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끝났네.'
진의 유일하다시피한 무기가 거하게 망친 시험 성적이 기록된 성적표마냥 형편없이 구겨지는 광경을 목도한 순간 더 잴 것도 없이 자리에서 몸부터 일으켰다.
무기를 잃은 이상 이 대련이 더 지속될 일은 없을 거라 봤으니까.
물론, 여기서 진이 갑자기 생각치도 못한 권각술이라는 수단을 꺼내들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기분 좋은 오산은 벌어지지 않을 듯 했다.
쇠를 종이 구기듯 구겨버리는 바이올라의 힘에 압도당하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바이올라의 손 안에서 구겨지는 철검의 모습이 미래의 제 모습처럼 느껴지기라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진이 망연자실한 얼굴을 한채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버렸으니까.
바로 조금 전까지 바이올라를 상대로 나름 치열한 공방을 이어나가던 이와 동일인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꼴 사나운 모습이었고,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엉덩방아를 찧어버린 진의 모습을 보고 이 대련이 이 이상 지속되는 건 무리라 판단했는지 심판 역을 맡고 있던 금발의 여성이 어딘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봐도 뚜렷한 목표가 존재하는 몸짓이었고, 그것이 제대로 전해졌는지 어쨌는지는 곧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진 참가자! 무기를 잃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음.. 대회 규정에 따르면 어느 한쪽이 경기를 더 이어나가지 못하는 상태가 될 경우 자동으로 경기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요.
그리 말한 여성 진행자가 이건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진행본부의 결정을 기다려야할 것 같다는 말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그 결정이라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나왔다.
-아, 지금 진행본부로부터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화면 밖에 선 누군가로부터 언질을 받기라도 한 것인지 나름 초조해보이는 낯짝을 하고 있던 진행자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이내 그 안에서 흘러나온 것은..
-네! 이번 경기는 규정에 따라 바이올라 참가자의 승리가 됩니다!
바이올라의 승리를 알리는 멘트였다.
창가에 서서 대회장 내부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몸을 돌렸던 건 그래서였다. 혹시 몰라 기다려봤지만 역시는 역시였고, 결론이 나온 이상 굳이 더 듣고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내려가 있으려고?"
"네, 미리 가서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으려고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던져진 앨리스의 물음에 답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다름아닌 앨리스의 표정 때문이었다.
무슨 엄청난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같은 얼굴을 한채 날 바라보는데 웃음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요?"
해서 그리 물었더니 순간 움찔하며 놀란 앨리스가 황급히 제 표정을 고쳐보였다.
바이올라와의 결전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없을 내게 생각할거리를 더 얹어주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걸까.
"아, 아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저렇게 얼버무리는 걸 보면.
그래서 무어라고 가타부타 말을 하는 대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압박감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일까. '으..'하고 앓는 소리와 함께 바이올라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이내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것은..
"미안.. 내가 좀 더 잘했으면.."
날 향한 사죄였다.
자신이 허무하게 져버린 바람에 내가 짊어져야할 부담이 가중되었다고 생각한 걸까.
놀랍게도 그런 모양이다.
그런 앨리스의 발언에 대한 내 생각을 밝하자면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다.
저쪽에서 부장으로 출전했던 이를 상대로 승리를 따낸 시점에서 그녀는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으니까.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랬다.
딱 거기까지가 1인분이고 그 이상은 플러스 알파랄까.
물론, 앨리스가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져버린 건 확실히 예상밖의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앨리스를 탓할 이유가 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다다익선이라고 플러스 알파가 차지하는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건 사실이지만 제게 주어진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니까.
세상에는 그 1인분조차 하지 못하는 것들이 수두룩하니 말이다.
예를 들어 전회차의 주인공이라는 새끼가 제게 주어진 1인분을 완벽하게 수행해냈다면?
세상이 그 꼴이 나는 일도 없었겠지.
아니, 굳이 1인분까지 갈 것도 없었다. 영 점 몇인분이라도 수행해냈다면 나머지 부분은 내가 어떻게든 메꿨을테니까.
헌데 놈은 영쩜 몇인분은 커녕 그냥 인분같은 놈이었다.
그러니 그 세계가 그 꼴이 나버린 것이고.
생각이 잠시 다른 곳으로 빠지긴 했는데 아무튼 내 솔직한 생각은 그렇다는 거다.
그렇기에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는 앨리스를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었다.
"아니면 혹시 제가 질 것 같아서 그래요?"
위로만으로는 크게 효과가 없는 듯해서 일부러 살짝 기분 나빠하는 티를 내며 그리 물으니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무, 무슨 소리야! 당연히 네가 이기겠지. 이기겠지만.."
"흐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누가 그러던데."
그리 말하며 앨리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더니 꼴깍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미, 믿는다니깐.."
거의 동시에 흘러나온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눈에 주고 있던 힘을 풀었다.
그리고는 앨리스를 향해 보란듯이 씩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면 느긋하게 보고 있어요. 금방 끝내고 돌아올테니까."
물론, 금방 끝내지는 못할 거다.
바이올라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건 이미 확인했을 뿐더러 그녀와의 경기가 끝난다 하더라도 다른 게 남아있으니까.
그 점을 고려하면 경기를 아무리 일찍 끝내도 이곳으로는 제때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컸지만 어쩌겠는가? 말이라도 이렇게 해야지.
당연히 이길 것처럼 너스레를 떠는 내 모습을 보고 나서야 좀 안심이 되었던 모양이다.
"..응."
아까와 비교하면 한결 편해진 얼굴을 한채 앨리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다리고 있을게."
"혹시 일찍 돌아오면 보상같은 건 없나요?"
"보, 보상?"
거기까지는 생각해본 적 없는 모양이다.
멈칫하며 당황하는 그녀의 귀에 대고 평소 그녀를 볼 때마다 생각했던 것을 나지막하게 속삭이니 속삭임이 이어질수록 앨리스의 얼굴이 붉게 변해갔다.
그뿐만이랴 최초로 속삭인 말을 듣고 놀란 심정을 표현하듯 작게 벌어졌던 입이 내가 몸을 뒤로 물릴 때에는 헤하고 벌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맘같아서는 벌어진 입에다가 손가락이라도 찔러넣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상태로 굳어버린 앨리스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피식피식 웃다가 일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해보이며 그녀의 눈치를 보는 듯한 움직임을 취했다. 그에 걸맞는 목소리를 내준 건 덤이었다.
"혹시 싫으신 건.."
그저 운만 떼봤을 뿐인데 돌아온 건 그 어느 때보다 훨씬 격렬한 반응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준비동작같은 것도 없이 앨리스의 몸이 제자리에서 펄쩍하고 튀어오를 정도였다.
"그, 그럴 리 없잖아. 나, 나는 그냥.."
"그냥?"
순수하게 그 뒤에 어떤 말이 올지가 궁금해서 물어본 것 뿐이었는데 앨리스에게는 꽤나 치명적인 일격이었던 모양이다.
끄응하고 앓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안 그래도 빨갛던 앨리스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하도 빨개서 잘 익은 문어가 생각날 정도였다.
그런 모습을 한채로 끙끙거리며 앓던 앨리스가 결국 내놓은 말은..
"그, 그거면 되는 거야?"
다름아닌 그것이었다.
누가봐도 지금의 주제를 여기서 마무리하고 싶다는 욕망이 노골적으로 담겨있는 발언이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네."
"..알겠어. 그럼."
앨리스와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진작에 넘어섰던 모양인지 그녀가 빨갛게 물든 얼굴을 한채 날 대기실 밖으로 내몰았으니까.
덕분에 마음 편하게 그 앞을 떠날 수 있었다.
원래였다면 대기실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을 진행요원과 함께 내려갔겠지만 경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마중을 나와있는 이가 없었고,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혼자서 움직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딱히 문제될 건 없었다.
안내를 받으며 움직이든 혼자 움직이든 결국 목적지는 같으니까.
그렇게 게이트를 향해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밑으로 내려가는 날 반기기라도 하듯 아래쪽에서부터 위를 향해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층계참을 따라서 메아리치는 발자국 소리는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였고, 덕분에 어렵지 않게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타이밍에 이곳으로 올라올 이들이라고 해봐야 뻔했으니까.
해서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니 아니나 다를까 눈앞으로 나타난 건 진과 우리 쪽으로 배정된듯 오늘 하루동안 꽤나 자주 마주친 바 있는 진행요원이었다.
설마 내가 먼저 움직일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것일까.
몸까지 움찔하며 당황한 진행요원과는 달리 날 발견한 진의 반응은 비교적 덤덤했다.
꼭 마치 내가 먼저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기라도 한 것같은 반응이었고, 그렇기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참았다.
"내려가는 거야?"
"응."
"응원할게."
누구와는 달리 참으로 담백한 태도였고 그렇기에 나도 별다른 부담없이 진의 말을 맞받아칠 수 있었다.
그런 우리 둘과는 달리 곤란에 빠진 이가 한 명 있었으니 그건 바로 우리 측을 담당하는 진행요원이었다.
졸지에 나와 진 사이에 끼어버린 그녀는 나와 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자신의 곤란한 심정을 있는 힘껏 드러냈다.
이대로 진을 대기실까지 바래다 주자니 다음 경기에 출전할 내가 혼자 움직인다는 사실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모양.
하고 있는 표정에서 그러한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그녀를 향해 말을 건넸다.
"전 괜찮으니까 진부터 데려다주고 오세요."
다른 이도 아니고 본인이 직접 나서서 괜찮다고 말하니 그나마 좀 안심이 되었던 걸까.
날 향해 고개를 꾸벅하고 숙여보인 그녀가 진을 이끌고 사라졌다.
그렇게 둘을 보내고 난 후에 무대로 통하는 게이트 앞에 도착하니 그곳을 지키고 있던 이로부터 제법 따끔한 시선이 날아왔다.
안내자는 어디다 두고 혼자 내려왔냐고 묻는 듯한 그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디아나도, 앨리스도 이용한 바 있는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경기까지는 불과 10분도 남지 않은 상황.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어떤 식으로 보낼지 결정하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랜만에 그거나 해볼까..'
몸이야 이미 충분히 풀어놓긴 했지만 그새 굳어버린 있을지도 몰랐기에 대기실서부터 챙겨온 것들을 방 한켠에다가 고이 놓아두고 다리부터 길게 늘어뜨렸다.
그런 식으로 느릿하게 몸을 풀어주면서 머릿속으로는 내게 남은 시간을 헤아렸다.
적응을 위해 좀 일찍 마신 것도 있고, 쉬는 시간이니 뭐니하는 것들로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이 소모된 상황.
거기에 경기가 시작될 때까지 남은 시간을 더하면 내게 남은 건 대충 반절 정도였다.
'45분.'
그리고 경기의 결과가 나오는 건 30분이면 충분할 거다.
대련을 길게 끌 생각은 없으니까. 넉넉잡아 30분이면 내가 이기든 그쪽이 이기든 분명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나오겠지.
그렇게 30분을 그쪽에 할당한다 치면 남는 건 15분 정도였다.
'15분..'
15분이라는 시간 안에 과연 안전한 곳까지 몸을 피할 수 있을까.
테러를 획책하고 있는 놈들의 목표도 알고 있고, 놈들이 어떤 타이밍에 움직일지도 대충 알고 있었지만 놈들이 어떤 식으로 일을 벌일지는 아직 확실치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최악의 최악까지 가정하고 상상해봤다.
이를테면 바이올라나 다른 누군가 사교도 놈들에게 인질로 잡히는 경우같은 걸 말이다.
대회장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그걸 빠져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간이 빠듯한데 거기에 그런 얼토당토 않은 조건까지 얹어지니 이성이 조심스레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속삭여왔다.
그렇기에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그 속삭임이 내게는 최악의 최악만 아니라면 괜찮다는 말로 들렸으니까.
그리고 뭣보다..
'보험도 하나 있고.'
그걸 사용하게 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현 시점에서는 알 수 없지만..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그런 식으로 근육 하나하나를 풀어주는 느낌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시뮬레이션을 돌리다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반응이 어떠려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날 봤을 때 바이올라가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