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슬슬..'
나갈 시간이 되긴 했나 보다.
-자! 다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대회장 안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한 걸 보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굉장히 치열한 양상이었죠?
-네! 그렇습니다. 디아나 앨런 참가자가 기권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대로 왕국 측의 승리가 확정되는 듯 했는데요.
-제국 측에서 대장을 맡고 있는 바이올라 참가자가 단신으로 상황을 완전히 바꿔놓았죠.
-덕분에 각팀의 점수는 삼대 삼!
-남은 참가자 수또한 각각 한 명으로 동일한 상황입니다.
-쉽게 말해 이번 경기에서 승리를 가져가는 쪽이 최종 승리를 가져간다는 뜻이죠?
-네, 그렇습니다.
마지막 경기라서 그런 걸까. 진행을 맡은 두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인 목소리로 '밑밥'을 깔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밀튼 씨!
-네?
-밀튼 씨는 최종전에서 어느 분이 승리를 가져갈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 음..
꽤나 난제였던 것일까.
남자 쪽의 얼굴 위로 엄청난 난제라도 직면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좀 치네.'
나야 그 모습이 연기라는 걸 금방 꿰뚫어봤지만 다른 이들은 아마 힘들 거다.
그렇기에 남자 쪽이 연출한 모습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곧 시작될 경기가 어느 한쪽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만큼 팽팽한 경기인 것같은 느낌이 들게 했으니까.
-아무래도 제 생각에는 바이올라 참가자가 이대로 승리를 굳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호오, 어째서죠? 바이올라 참가자는 이미 두 경기를 연속으로 치루면서 어느 정도 체력이 소모된 상태인데요.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런 식의 대련에서는 기세같은 것의 영향도 제법 크지 않습니까?
-그 말은 제국 측이 기세를 탔다는..?
-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누가봐도 답이 뻔한 문제를 앞에 두고 일부러 오답을 고르는 멍청이같은 모습은 보이기 싫었던 것일까.
남자 쪽이 확신이 가득 깃든 목소리로 바이올라가 승리할 것을 주장했다.
물론, 진행자로써 너무 한쪽의 편만 드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뒷맛이 찝찝할 것 같았던 걸까.
-물론, 응원하는 쪽은 여전히 왕국 쪽이지만요.
-아까와 똑같은 이유인가요?
-네, 아무래도 왕국 측에서 대장으로 나오시는 분이 저와 같은 남성 분이다보니 심리적으로 더 끌린달까.. 그래서 더 응원하게 되는 것 같네요.
-흐음, 그렇군요.
잘 들었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여성 진행자 쪽으로 쪽지같은 것이 전달되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종이 안에 대체 뭐가 적혀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쪽지를 받아든 여성 진행자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하더니 이내 크게 확대되었다.
그런 식으로 누가봐도 놀랐다는 걸 알 수 있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가 그 감정을 자연스레 목소리로 옮겼다.
-아! 경기 시작을 앞에 두고 있는 가운데 굉장히 흥미로운 소식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흥미로운 소식이요? 어떤 건가요?
-진행본부 측에서 지금까지 각국에서 기록한 성적을 모두 합산했는데..
-합산했는데..?
아까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만 이럴 때는 또 호흡이 찰떡이라 생각하며 푸스스 웃고 있으니 예상했던 그대로의 발언이 여성 쪽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놀랍게도 왕국과 제국 측이 기록한 점수가 동일하다고 합니다!
-네? 그게 가능한가요?
-교류전을 개막때부터 지켜봐온 저도 믿기지는 않습니다만.. 제게 전해진 쪽지의 내용을 보면 왕국 쪽에서 부스와 관련된 분야에 걸려있는 점수를 상당 부분 차지했다고 하네요.
-아아.. 확실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혹시 가보셨습니까?
-네, 왕국 측 부스에서 파는 물건들이 굉장히 좋았거든요. 특히 그 흉터제거 크림은 정말로..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흐르게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아직 준비가 덜 끝난 모양이다.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보나마나 나와 관련이 있을테니까.
아마 지금쯤 진행본부는 날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이들로 굉장히 시끌벅적하지 않을까.
인정할지 말지를 놓고 서로 언쟁을 벌이는 금발머리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동안에도 두 진행자의 시간벌이용 쇼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둘다 나름대로 입담이 괜찮은 편인지라 당장은 이런 식으로 때우는 게 가능하지만 앞으로도 그렇지는 않을텐데..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교국 측은 결국 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우리 측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듯 하던 결승전이 결국 동점상황까지 오지 않았나.
덕분에 관람객들의 흥분치가 최대치를 찍고 있는데 여기서 날 인정 못한다고 상황을 파토낸다?
흥분한 관객들이 미쳐 날뛰는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그런 결론이 나올 일은 없겠지.
아니나 다를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새로운 쪽지가 진행자들에게로 전해졌다. 보아하니 진행본부 측에서 결론을 낸 모양.
이윽고 두 진행자의 입을 빌려 발표된 진행본부 측의 결정은 딱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경기 속행 말이다.
진행본부 측에서 급하게 의논할 사안이 있어 잠시 경기 진행이 지연되었다는 여성 진행자의 사과와 함께 승부예측 단계에서 머무르고 있던 둘의 진행이 드디어 다음 단계를 향했다.
-자, 그럼 왕국 측의 마지막 참가자에 대해 밝힐 시간이죠?
여성 진행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멘트와 함께 화면이 넘어갔다.
이제 뒤집어진 거라고 해봐야 하나밖에 남지 않은 상황.
그렇기에 더더욱 뜸을 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건지 진행요원의 손이 느릿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을 선보이며 내 몫의 나무판을 향해 뻗어나갔다.
똑똑-
"이제 나갈 준비를 하셔야됩니다."
내가 들어와 앉아있던 대기실 안으로 노크 소리가 울려퍼진 건 그 와중이었다.
그에 더 끌 것도 없이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대기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를 따라서 밖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앞에 두니..
-왕국 측의 마지막 참가자는..!
-이안 참가자입니다!
마침내 뜸들이기가 끝이 났는지 두 진행자의 목소리가 대회장 안으로 울려퍼졌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탄식이 대회장을 휩쓴 건 그 직후였다.
너무나도 노골적인 그 반응에 내심 쓴웃음을 짓고 있으려니 참 기운 나는 말들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에이, 텄네 텄어."
"안 봐도 왕국이 졌구만.. 쯧쯧.."
"아니 딱봐도 허약해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참가자가 된 거래? 혹시.."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교국 건물들은 방음 수준이 참 형편없는 것 같았다.
덕분에 본인들이 헐뜯고 있는 당사자가 바로 아래에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채 열심히 저마다의 음모론을 내놓기 바쁜 이들의 목소리가 단 하나도 누락되는 법 없이 고스란히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나야 남들이 뭐라 지껄이든 딱히 신경쓰지 않게된지 오래라 아무 감흥도 없었는데 정작 내 옆에 서 있는 이가 난리였다.
날 헐뜯기 바쁜 이들이 어쩌면 교국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까.
민망함으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진행요원이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그런 식으로라도 밑에 사람이 있다는 걸 저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모양.
물론, 효과는 없었다.
바깥이 하도 시끄러워서 기침소리가 위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닿기도 전에 묻혀버렸으니까.
그렇게 살짝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큼..! 이제 나가시면 됩니다."
드디어 출전하게 되었다.
바이올라는 이미 이름이 불린지 오래라 무대 위에서 내가 입장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굳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채 무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던 건 당연히 내 모습을 보고 놀라는 바이올라의 반응을 보다 생생하게 감상하기 위함이었다.
박수를 부탁하는 진행자의 외침에 맞춰서 쏟아지기 시작한 박수소리에 맞춰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느긋하게 대회장 안을 둘러보던 바이올라의 시선이 마침내 내게로 와서 닿았다.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보석 중에서도 호박을 닮은 바이올라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그리고는 좁아졌다.
꼭 마치 믿기지 않는 무언가를 마주하고서 그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허나 그 반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내게서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의 눈동자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으니까.
그에 맞춰 대회장 안도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본인.. 맞나?"
"초상화랑 너무 다른데.."
"설마 대타인가? 규정이 어떻게 되는 거지?"
관객들 중에서 성격이 급한 몇몇은 이미 날 왕국 측에서 급하게 내보낸 대타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벌떼 일어나듯 일어나는 그 반응들이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고 있으니 진행자들이 황급히 상황수습에 들어갔다.
-어, 혼란스러우시겠지만 지금 입장하고 있는 참가자는 이안 참가자 본인이 맞습니다.
-이는 이미 진행본부 측에서 확인한 사실이며 자세한 사항은 이안 참가자의 개인사라 밝힐 수 없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교류전의 관리를 맡은 진행본부 측에서 나온 피셜이라 하니 그나마 좀 소란이 잦아드는 듯 했지만 그럼에도 시끌시끌한건 여전했다.
두 진행자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대타일 거라고 믿고 있는 이들이 퍽 많은 모양.
그러거나 말거나 천천히 바이올라의 앞으로 가서 섰다.
정확히 그 때였다.
"..이안."
금방이라도 뭔가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던 바이올라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앞에 살짝 뜸을 들이긴 했지만 확신이 어려있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내 이름을 부른 바이올라를 상대로..
"네, 바이올라님."
가볍게 대꾸를 해보였다.
싱긋하고 미소를 지어보인 건 덤이었다.
"그게.. 네 원래 모습이야?"
어떻게 원래 몸으로 돌아갔는지보다 그쪽이 더 중요한 걸까.
지금의 바이올라에게는 그런 것 같아서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리고는 역으로 물었다.
"네, 혹시 놀라셨나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바이올라의 머릿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허약함 그 자체일테니까.
그도 그럴 것이 고작 감기로 앓아눕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뿐만아니라 꼬맹이 모드는 뭐랄까 좀.. 많이 쬐끄만한 느낌이 있기도 하고.
그랬던 놈이 원래 모습이랍시고 훌쩍 커진 건 물론, 쭉쭉빵빵한 근육남이 되어서 나타난 셈이니 그녀 입장에서는 황당하기도 하고 그렇겠지.
그래서 물었다.
"마음에 안 드시나요?"
지금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그리 물었던 건 꼬맹이 모드일때의 모습이 그녀의 취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떄문이었는데..
"아니? 지금 모습도 마음에 드는데?"
돌아온 건 그녀의 언니인 바이올렛이 보여주었던 것과 거의 똑같은 반응이었다.
그럴 리 있겠냐고 말하는 것처럼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씩 웃어보인 바이올라가 이내 내 모습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느릿하게 훑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바이올라의 입가에 눌러붙은 미소또한 점차 진득해져갔고.
"아니다. 정정할게."
무엇을 정정하겠다는 걸까.
"지금 모습이 더 괜찮은 것 같아."
"그런가요?"
"응, 전의 모습도 나쁘진 않았지만.. 뭐랄까 보고 있다보면 한두 번씩 불안한 느낌이 들곤 했거든."
불안한 느낌이라니?
의아한 마음에 그 까닭을 물으니 살짝 주저하던 바이올라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음..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아서?"
그러면서 흘러나온 대답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 정도로 연약하게 보인 건가 싶었으니까.
"그럼 지금은요?"
"지금이야 뭐.."
굳이 말할 것 있겠냐는 듯 바이올라가 건틀렛으로 감싸인 제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 모습이 꼭 두들겨 패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하는 듯 했다.
"확실한 건 마음은 편할 것 같아."
딱봐도 튼튼해보이니 봐주지 않고 두들겨 패겠다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그녀를 향해 가벼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글쎄요. 그건 실제로 확인하기 전까지 모르는 일 아닐까요?"
"세상에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들도 많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죠."
"어느 쪽이 긴데? 너? 아니면 나?"
"음.. 아무래도 제쪽 아닐까요? 제가 좀 긴편이거든요."
씩 웃으면서 그리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까 바이올라의 머릿속으로 엄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말이다.
무엇을 상상한 것일까.
바이올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