아니면 혹시 뭐 이상한 생각이라도.."

설마 그런 거냐고 의혹어린 시선을 그녀를 향해 던지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던 것인지 바이올라가 고개를  숙였다.

재밌는 건 그녀의 은빛 머리칼 귀에 자리하고 있는 귀의 반응이었다.


대체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세모꼴의 귀가 하늘을 향해 쫑긋하고 치솟아있었으니까.


'흠.'


 번의 문답 끝에 결국 그로기 상태가 되어버린 바이올라를 보며 속으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경기 시작 전에 말로써 그녀를 흔들어놓는다는 작전이 제대로 먹혀든 듯 했으니까.


분노를 일으켜 흥분하게 만드는 것보다야 효과가 덜할테지만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대련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리하야 나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금의 당혹스러움이 자꾸 생각이 날테니까.


다른 이가 봤다면 비겁한 짓이라고 쌍욕을 퍼부었겠지만..


'그래서 뭐?'


그런 것따위 개의치 않게된 지 오래다.

그리고 뭣보다 이게  방식이었다.

딱 봐도 효과가 괜찮을  같은 수단이 주변에 널려있는데 비겁하게 보일 것 같다는 이유로, 할 짓이  된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외면하는 건 배가 부를대로 부른 주인공 놈들이나 할 짓이고, 그들처럼 세계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끽해봐야 조연따리에 불과한 내게는 이게 어울렸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한 최대로 바이올라를 흔들어봤는데 그 작업이 끝난 타이밍에 맞춰서 잠시 자리를 비웠던 심판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이 경기에 참으로 많은 것이 달려있는만큼 경기가 과열될지도 모르니 주의하라고 진행본부같은데 불려가서 한 소리 듣기라도 한 것일까.

등장할 때부터 나와 바이올라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가 우리 앞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열었다.

"두 참가자분들께서는 과한 언행을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평온해보이는 반면에 바이올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기라도 한 것마냥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있으니 내게 바이올라를 상대로 부모 욕이라도 하면서 그녀를 도발했다 판단한 것일까.


주의를 요하는 시선이 얼굴로 날아와 꽂혔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그에 군말하지 않고 그쪽을 향해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보이니 심판이 자기가 똑똑히 지켜보겠다는 듯 고개를 한  끄덕이는 것으로 그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타이밍에 맞춰서 진행자들의 중계가 재개되었다.


-자! 정말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경기를 시작할 수 있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헌데.. 보셨습니까?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두 참가자가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 말입니다.

-아..


-제가 볼 때는 이안 참가자가 바이올라 참가자를 상대로 도발같은 걸 날린 것으로 보였는데요.

-아무래도 마지막 경기인데다가 여기서 이기는 쪽이 최종승리를 가져가게되는 상황이다보니까 이안 참가자가 의욕이 많이 앞섰던 모양입니다.

입이 쉬고 있는 동안에도 눈만큼은 쉬지 않고 있었던 걸까.


 진행자의 입에서 심판이 오해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의 말이 흘러나온 순간, 제국  관람객들이 모여있던 곳에서부터 야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

-황녀님! 저 건방진 놈에게 본때를 보여주십시오!

그에 비해 우리  관람객들이 모여있는 객석의 반응은 어땠는고 하면..


-잘했다!

-그거라도 해야지! 암! 그렇고 말고!

대체로 그랬다.


어차피 질  도발이라도 시원하게 하고 지라는 걸까.

 기준으로 동쪽하고 서쪽에 있는 양측 관객석에서는 그런 반응이 쏟아져나온 반면 북쪽하고 남쪽은 상대적으로 잠잠했다.


그렇다고 거기는 얌전했냐면 그건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펼쳐져있는 상황이 제법 흥미로웠는지 그쪽에 앉아있는 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흥미가 가득 했으니까.

심지어 개중에 몇몇은 박쥐짓 비스무리한 짓까지 해가면서 양측의 경쟁심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몇몇 바람잡이들의 활약의 힘입어 내가 등장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살짝 시들시들했던 대회장 안의 분위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끄덕


이대로 가다간 나와 바이올라의 대련이 시작하기도 전에 관객 난입이든 뭐든 벌어질 것만 같았는지 나와 바이올라를 엄중하게 노려보고 있던 심판이 고개를 들어올려 어딘가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마지막 경기라서 그런지 두 참가자를 응원하는 관객분들의 열기가 매우 뜨겁네요.

-이 분위기가 식도록 내버려둬선 안 되겠죠?

-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하네요.

-그럼, 경기 함께 보시죠!


이윽고 울려퍼진 두 진행자의 합창과 함께 나와 바이올라 사이를 갈라놓고 있던 심판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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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마치 슬로우모션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느릿하게 들어올려지는 심판의 손을 바라보며 창이라기보다는 봉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을 더했다.

끄드드드득-

한계까지 비틀어 쥐어짜내진 근육이 소름끼치는 비명을 자아냈다.

그것을 그대로 봉끝에다가 담아내어 바이올라를 향해서 내질렀다.

목표는 어깨.


모든 것이 느릿하게 변해버린 듯한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바이올라를 향해 내질러지는 창의 끝부분만이 제 속도를 갖추고 있었다.

내질러지는 방향에 맞춰서 살짝 돌아간 창의 끝부분이 바이올라의 어깨와 부딪히기 직전, 돌연 그녀가 그 속도를 따라붙었다.

이제와서 피하기는 늦었다는  깨달았는지 그녀가 왼손을 들어올려 그것의 손등부분을 창의 궤적에다가 끼워넣었다.


가가가가각-

뭔가 갈려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창과 접촉한 건틀렛의 손등부분에서부터 불똥이 튀어올랐다.

'쯧.'

일직선으로  뻗으며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던 것이 살짝 꺾였음을 직감한 순간,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차며 몸을 뒤로 젖혔다.


어느새 바이올라의 오른손이 얼굴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대로 한 방 먹여주겠다는 심산인 걸까.

아니면 그대로 잡아채서 옴짝 달싹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는지 날 향해 날아들던 것이 기묘하게 흔들렸다.


노리는 곳은 얼굴? 아니면 어깨?


잠시 고민하다가 굳이 피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왼손등부터 팔뚝 중간에 이르는 부분을 덮고 있던 버클러를 그녀의 주먹 앞에다가 가져다놓았다.

카아아앙-!


귀를 찢어발기는 듯한 충돌음과 함께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짝 뒤로 밀려났다.


그 기세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뒤로 젖혀 무게중심을 뒤로 옮겼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면 바이올라에게 제대로  방 먹고 나가떨어지는 것으로 보였으리라.

-명심해라 창질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누군가 머릿속에 들어있는 카세트 테이프에다가 테이프를 넣고 재생시킨 것마냥 꽤 오랜만에 듣는 듯한 목소리가 자연스레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리를 벌려 그녀의 간격에서 벗어난 순간, 그제서야 맞부딪힌 부분에서부터 시큰한 고통이 느껴졌다.


급하게 내지른 것이  정도일줄 알았더라면 맞서지 않고 흘려내는 쪽을 택했을텐데.


후회하는 걸로 그치지 않고 그 사실을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그래도 막 시작한 것치고는 제법 요란하게 맞부딪혔으니 조금 느긋하게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바이올라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경기를 본인의 승리로 마무리짓고 거기에 따라올 나라는 전리품을 차지하고 싶었던 걸까.

그녀가 두 주먹을 서로  붙인 채  향해 쇄도해왔다.

습득한 정보가 적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처음보는 자세.


그렇기에 맞서는 쪽보다는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금방이라도 내지를 것처럼 곧추세우고 있던 창끝을 밑으로 늘어뜨렸다.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속임수가 통했던 걸까.

호박빛 눈동자가 번쩍하고 섬뜩한 안광을 흩뿌렸다.


동시에 서로 딱붙어있던 그녀의 두 주먹이 옆으로 살짝 비틀렸다.


노리는 곳은 배였던 걸까.

생각보다 빠른 그녀의 속도에 당황한 척 그런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이며 왼팔을 배쪽으로 가져왔다.

그에 바이올라의 입꼬리가 말려올라간 순간..


늘어뜨렸던 창끝을 그대로 치켜세웠다.


순간적으로 홱 치솟은 창끝이 바이올라의 팔 옆을 교묘하게 스치며 그녀의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아마 바이올라에게는 갑자기 눈앞으로 뭔가가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으리라.

그래서일까.

"큿..!"

그녀의 낯빛이 순간적으로 아연해지더니 날 향해 거침없이 쇄도하던 그녀가 아주 잠깐이지만 멈칫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살짝 비틀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탓에 원래 궤적에서 벗어난 것이 내 옆구리를 스치듯 지나갔다.

퍼엉-하고 뭔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뒷쪽에서부터 울려퍼졌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때렸음에도 저 정도라니.

'무슨 놈의 힘이..'

아니, 저 체구에서 저 정도 파괴력이 말이 되나?


속으로 그리 푸념하면서도 몸이 익다 못해 지긋지긋한 동작대로 착실하게 창을 내질렀다.

내질러지기 전까지 한껏 부풀었던 팔 근육의 힘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창끝이 바이올라의 등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그녀는 이제 막 몸을 돌리기 시작한 상황.


아마 그녀가 몸을 전부 돌릴 때쯤에는 창끝은 그녀의 어깨에 도달해있으리라.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풍경이 박살났다.

그리고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바이올라에게는 눈보다 몇 배는 뛰어난 탐지수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본인이 힘만 앞세우는 머저리가 아니라는 걸 내게 보여주고 싶기라도 했던 걸까.

양손을 쫙 펼쳐보인 그녀가 원을 그리듯 손을 움직였다.

처음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겨있는 원리만큼은 익숙했다.

그렇게 원을 그리던 바이올라의 손이 목적지에 다다르기 직전이었던 창에 착 달라붙었다.

저와 다른 극을 만난 자석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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