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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이 되기 전에 (275)화 (274/366)



〈 27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나서야 제 실책을 깨달은 것일까 디아나가 표정을 황급히 원래대로 되돌렸지만 그래봐야 이미 늦은지 오래였다.

숨길 거면 끝까지 철저하게 숨기던가 이게 뭐란 말인가.

다 들킨 마당에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눈빛 속에 질책과 걱정을 반씩 섞어서 그녈 바라보니 쏟아지는  눈빛을 감당키 어려웠는지 디아나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낭패감어린 표정과 꽉 깨문 입술은 덤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옆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진행요원 쪽으로 눈을 돌렸다.


"보셨죠? 아까 말한대로 기권처리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아, 넵.."

그걸로 끝난  알았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았나 보다.

기권까지 한 마당에 여기 더 있기도 뭐해서 디아나를 데리고 대기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치료사제들에게로 향하려 하니 어째 디아나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마치 누군가 못으로 그녀의 발을 그 자리에 고정시켜놓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  놈의 힘이..'

솔직히 말하자면 억지로 잡아끌고자 하면  잡아끌 것도 없긴 했다.

그럼에도 그렇지 않았던 건 디아나의 몸 상태가 환자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버티는 걸 보면 아무래도 아직 할 말이 남아있는 모양.

해서 할 말이 있으면 어디 한  해보라는 뜻으로 다시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그랬더니..


"나,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인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디아나가 고개를  치켜들며 그리 외쳤다.


순간적으로 울컥한 걸까.

기껏 입을 연  치고 디아나는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그렇지만 끝까지 듣지 않고도 알  같았다.


그녀가 말하려던 게 무엇이었는지를.


"더  수 있다.  말을 하려던 거죠?"


그래서 선수를 쳤다.


"인정해요. 당연히  할  있을 거에요."

자신이 하려고 했던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니 순간적으로 당황한 것일까. 막 열리기 시작했던 디아나의 입이 그대로 고정되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당황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녀 입장에서 보면 단호하게 기권을 주장하던 내가 손바닥 뒤집듯 갑자기 태도를  바꾼 셈일테니까.


디아나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나는 내 말을 꿋꿋이 이어나갔다.

"어쩌면  번째 승리를 기록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이게 꼭 빈말이 아닌 게 디아나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디아나에게 승산이 아예 없냐면 그건  아니었으니까.

바이올라가 갑자기 명장병, 묘수병이 도져서 자기 이름을 세 번째 칸에 적어넣지 않았다면 어제 차봉으로 출전했던 이가 부장으로 출전하게 될 텐데 그녀와 디아나 사이에는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힘도, 스피드도, 심지어 검술마저도 디아나가 훨씬 앞서니 진통제같은 거라도 챙겨먹고 경기에 임한다면 어렵지 않게 승리를 따낼 수 있을 터.

 가능성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리 될 거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럼에도 디아나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순순히 입장을 바꿀 리 없다고 판단한 걸까.


그럼에도 이만한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가 좀 그랬던 건지 그녀가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내 의중을 떠보기 시작했다.


"그럼.."


당연히 날 내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래야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지지 않겠느냐.


디아나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럼 그 다음에는요?"


"다음..?"

"네, 그 다음이요."

내 말에 디아나가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거기까지는 자신없다는 것처럼.


디아나의 얼굴 위로 나타난 그 반응을 확인한 순간 깨달았다.


그녀가  말을 이상한 쪽으로 오해했다는 것을.

그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그녀와 똑바로 시선을 맞춘 채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디아나의 활약 덕분에 우리가 결국 교류전에 승리했다고 쳐보죠. 그럼 끝인가요?"

"...."

내 물음에 디아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불만 가득한 시선이 내 얼굴로 날아와 꽂혔다.


그게 꼭 '그럼 끝이지 뭐가 더 있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설명을 덧붙인 건 그래서였다.

"기사로써 디아나 앨런의 삶도 거기서 끝나는 거냐고요."


그리 덧붙인 순간 얼굴로 날아와 꽂히던 디아나의 눈빛이 수그러들었다. 아니, 수그러드는 수준을 넘어 밑을 향했다.

"어쩌면 제가 필요 이상으로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 단순 염좌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하니까요."

"..."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면요?"

 가능성까지 생각하긴 싫었다.


그런 건  질색이니까.

어쩔  없는 상황이라며, 너밖에 없다며 강요당한 경험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등떠밀리듯 이루어지는 희생이 얼마나 사람 기분을 엿같게 만드는 지를.

헌데 그걸 남한테 강요한다?

그럴 생각따위 요만큼도 없었다.

하물며 그게 나와 관계를 맺은 여성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고.

"알고 있어요. 설령 일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선배가 절 원망하진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실제로 그럴 거다.


디아나는 그런 성격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제가 싫어요."

그런 거  질색이다.


그리고 뭣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설령 디아나가 경기에 나가지 않는다면 그대로 패배하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녀에게 무리한 출전을 강요할 생각은 없긴 했지만, 애초에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 자체가 그렇지가 않았다.

여기서 디아나가 기권한다 해도 그 뒤에는 앨리스가, 내가, 살짝 미심쩍기는 하지만 존재 자체가 사기나 다름없는 진이 있었다.

"세 명 대  명.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 상황이죠."


그리 말하며  웃어보인 것은 당연히 디아나에게 믿음이라는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말은 그리했지만 바이올라라는 변수가 존재하긴 했다.

그렇지만 우리 쪽에는 내가 있지 않나.

설령 내 앞에 버티고 있는 둘이 아무 활약도 보이지 못하고 그대로 패배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두 명을 차례로 상대하게 된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승리를 따낼 자신이 내게는 있었다.

"아니면 혹시 저희가 못 미더운 건.."


그렇기에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발자국 벗어나 농담도 던질 수 있었다.

"그, 그런 건 아니다!"

농담삼아 던진 말에 디아나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렇게 디아나가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웠다.

그리고는 그녀와 똑바로 시선을 맞춘  입을 열었다.

"그럼 믿어주세요."

그 말에 디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애꿏은 입술만 우물거렸다.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무슨 롤러코스터마냥 급변하는 분위기 탓에 눈치를 본답시고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던 진행요원의 얼굴 위로 '이게 뭐하는 짓이다냐..'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 떠오를 때쯤 마침내 디아나의 침묵이 깨졌다.

"..알겠어."


결국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일까.


여기서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분하기라도 한 것인지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딱딱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고개는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디아나가 어려운 결정을 내려준 덕분에 아까 전부터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던 진행요원또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네."


혹시라도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라도 할세랴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디아나의 기권과 관련된 사실을 전하기 위해 진행요원이 급하게 자리를 빠져나가고, 덕분에 디아나와 단둘이 남겨지게된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물론, 상대적으로 멀쩡한 쪽의 손이었다.

"그럼 치료부터 받으러가요. 흉지겠다."


"으응.."

결국 기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새삼 서럽고 그러기라도 했던 것일까.

앞서 움직이기 시작한 날 따라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디아나의 입술이 삐죽하고 튀어나오더니..


그녀의 눈가에 살짝이지만 습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자긴  할  있는데 상황이 따라주질 못하니 못내 억울했던 모양.

"울어요?"

아예 코까지 훌쩍이는 그녀를 향해 그리 물으니 제법 격한 반응이 터져나왔다.


"울긴 누가!"

눈물까지 글썽거릴 정도로 억울한 것과는 별개로 좋아하는 남자가 앞에 있는데 질질짜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긴 또 싫었던 걸까.

제자리에서 펄쩍하고 튀어오르며 잽싸게 제 눈쪽으로 손을 가져가길래 잽싸게 손을 뻗어 만류했다.

"어허."


멀쩡한 쪽이 내게 잡혀있는 탓에 다쳤을지도 모르는 쪽을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자유로운게 그것밖에 없어서 일단 움직이고 봤는데 막상 움직이고 보니 통증이 상당했던 것일까.


"읏.."

디아나의 표정이 구겨짐과 동시에 고통에 찬 신음성이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아이고.."


살짝 움직인 것만으로도 아파서 죽으려고 하면서 대련은 무슨..


"봐요. 이런 팔로 대련은 무슨.."

"아으으.."

"많이 아파요?"


아무래도 몸에 깃들어있던 긴장이 빠져나가며 통증이라는 놈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듯 했다.


"가만히 있어봐요."

그리 말하며 디아나의 몸을 안아들었던 건 그래서였다.


이대로라면 제대로 걷는 것도 힘들  같았으니까.

갑자기 몸이  떠오르니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것도 잠시,  품에  안긴  여자로써 민망하고 그랬는지 디아나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뭐, 뭐하는 거야. 내, 내려줘.."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거칠게 말을 하자니 혹시 내가 오해라도 할까봐 걱정이 됐는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팔이나  잡고 있어요."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싸그리 무시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나 걸었을까.

몸을 타고 올라오는 민망함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디아나가 결국 내 품에다가 얼굴을 파묻는 식으로 제 얼굴을 숨겼다.


 상태로 그녀가 뭔가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네?"

급하게 움직인다고 뭐라고 말하는지 잘 안들려서 그리 물으니 가슴팍에 파묻고 있던 것을 살짝 뒤로 물린 디아나가 그것을 그대로 내 가슴팍에다가 콩하고 박았다.

"그.. 괜찮을까? 아직 기권했다는 걸 모를텐데.."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분명 앨리스가 갑작스러운 출전으로 당황할 걸 걱정하는 거겠지.


"괜찮을 거에요."

그러니 지금은 다른 걱정 말고  몸이나 걱정하라는 뜻으로 그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있으려니 이내 회장 안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아, 진행본부에서 새로운 소식이 들어와서 전해드립니다.

그리 말하는 건 다름아닌 진행자 중 한 명이었다.

보아하니 디아나의 기권에 대한 걸 발표하려는 모양.


아니나 다를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비슷한 내용이 복도를 따라 울려퍼졌다.


-디아나 앨런 참가자는 2차전을 마지막으로 기권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그 말이 회장 안으로 울려퍼지기 무섭게 어마어마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아무래도 디아나의 기권 사실이 관객들에게는 꽤나 의외였던 모양.


'하긴..'

그토록 분투를 펼쳤던 이가 뜬금없이 기권한 꼴이니 이게 뭔가 싶었겠지.

덕분에 일어난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함인지 진행자가 디아나의 기권 사유를 입에 담았다.


부상으로 인한 기권이라는 말이 회장 안으로 울려퍼지고 나서야 웅성거림이  잠잠해지더라.


"들으셨죠?"

나 대신 진행자가 소식을 전해주었으니 앨리스 쪽은 문제 없을 거다.


그런 뉘앙스로 말을 하니 디아나가 그제서야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걸림돌까지 사라지고 나니 통증이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나 보다.


눈썹을 가운데로 모은 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디아나를 품에 안은 채 치료사제들이 대기하고 있는 의무실을 향해 내달렸다.

그렇게 의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디아나부터 보였다.

그리고 들을  있었다.


디아나의 팔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팔에 금이 갔어요. 아마 그대로 경기에 임했다면.."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구태여 입에 담을 필요가 없다 생각했는지 디아나의 담당이 된 사제가 슬며시 말끝을 흐렸지만 그걸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보나마나 디아나를 기다리는건 파멸 뿐이었겠지.

디아나한테 한소리 더 했던 건 그래서였다.


이번만큼은 디아나도 할 말이 없었는지 그녀는 전과는 달리 순순하게 내 꾸중을 받아들였다.

"필요한 처리는 모두 끝내두었으니 삼 일 정도 안정을 취하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물론, 그리고 나서도 일주일동안은 무리한 움직임은 삼가야할테지만요."

그러니 지금 당장 누워서 휴식을 취하라고 말하는 듯한 사제의 발언에 입각해 디아나를 병상 위에 뉘였다.

그리고는 제법 두터운 담요를 목 바로 밑까지 끌어올려주었다.


"쉬고 계세요."


"으응.."


얼굴에 거즈를 덕지덕지 붙인 채 고개를 끄덕이는 디아나를 뒤로 한채 의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대기실로 향했다.


당연히 3차전의 양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는데..


-와아아아아아!

아무래도 벌써 결판이 난 모양이다.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대회장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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