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사람 심리라는 게 참 웃기다.
분명 앨리스가 바이올라에게 패배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들 우리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세 명 중에 앨리스의 이름이 빠졌다는 것 하나만으로 어느새 불리한 건 우리쪽이 되어버렸다.
-아, 바이올라 참가자.. 역시 강합니다.
-한순간이었죠? 아차하는 사이에 뒤를 잡아버렸습니다.
-앨리스 참가자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죠
표면적으로나마 중립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진행자들의 반응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관객들을 보면 벌써부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가 속출하고 있었다. 심지어 개중에 몇몇은 더 볼 가치도 없다는 듯 일찌감치 자리를 떠나는 이도 있었다. 왕국말고 다른 나라가 우승하는 꼴을 보기 싫었던 걸까.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벌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반응들이 참으로 웃겼다.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숫자만 보면 여전히 유리한 쪽은 우리 쪽인데 저들의 반응만 보면 마치 나나 진이 아무 것도 못하고 그대로 패배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아니..'
그래도 교류전에 이름을 올릴 정도라면 성별에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뛰어난 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어쩌면 그냥 믿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여자보다 뛰어난 남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조선시대에 재능을 타고난 여성들이 느꼈던 기분이 이랬을까.
덕분에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 남성들이 받는 대우가 어떤 지를.
'이래서야..'
사교도라 헐뜯었던 놈들이 어떻게든 지금의 세상을 뒤집어보겠다고 아둥바둥하는 것도 이해가 갈 정도였다.
이런 자리에서조차 대우가 이럴진데 일상에서는 어떻겠는가.
굳이 하나하나 확인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러니 많은 남성들이 사교도 놈들의 속삭임에 홀딱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뭐..'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것 아니겠는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듯 자신을 향해 환호를 쏟아내는 이들을 상대로 손을 흔들어주던 바이올라가 그대로 자신이 걸어나왔던 게이트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대기실을 나섰다.
지금쯤 의기소침한 표정을 한채 이곳으로 돌아오고 있을 앨리스를 마주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다보니 딱 예상했던 그대로의 얼굴을 한채 터벅터벅 계단을 오르고 있던 앨리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도 내 기척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대로 땅속으로 파고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자신이 오르고 있던 계단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앨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렇게 눈이 마주친 순간, 앨리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단 한순간에 무력하게 패배해버린 것이 그리도 부끄러웠던 것일까.
앨리스의 눈 주위가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거칠게 경련하더니 이내 그녀가 내 시선을 피했다.
졸지에 계단 중간에 애매하게 멈춰서버린 앨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하고 계단을 밟는 소리가 층계참 안으로 메아리칠 때마다 그에 맞춰 앨리스의 어깨가 움찔움찔 떨렸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앞에 도착할 쯔음에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졸아붙어 있었다.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어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던 건 그래서였다.
여기서는 무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보다 그 편이 차라리 효과가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리했던 것인데 다행히 효과가 없지는 않는 듯 했다.
등을 토닥이기 시작한 순간, 안쪽에서부터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온 듯 앨리스가 입술을 꽉 베어물었으니까.
그 상태로 한동안 몸을 파르르 떨던 앨리스가 이내 후하고 짧은 숨을 흘렸다.
보아하니 순간적으로 울컥하고 치솟았던 게 조금이나마 진정된 모양.
"괜찮아요? 혹시 다친 곳은.."
"..응, 괜찮아."
물론, 완전히 진정되기에는 시간적으로 무리가 있었는지 내 물음에 답을 하는 앨리스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미처 다 풀지 못한 분함이 섞여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까 전부터 하고 있던 등 두들기기를 끊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니 그게 또 다른 의미로 민망했나 보다.
"그.. 이제 괜찮은데.."
우물쭈물하던 앨리스가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사양의 뜻을 밝혀왔다.
해서 등을 두들기던 손부터 떼어낸 뒤, 진정이 된 듯한 앨리스를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계단 한복판에서 계속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그녀와 마주 앉아 그녀와 바이올라 간의 경기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이제 간신히 진정이 된 앨리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둘의 경기를 보고 느낀 의문점이 몇 개 있었으니까.
나혼자서는 그걸 풀 수 없었지만 바이올라를 직접 상대해본 앨리스의 증언을 듣는다면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리했던 것인데..
"알겠어."
다행히 앨리스는 그런 내 뜻을 이해해주었다.
나름대로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여준 앨리스를 상대로 그녀와 바이올라의 대련을 보며 느꼈던 의문점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다가 잠시 말을 끊고 숨을 골랐다.
이제 궁금한 것들은 얼추 해결되었으니 가장 궁금했던 것에 대해 물을 차례였으니까.
다만 상황상 민감한 질문이 될 수밖에 없는 만큼 뜸을 들이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내가 자신의 기색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일까 앨리스가 가슴을 쫙 피더니 자세를 바로했다. 그리고는 날 향해 똑바로 시선을 던져오는데 그 모습이 꼭 얼마든지 물어봐도 좋다고 말하는 듯 했다.
"그.. 마지막에 있잖아요."
"마지막에?"
"네, 제 눈에는 한순간에 뒤를 잡힌 걸로 보였는데.."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다름아닌 그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앨리스가 바이올라에게 뒤를 잡히는 순간 바이올라가 어떤 식으로 움직였는지 난 보지 못했으니까.
그 순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거나 그래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
보고 있긴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보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 중간과정을 가위로 잘라내서 날려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눈 깜짝하는 사이에 멀리 떨어져있던 바이올라가 앨리스의 뒤에 와 있더라.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는데 그 현상을 직접 겪어본 앨리스에게는 뭔가 다른 게 보였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뼈아픈 기억을 헤집는 것까지 감수해가며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인데.. 어째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게 살짝 애매했다.
"아, 으음.."
난감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는 것이 뭘 말하는건지 알긴 알겠는데 답을 해주기 어려워하는 느낌?
그런 것이 앨리스의 얼굴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그 상태로 볼을 긁적이던 앨리스가 어렵사리 한 마디를 내놓았다.
"그게.. 나도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다니?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무슨 뜻이냐는 시선을 돌려주니 앨리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 정신 차리고 보니까 뒤를 잡혀 있더라고."
정신 차리고 보니까 뒤를 잡혀있었다는 건?
움직이는 걸 보지 못했다는 소리일 거다.
그렇다는 건..
바이올라가 그만큼 빨라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기 보다는 무언가 신비가 개입된 결과물이라 보는 것이 옳겠지.
문제는 그 조건이었다.
신비로운 모든 것에는 그를 뒷받침하는 조건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그렇기에 그 조건이라는 것부터 우선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신비로운 것들을 상대하는 기본이니까.
'뭘까.'
바이올라가 승리를 굳히기 위해 사용했던 그 기이한 움직임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있는 걸까.
앨리스에게 바이올라와 싸우며 느꼈던 감상같은 걸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말해달라고 요청했던 건 그걸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원래 이런 건 기본적으로 문제 속에 정답이 있기 마련이니까.
"이상한 점? 음.."
이상한 점이라고 하니 막상 생각이 나질 않는 걸까. 그래서 생각나는대로 전부 말해달라 했더니 그제서야 앨리스의 입이 좀 트였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나온 것중에는 꽤나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것도 몇 개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이건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으니까 말해주세요."
"아, 응. 그러니까 음.. 묘하게 접촉에 집착하는 느낌? 같은 게 좀 있었다고 해야하나.."
"접촉이면.."
"응, 자꾸만 내 몸을 붙잡으려고 하더라고."
이런 부분같은 게 그러했다.
다만 이번 건 가능성이 있어보이면서도 살짝 애매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바이올라가 사용하는 건 기본적으로 권이었으니까.
앨리스를 상대할 때 보여주었던 움직임을 떠올려보면 본래 사용하는 건 권법보다는 조법에 가까운 듯 했지만 규정상 날이 있는 무기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보니 타협을 본 결과물이 그것인 듯 했다.
그래서 바이올라에게 주어진 것은 앨리스나 디아나에게 주어졌던 뭉툭하기 그지없는 대련용 철검이 아니라 통짜 철로 된 건틀릿이었다.
그 점까지 고려한다면 바이올라가 자꾸만 앨리스에게 닿으려 했던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가능했다.
일단 닿으면 붙잡을 수 있으니까.
마지막까지 제대로 성공을 못해서 그렇지 제대로 붙잡기만 했다면 경기 양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 그런 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처절한 모습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잡힌 순간 밀려 넘어져서 상위 포지션을 내줬을 수도 있고, 그대로 잡기 기술을 당해서 바닥에 쳐박혔을 수도 있으니까.
내 생각은 그랬지만 일단 앨리스의 의견도 접수해놓기로 했다.
그녀가 저런 식으로 말을 꺼냈을 정도면 분명 뭔가 느낀 게 있다는 소리일테니까.
'접촉이라..'
접촉이라고 하니 공교롭게도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다름아닌 바이올렛이 내 목덜미에다가 새겨넣은 표식을 말하는 것이었다.
'
그때 내 목에 그것을 새기기 위해서 그녀는 상당히 과감한 스킨십을 감행했었다.
헌데 만약 그런 식으로 반려에게 새기는 것 말고 다른 종류의 표식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게 바이올라가 보여주었던 기이한 광경과 관련이 있는 거라면?
'이것도 말이 되긴 하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표식이 새겨졌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표식을 새기기 위해서는 다른 건 몰라도 그 대상과 '접촉'하는 건 필수인 듯 했으니까.
딱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새 쉬는 시간이 모두 흘러가버린 것인지 대회장 안으로 진행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바이올라와 등장할 때와 거의 흡사했다.
자리로 돌아온 진행자의 신호에 맞춰서 화면이 넘어갔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진행요원의 손에 의해 진의 초상화가 박힌 나무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반응은 좋지 않았다.
남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대를 걸 가치를 느끼지 못했던 건지 대회장 앉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어차피 바이올라가 이길게 뻔한데 뭣하러 보느냐는 느낌?
기대감을 품고 있는 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경기 내용보다는 다른 걸 기대하는 듯 했다.
남자지만 기사.
이 세계에서는 결코 흔치 않은 존재가 무력하게 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막 흥분이 되고 그런 걸까.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물들인 이가 곳곳에서 속출했다.
그런 반응들은 주로 왕국하고는 관계가 없는 이들의 것이었고, 왕국민이거나 왕국하고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사기가 침체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축 쳐져버린 분위기를 수습하는 건 다름아닌 진행자들의 몫이었다.
표정을 보니 기대가 되지 않는 건 그들또한 마찬가진듯 했지만 진행자로써 축 쳐진 분위기를 가만 내버려둬선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이 텐션을 억지로 높이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상황.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기 차례냐면서 대기실을 빠져나갔던 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이올라는 이미 일찌감치 나와서 무대 위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황.
여전히 온몸에 여유라는 것을 두르고 있는 바이올라를 향해서 진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과 똑바로 시선을 맞춘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진의 모습이 의외였던 것일까.
아니면 진의 비밀 중 하나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둘 중에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을 바라보는 바이올라의 눈에 순간 이채가 서렸다.
그렇게 둘이 서로 대치하듯 마주보고 선 순간, 나도 거기에 맞춰서 창쪽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앉았다.
그리고는 눈을 부릅 떴다.
그 가운데..
-그럼! 결승전 5차전 경기!
-지금 바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둘의 경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