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76)화 (275/366)



〈 27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벌써?

솔직히 말하자면 그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대회장 내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던  그래서였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거라고 보고 있기는 하지만 만에 하나 앨리스가 패배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급한대로 복도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창에  달라붙었는데..

다행히도 내 기대가 배신당하거나 그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무대 위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주저앉아있는 누구와는 다르게 앨리스는 당당하게 두 발로 무대를 밟고 서 있었으니까.


심지어 둘의 표정도 극명하게 달랐다.


주저앉아있는 쪽은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이리 허무하게 패배할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허탈함 가득한 표정을 얼굴 가득 베어물고 있는 반면 앨리스의 표정은 덤덤함 그 자체였으니까.


꼭 마치 당연히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라고 해야할까.

그걸 확인했는지 주저앉아있던 이의 얼굴 위로 순간 울컥하는 표정이 번져나갔다.


'하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진 것도 빡치는데 상대방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다?

얕보여졌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을 거다.


그러니 저렇게 울컥한 것일테고.

허나  표정 자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서 독기가  빠져나가버렸으니까. 앨리스와 자신의 실력차를 인정하고 패배라는 결과에 완전히 승복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뭔짓을 하면 상대방이 저렇게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납득하나 싶었으니까.


-아! 앨리스 참가자! 강합니다! 강해요!

-디아나 참가자의 갑작스러운 기권으로 당황하셨을 왕국 관계자 분들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한 경기력이었죠?


-네, 그렇습니다. 마치 비도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나와버린 경기결과 때문에 지금쯤 난색을 표하고 있어야할 진행자들마저 앨리스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짖으며 용비어천가, 아니 앨비어천가를 불러대고 있었다. 덕분에 살짝이지만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하도 과하게 빨아대서 앨리스의 진짜 소속을 알고서 저러는 건가 싶기도 했으니까.

아무튼 쉬지 않고 울려퍼지는 찬양을 듣고 있으려니 앨리스를 향한 걱정을 잠시 접어둘 수 있었다.


관객들 뿐만 아니라 진행자들까지 저럴 정도면 정말 압도적이었다는 뜻일테고, 그렇다면 무투대회를 위해 필요한 적응을 무사히 끝마쳤다는 뜻일테니까.


말해 무엇하랴. 다소 특이한 무투대회의 규정 때문에 우리 중에 가장 골머리를 썩였던 것이 바로 앨리스였다.

다름아닌 날이 있는 무기는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규정 때문이었는데 덕분에 한때는 그녀의 장기 중 하나인 비도술이 봉인당할뻔 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규정을 정한 진행본부 측을 상대로 항의를 반복해서 결국에는 비도 사이즈를 축소하는 걸로 타협을 보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현생으로 따지면 의료용 메스와 비슷한 크기를 지닌 미니 비도들이었다.

다만 메스하고 완전 똑같지는 않았다.


날이 한쪽으로만 나 있을 뿐더러 날 길이에 비해 손잡이의 길이가 압도적으로 긴 의료용 메스와는 달리 진행본부 측에서 앨리스의 손에 쥐어준 것은 양날에다가 날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었으니까.

문제는 사이즈가 줄어들면서 무게또한 같이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이게 비도술이라는게 보기에는 쉬워보여도 사실 앨리스 정도 수준이 되면 자그만한 변화만 생겨도 정확도가 크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앨리스는 원래 사용하던 것보다 압도적으로 가벼워진 비도의 무게에 쉬이 적응하질 못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던질  손맛이 아예 없다나?


그게 불과 어제의 일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녀는 실전 체질이었던 모양이다.


'자, 이렇게 되면..'


이제 상대 측에 남은 선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명뿐인 상황.


물론,  한 명이 좀 많이 강력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쪽은 아직 세 명이나 남지 않았나.

설사 내 앞에 버티고 있는 둘이 바이올라를 상대로 승리를 확보하지 못한다해도 상관없었다. 승리하지는 못하더라도 체력을 소모시킬 수는 있을테니까.

그렇게 어느 정도 체력을, 그리고 심력을 소모한 바이올라의 앞에 내가 딱 등장해서 무투대회를 마무리지어버린다면?


나로서는 그보다 좋은 상황이 또 없었다.


앨리스의 퇴장 타이밍에 맞춰서 밑으로 내려갔던  그래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 차례가 된다면 내려가서 응원을 해주기로 약조한 상태였으니까.


약간의 귀찮음을 감수하는 것만으로 앨리스의 사기와 의욕을 복돋을 수 있다면 당연히 해야하지 않겠는가.

"왔어?"

해서 싱긋 웃으며 날 반기는 그녀의 옆에 착 달라붙어 이런저런 시중을 들어주었다.

덕분에 아까도 봤었던 진행요원으로부터 '뭐하는 놈이지 저거..'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 날아와 꽂히기는 했지만 가볍게 무시해주었다. 지금 중요한  그딴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자신 있어요?"

의중을 떠보듯 물었더니 돌아온 건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대답이었다.


"글쎄.."

그렇기에 오히려 안도했다. 그런 표정은 아니긴 했지만 혹시라도 승리감에 도취되어 바이올라를 얕잡아 본다거나 방심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으니까.

헌데 저렇게 구체적인 대답을 피한다는 건?


얼핏보면 자신없어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편이 차라리 나았다.

마음 속에 한톨이라도 방심이나 상대방의 실력을 경시하는 마음이 끼어있다면 바이올라는 그걸 놓치지 않을테니까.

"그나저나 디아나 선배는 어때? 괜찮대?"

첫 고비라 할 수 있는 1승고지를 넘어서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 걸까.

앨리스는 무려 디아나의 안위까지 묻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그또한 내게 있어서는 긍정적인 신호로 느껴졌다.


방심은 좋지 않지만 여유는 가지고 있어도 나쁠 게 없었다.


여유가 없으면 조급해지기 마련이고, 조급함은 실수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니까.


그런 식으로 앨리스의 옆에 착 달라붙어서 손으로는 근육의 피로를, 입으로는 멘탈을 관리해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경기와 경기 사이에 존재하는 10분이라는 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렸고, 다시 앨리스가 나설 차례가 되었다.

"잘하고 와요."


그 말에 앨리스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살짝 흔들어보였을 뿐.

최대한 긴장감을 덜어주려고 노력하긴 했는데 경기가 코앞까지 다가오니 긴장감이라는 놈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모양.

그래서 그런지 살짝 뻣뻣해보이는 그녀의 움직임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모습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는 타이밍에 맞춰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게이트 밖까지 앨리스를 배웅하고 돌아온 진행요원으로부터 예의 그 따끔한 시선이 날아와 꽂혔지만 이번에도 마찬기지로 무시했다.

내가  짓이 있으니 꽃뱀 바라보듯 바라봐도 어쩔  없다 생각했으니까.

굳이 입 아프게 해명하기도 귀찮았고.

그렇게 게이트 옆을 떠나서 다시 대기실로 돌아오니 어느덧 진행자의 입에서는 바이올라의 정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이변입니다. 저는 사실 제국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건..


-네, 많은 분들의 예상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죠. 왕국 측이 앨리스 참가자를 포함해서 아직 세 명이나 남은 반면에 제국 측은 이제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명백히 패배 위기라 할 수 있는 상황인데요. 과연 바이올라 참가자는 위기에 빠진 제국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바로 확인해보시죠! 바이올라 참가자입니다!


그 멘트와 함께 바이올라가 게이트 안쪽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에게서 거인녀로부터 느낄 수 있었던 보는 이를 기죽게 만드는 위압감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여유가 가득했다.


여유라는 것이 그녀의 몸 전체를 따라서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일부러 꾸며낸 것 같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지금 그녀는 지극히 여유로운 상태로 보였다.

남들은 위기라고 말하는 상황을 위기라 여기지 않고 있기라도  것처럼.

사실상 제국 측의 마지막 희망이라  수 있는 그녀가 보여주는 여유로운 태도에 감화된 것일까.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불안감이라는 걸 품에 끌어안은 채로 웅성거리던 제국  관람객들의 표정이 점차 편안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바이올라님!!"

이내 입을 모아 바이올라콜을 외쳐대는  아닌가?


덕분에 회장 안은 바이올라를 부르는 목소리로 가득해졌다.


그리고 바이올라는 자길 찾는 사람들의 외면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까지 길게 뻗어있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을 살며시 흔들어보이는 모습이 꼭 이제 안심해도 좋다고 말하는 듯 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던 관람객들의 목소리가 한층  커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회장 안을 교국이 아닌 제국 한복판으로 탈바꿈시켜버린 그녀가 마침내 앨리스의 앞에 섰다.

'음..'

둘을 동시에 보는 경우가 흔치 않아서 몰랐는데 이제보니 바이올라 쪽이 앨리스보다 살짝 컸다.


하늘을 향해 높게 치솟아있는 귀빨을 감안해도 그랬다.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둘은 서로 웃는 낯을 한채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바이올라의 분홍빛 입술이 벙긋거림을 보임과 동시에 앨리스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치솟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바이올라가 날 가지고 도발같은 걸 날린 모양인데..

'흔들리면  되는데..'

그리 생각한 순간, 경기를 시작하기 위한 멘트가  진행자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왕국 측으로서는 승리까지 이제  한 걸음만 남겨놓은 상황!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시작하기도 전부터 두 참가자간의 기싸움이 살벌하네요.


-과연 4차전에서 승리를 가져가는  어느 쪽이  것인지..


-지금 바로 확인해보시죠!

그렇게 앨리스와 바이올라의 경기가 시작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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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승리를 가져간 건 바이올라 쪽이었다.

앨리스가 못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바이올라와 맞섰고, 꼴사나운 모습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경기가 끝난 지금 진행자들이 앨리스를 바라보며 자기가 다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겠는가.

그 정도로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 최선, 그녀가 전력을 쥐어짜내 마련해낸 것들이 바이올라라는 벽을 넘어서기에는 부족했을 뿐이다.

그만큼 바이올라는 강했다.

그리고 동시에 익숙해보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한정된 공간 안에서,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싸우는 행위가 그녀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일인듯 했다.


진행자들이 바이올라에 대해 소개할 때 제국에서 무투대회로 이름을 날렸느니 어쨌느니 하더니만  영향인 걸까.


'그래도 처음에는..'

앨리스에게 주도권이 있었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예의 그 미니 비도들을 사방으로 흩뿌릴 때만 하더라도 바이올라는 쉬이 거리를 좁히지 못했으니까.


그랬던 게 단 한순간만에 뒤집어져 버리더라.


-어때 놀랐어?


이번만큼은 그리 묻는 바이올렛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놀란 게 맞았으니까.

동시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심 바이올라를 얕잡아보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 정도로 바이올라는 강했다.


더 무서운 점은 저게 그녀의 전력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고.


그런 생각이 안 들래야  들 수가 없었던  앨리스를 상대하는 동안 바이올라의 얼굴은 단 한 번도 찡그려진 적이 없었다. 나조차도 앨리스가 대련에서 진심을 내면 한 번에서 두 번 정도는 곤란함을 느끼곤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되면..'


답은 하나 뿐이었다.


 앞차례에서 조금이라도 바이올라의 체력을 깎아주길 바라는 것, 바로 그것 말이다.


그래서 다음 차례인 진이 앉아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져봤는데..


"이제 내 차례지? 다녀올게."

마침 진도 내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고, 그 순간 그녀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대기실을 빠져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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