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78)화 (277/366)



〈 27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눈까지 부릅 떠가며 둘의 경기에 집중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그리하면 아직은 미심쩍은 부분이 해소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앨리스가 증언한대로 바이올라가 상대방에게 노골적으로 닿으려고 하는 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했는데..


'허.. 참..'


대치하듯 서 있는 둘의 모습을 보고 있다보니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보면 볼수록 기가 막히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으니까.

그야말로 자강두천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조합이라고 해야할까.

주인공과 제국의 황녀이자 여러 무투대회에서 이미 우승을 차지한  있는 이의 대결이라니.


듣기만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매치업아닌가.

맘같아서는 팝콘같은 거라도 구해다가 와작와작 씹어먹으면서 구경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옥수수는 존재하는 것 같으니까..'


찾아보면 어딘가에는 팝콘도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이 잠시 다른 곳으로 빠지는 동안 5차전의 주인공이라  수 있는 둘은 심판의 입에서 튀어나온 시작 신호에 맞춰서 착실하게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내게는 그게  의외였다.

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바이올라라면 시작하자마자 달려드는 쪽을 택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혹시 뭐, 진한테서 묘한 느낌 거라도 같은 걸까.


가능성이야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바이올렛의 감각을 일정부분 공유받으면서 느낀 것인데 바이올렛도 그렇고 바이올라도 그렇고 둘의 감각은 상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살짝 벗어나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그야말로 엄선된 혈통이라는 것이 오랜 시간동안 축적되게 되면 얼마나 무서운 것으로 거듭나게 되는 지를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시라고 해야할까.

그러니 바이올라가 진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무언가, 그러니까 인비저블 썸띵을 느꼈어도 그닥 이상할 건 없겠지.

신성력이라는  최근에 갑자기 뿅하고 생겨난  분명 아닐테니 황족의 혈통 중에 찾아보면 신성력 보유자나 하다못해 신성력에 민감한 이가 적어도 한 명정도는 있을테니까.


그게 핏줄을 타고 바이올라에게 전해졌다면?


앨리스를 상대할 때도 거침없이 달려들었던 바이올라가 진을 상대로 저런 식으로 경계심을 표출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바이올라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귀빈석에 앉아있는 성녀에 버금가는 신성력을 지닌 이가 튀어나온 셈일테니 말이다.

'어쩌면..'

진이 실은 남자가 아니라 남장을 한 상태라는 것도 이미 꿰뚫어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한테 배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위장의 완성도가 제법 뛰어나서 얼핏 보든 자세히 들여다보든 그저  곱상한 편인 남자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제 겉모습을 꾸미고 있는 진이지만 냄새같은 것까지 완벽하게 신경을 썼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남성의 냄새와 여성의 냄새는 분명히 다르다.


남자에게만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있는가 하면 여자에게서만 맡을  있는 냄새도 있는 법, 그리고 사기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후각을 지닌 바이올라가 누가봐도 또렷한 그 차이를 구분 못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아마 더 경계하는 것일 수도 있었고.

신성력만으로도 충분히 수상쩍은데 남장까지 해가면서 정체를 숨기고 있는 이가 상대다?


저자리에 서 있는 것이 바이올라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였다고 해도 당연히 의심부터 하고 봤을 것이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암만 생각해봐도 여자가 굳이 남장을 할 이유가 없을테니 더더욱 그럴테지.


그런 식으로 나름 흥미로운 대치를 이어나가는 둘 사이로 제법 팽팽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둘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그 광경이 꽤나 희한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아, 분위기가 아주 팽팽합니다!

-바이올라 참가자, 굉장히 신중한 태도로 경기에 임하는군요.


-누가 상대더라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네, 그야말로 교류전의 목적에 걸맞는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남자 쪽도 그렇고 여자 쪽도 그렇고 둘다 꽤나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들또한 시작 신호가 울려퍼지자마자 바이올라가 미친듯이 돌진해서 진의 뚝배기를 깨부숴놓는 광경을 상상했던 모양.

그런 식으로 뜻밖의 대치상황을 이어나가던  중에서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진이었다.

계속 마주보고 서 있으려니 답답하기라도 했던 걸까.


아니면 지금쯤 귀빈석 한 가운데에 앉아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지도 모르는 성녀의 존재가 내심 마음에 걸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 진실일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니 진은 말 그대로 거침이 없었다.

주최측으로부터 지급받은 대련용 철검, 아니 통짜 쇠몽둥이를 단단히 꼬나쥔채 느릿하지만 꾸준하게 걸음을 옮기던 진이 조금씩 자세를 낮추기 시작했다.


'허..'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탄했다.

그녀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눈치챈 상태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에는 그냥 대충 흘려넘겼던 것들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니까.


이를테면 지금 진이 취하고 있는 자세같은게 그러했다.

얼핏보면 그냥 상대방을 향해 달려들기 전에 취하는 포즈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기를 쥔쪽의 어깨보다 그렇지 않은 쪽의 어깨가 살짝 앞으로 나가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저 자세는 '시작의 자세'라는 놈으로 전생에서 성기사들이 전투 시작 직전에 주로 취하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저 자세의 또다른 특징은..

'그래 저거.'

세트인 보법이 다소 특이하다는 것이다.


 마치 담뱃불을 끌 때마냥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린채 앞부분을 바닥에 대고 이리저리 비벼대곤 하는데..  모습이 지금 진에게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상대가 워낙 강적이다보니 전까지는 의식적으로 숨겼었던 자질구레한 습관같은 것들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고 있는 모양.


뭐, 상대가 강하다는  말고도 이유는 더 있을 것이다.

특히나 바이올라의 생김새가 결정적이었겠지.


진이 내가 아는 그 성녀와 동일인일 때의 이야기긴 하지만, 바이올라처럼 생겨먹은 이들이 수많은 민족중 하나로 취급받는 이 세계와는 달리 전회차에서는 바이올라처럼 생겨먹은 이들을 라이칸스로프나 워울프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마족 중  종류로 취급했으니까.

문제는 그런 식으로 불렸던 놈들이 하나같이 악랄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이었다는 거다.


그러니 바이올라처럼 생겨먹은 놈들에게 동료를 몇이나 잃어본 경험이 있는 진, 아니 성녀로서는 당연히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서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굉장히 과감해보이는 진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자니 드디어 바이올라 쪽에서도 움직임을 보였다.


상대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가만히 정탐만 했더니 좀이 쑤시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권투의 기본자세를 생각나게 하는 포즈를 취한채 바이올라가 진의 주변을 빙글빙글 배회하기 시작했다.


한껏 날을 세운 눈으로 진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게  먹잇감의 주변을 돌며 서서히 거리를 좁히는 늑대를 생각나게 했다.

'생긴대로 논다더니만..'


  때마다 인사라도 하듯 좌우로 바쁘게 흔들리던 꼬리는 오늘따라 굉장히 잠잠했다. 덕분에 바이올라가 지금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 지를 대충이나마 알  있었다.

충돌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진의 주변을 빙글빙글 배회하던 바이올라의 모습이 일순간 흐릿해지더니 그녀는 어느새 진의 옆구리를 노리고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의외였던 점은 거의 기습이나 다름없는 형태로 이루어진 바이올라의 공격을 진이 제법 능숙하게 막아냈다는 것이다.

힘에서 밀렸는지 살짝 뒤로 밀려나긴 했지만, 바이올라가 목표로 하던 옆구리를 내어주진 않았으니까.


까앙-!

'아니 근데 뭔 놈의 소리가..'


바이올라가 건틀렛을 착용한 상태라고는 하나  사이에서 터져나온 소리는 자뭇 살벌했다.


 마치 곡괭이로 차돌을 내리쳤을 때나 날법한 그런 소리라고 해야할까.


그런 것이 그때부터 계속 울려퍼졌다.

개시부터 막히니 내심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인지 그때부터 바이올라가 진의 옆에  달라붙어서 공격을 퍼부어대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쏟아지기 시작한 것들을 진은 굉장히 침착하게 방어해냈다.


공격은 몰라도 방어하나만큼은 자신있다는 것같은 태도였고, 덕분에 내 안에 자리하고 있던 확신이라는 놈의 깊이가 조금 더 깊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공격보다는 방어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또한 내가 기억하는 성녀의 특징 중 하나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회차에서 그녀는 기본적으로 후방에 서는 역할이었다. 그것도 그냥 후방이 아니라 후방 중에서도 최후방이라고 해야할까.

물론, 본인은 최전선도 딱히 상관없다는 입장이었지만 내가 그렇게 배치했었다.


성녀에서 수녀로 단숨에 강등당한 것도 모자라 사람이 가축처럼 죽어나가는 전선으로 내몰리게된 그녀의 처지를 동정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전략적인 판단이었을 뿐이다.


아마 사령관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성녀라는 직위를 잃었다고는 하나 그녀가 가진 신성력과 성법은 그대로였고, 그녀 정도 되는 최상위 성법사를 전선으로 내모는 미친 짓을 할 작자라면 애초에 사령관 자리에 앉지도 못했을테니까.


물론, 그에 따른 반발이 결코 적지는 않았다.

특히 외부에서 오는 반발이 거셌다.


그녀가 교단의 위신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하는 미친 노괴들이나 평소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썩을대로 썩은 놈들이 이런저런 루트로 압박을 넣으며 그녀를 전선에 세워 '순교'시켜버릴 것을 강요하곤 했으니까.

심지어는 주인공이라는 새끼도 은연중에 그것을 바라는 눈치였고.

제가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가 눈앞에서 버젓이 돌아다니니 죄책감 때문에 살짝 돌아버렸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그랬다.


'설마..'

그래서 튀었나?

잠시 이상한 곳으로 빠질 뻔했던 생각을 잽싸게 원래 자리로 되돌렸다.


 이상은 지금와서 생각해봐야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에 불과했으니까.

그래서 쓸데없는 곳에 심력을 낭비하느니 바이올라의 움직임을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두자는 마음으로 일방적인 공세의 현장을 향해 시선을 던졌더니..


'흠..?'

앨리스가 언급한 바 있는 이상한 점이라는 게 대강 어떤 느낌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대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면 유의미한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상황에서 바이올라는 종종 손을 펼치곤 했으니까.


처음에는 공격이 제대로 먹히질 않으니 답답한 마음에 잡기 기술이라도 펼쳐보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런  몇 번이나 반복되니 눈치채지 못할래야 못할 수가 없었다.


나와 나란히 앉아서 둘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앨리스도 바이올라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다.


"방금 봤지?"

그녀가 아까보다 확신이 깃든 얼굴을 한채 날 향해 그리 물어왔다.


"확실히 무슨 느낌인지 알  같네요."


"그렇지?"


그녀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적당히 답을 한뒤 다시금 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차하는 사이에 당해버린 누구와는 다르게 바이올라를 상대로 나름대로 선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진이지만 그마저도 슬슬 힘에 부치는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올라의 공격을 받아내는 팔이 점차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으니까.

그에 비해 바이올라는 전혀 지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나 공격을 퍼부어댔음에도 느려질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으니까.


'아니, 뭔놈의 체력이..'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으려니 둘 사이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기 그지없는 파열음이 터져나왔다.


까아아아아앙-!

귀를 찢어발기는 듯한 소음에 나름대로 긴장감 넘치는 둘의 공방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의 표정이 미리 약속이라도  것마냥 일제히 일그러졌다.

그리고  소리가 터져나온 현장에는..


사납기 그지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바이올라와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을 하고 있는 진이 서 있었다.


-아아아아! 엄청난 괴력!!

진행자의 입에서 탄식인지 모를 것이 터져나온 순간, 바이올라의 손아귀 안에 잡혀있던 진의 철검이 형편없이 우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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