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74)화 (273/366)



〈 27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디아나를 보고 '연약하다'라는 감상을 느꼈던 게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단어와 백만광년쯤 떨어져있는 것이 바로 디아나였다.


분명 그랬는데..

골리앗과 맞서는 다윗을 바라보는 사람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1.5디아나도 아니고 거의 2디아나는 될법한 덩치를 지닌 거인녀를 상대로 검을 곧추세우는 디아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불안감이라는 것이 몸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디아나를  믿는 게 아니었다.

믿는다.

믿으니까  정도 선에서 그친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밑으로 뛰어내려갔을 것이다. 그리고는 무대 위로 흰 수건을 던졌겠지.


그만큼 피지컬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오죽하면 비겁하다는 생각마저  정도였다.


내 감상은 그랬는데 디아나는  달랐던 모양이다.

상대가 상대다보니 조금이라도 불안감을 내비칠 법도 한데 입술을  다물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흔들림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모종의 결심만이 가득할 뿐.


그 상태로 디아나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확신을 가지고 거침없이 달려들었던 1차전과는 사뭇 다른, 일견 조심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이었고 덕분에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디아나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경기에 임했는지를.

일단은 간부터 보겠다는 거겠지. 겸사겸사 1차전에서 소모한 것을 회복할 시간도 벌고 말이다.

1차전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체력을 아끼긴 했지만, 그렇다고 경기를 날로 먹은  아니었으니까.

슬라임녀의 저항이 꽤나 거셌던 탓에 적지 않은 움직임을 가져갔었고, 그렇기에 소모된 부분이 적지는 않겠지.

10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고는 하나 그것만으로는 소모된 부분을 다시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 생각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는 최상의 판단이었다.

문제는 상대가 어떤 대응을 보이냐는 건데..

궁금한 마음에 디아나 쪽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곧장 거인녀 쪽으로 돌리니 눈으로 들어온 건..

-아! 지니아 참가자! 여유롭습니다!


크게 하품을 하고 있는 거인녀의 모습이었다.


'어우..'

쩍 벌어진 입이 어찌나 큰지 파리는 물론 어지간한 새도 너끈하게 들어갈 듯 했다.


그렇게 크게 하품을  그녀가 손에  것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훙-! 훙-!하고 살벌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지는  했다.

마지막 점검이라도 하듯 두어번 정도 더  무기를 휘둘러보인 거인녀가 이내 디아나를 바라보며 씩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냥감을 발견한 듯한 맹수를 연상시키는, 날 것 그대로의 흉포함이 느껴지는 그런 미소였다.


설마 디아나가 그걸 보고 위축되기라도 바랐던 걸까.

디아나가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디아나를 바라보는 거인녀의 시선에 흥미가 어렸다.

그렇게 흥미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그녀가 디아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런 거인녀에게서 경계심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디아나가 무슨 짓을 하던 그게 자신에게 닿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듯한 태도였고, 그렇기에 디아나를 향해 다가서는 그녀의 몸에는 헛점이 가득했다.


기회를 노리는 입장에서는 찌르지 않고서는  배길 정도로.


그럼에도 디아나는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혹시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디아나의 선택이 정답이었다.

헛점을 한껏 드러내보였는데 찌르러 들어오기는 커녕 디아나가 묵묵히 제자리만 지키고 있으니 거인녀가 아쉽다는  가볍게 혀를 찼으니까.


여유롭기 그지없던 태도가 일변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 전까지는 바닥에 질질 끌리던 말던 개의치 않던 것을 그녀가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디아나를 향해 몸을 날리는데..


-아! 지니아 참가자의 매서운 돌진!


그 기세가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거대 육식공룡을 생각나게 했다.

뭔가 끔찍한 결말이라도 예상한 것일까.

두 명의 진행자 중 남자 쪽이 끔찍한  질색이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허나 놈이 상상하는 일같은 건 벌어지지 않았다.


여태껏 가만히 있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몸을 한껏 뒤로 젖힌 디아나가 그대로 쭉 미끄러졌다.

그런 디아나를 잡아보겠답시고 거인녀가 놀고 있던 손을 휘둘렀지만 그것이 디아나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거인녀의 손길을 회피한 디아나가 그대로 거인녀의 옆구리를 돌아 그녀의 반경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둘 사이의 거리가 원래대로 돌아간 순간, 둘의 얼굴 위로 떠오른 건 완전히 상반된 표정이었다.

한껏 찡그려진 얼굴.


그것은 다름아닌 거인녀의 것이었다.

그런 얼굴을 한채로 그녀가 디아나가 스치듯 지나갔던 옆구리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구겨진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갈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따끔했던 걸까.


그에 비해 디아나의 표정은 어땠는가 하면..

-아! 디아나 참가자! 웃고 있어요! 명백히 불리한 상황인데도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방금의 공방으로 뭔가 확신을 얻은 걸까요?


그랬다.


디아나는 웃고 있었다.


뭔가 확신이 생긴 듯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대련용 철검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합을 주고받은 둘은 그때부터 쉬지않고 부딪혔다.


몸집만큼이나 맷집도 터프한 모양인지 거인녀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인상을 썼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거침없이 디아나를 압박했다.


디아나로서는 한 방만 맞아도 위험할  분명한 상황.

그렇기에 디아나가 유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건만 놀랍게도 일진일퇴의 공방 속에서 우위를 가져간 것은 다름아닌 디아나였다.

다만 그렇다고 상황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점하고 있는 우위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특히나 걱정이 되는 부분은 다름아닌 체력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디아나가 우위를 가져갈  있었던 건 말 그대로 체력을 갈아넣었기 때문이니까.

한 방도 허용하면  되는 상황이었기에 디아나는 한 합을 주고받을 때마다 거인녀의  배를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이야 어찌어찌 버티고 있다지만..


'체력이 떨어지고 있어.'


내 눈에는 처음과의 차이가 훤히 보였다.

그렇기에 디아나로서는 그나마 체력이 남아있을 때 어떻게든 경기를 마무리 지어야하는 상황.

그리 생각한 건 그녀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그때부터 디아나의 기세가 적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초조함은 늘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법이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종일관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던 디아나가 갑자기 태도를 싹 바꿔서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니 거인녀가 당황해서 어버버하고 있다는 건데..

바로 옆에 착 달라붙어서 쉬지 않고 검격을 퍼부어대는 디아나를 일단 떨어뜨려놔야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거인녀가 그대로 오른 무릎을 차올렸다.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디아나가 즉시 몸을 옆으로 날렸고,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그 기세를 십분 살려 거인녀의 옆구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광경을 목도한 순간 입밖으로 터져나올 뻔한 비명을 다시금 속으로 삼켰다.

옆구리는 함정이었으니까.


거인녀의 얼굴 위로 귀찮게 앵앵거리던 모기를 마침내 포착하는데 성공한 사람의 그것같은 미소가 걸리더니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쇠몽둥이, 아니 쇠기둥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그때 이미 거인녀의 주먹은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디아나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고.

이미 검까지 휘두른지 오래기에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는 상황.

그 상황에서 디아나의 선택은 휘둘러지는 검에  몸을 착 가져다붙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검 옆면에 디아나의 몸이 찰싹 달라붙은 순간, 디아나를 노리고 쇄도하던 것이 그녀의 검과 맞부딪혔다.


-아아앗! 디아나 참가자!!


충돌의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진행자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터져나올 정도로.


트럭에 치인 사람의 모습이 저러할까.


거인녀를 향해 달려들던 기세만큼이나 빠르게 뒤로 날아간 디아나의 몸이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벌써  바퀴나 구른 건지 모르겠지만 문제는 그러고도 속도가 줄어들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날아가는 와중에도 디아나가 바닥을 향해 검을 내려꽂았던 것은.

그그그그극-

귀를 긁는 듯한 소음과 함께 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렇게 무대 밖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몸을 멈춰세우는데 성공한 디아나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이리저리 구른다고 먼지 투성이었던 몸이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이 거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덕분에 둘의 공방이 계속되었고, 쉬지 않고 이어지던 그 공방에서 결국 승리를 차지한 건..


-디아나 앨런 참가자! 고된 혈투 끝에 마침내 승리를 쟁취해냅니다!

다름아닌 디아나였다.


상처뿐인 승리라는게 저러할까.


고통과 굴욕감으로 일그러진 얼굴 외에는 비교적 멀쩡해보이는 거인녀와는 달리 디아나는 먼지투성이에 상처투성이었다.


거인녀의 공격을 피한답시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동안 돌조각따위가 몸 곳곳을 스쳤기에 벌어진 일이리라.

그렇게 안쓰러운 몰골을 하고서도 표정 하나만큼은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다음 경기도 문제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 디아나 참가자! 굳건합니다!

하고 있는 표정이 어찌나 위엄이 넘치는지 오죽하면 진행자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나올 정도였다.

그래서였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던 건.

1차전이 끝났을 때만 하더라도 내려갈 생각이 없다 말했던 내가 경기가 끝난 타이밍에 맞춰서 몸을 일으키니 의아했던 것일까.

"응? 내려가려고?"


"..네"

갑자기 날아든 앨리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고는 그대로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어제 한 번 방문한 바 있는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내려오는 동안 기타 자질구레한 절차들이 모두 끝난 것일까.


디아나는 게이트 옆에 딸린 자그마한 대기실에서 벽에 몸을 기댄 채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그녀를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딛으니 그 옆을 지키듯 서 있던 금발의 진행요원이 나와 디아나 사이로 끼어들었다.

"죄송하지만.."


아무리 같은 참가자라 해도 여긴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런 것같은데 끝까지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기권입니다."

"못.. 네?"


"기권이라고요. 디아나 앨런 참가자는 여기서 기권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당황과 함께 진행요원의 얼굴 위로 떠오른 건 네가 뭔데 그런 걸 결정하는 거냐고 묻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못 들었습니까?"

"아니 못 들었고 자시고를 떠나서.."


"각 측의 대장에게는 그런 권한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일전에 고지받은 바 있는 몇 안되는 규정  하나에 대해 언급하니 진행요원의 입이 먹잇감을 문 조가비마냥 꾹 다물어졌다.

아마도 그 때였을 것이다.

나와 진행요원이 벌이는 소란 덕분에 잠시 어딘가로 날아갔던 정신이 돌아온 것일까.

"이안?"

대기실 안에서 디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표정만 보면 정말 감쪽같았으니까.


'정말 이럴 때만..'

물론, 속아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지만.

"기권, 처리 안 해주실겁니까?"

네가 안 해주겠다면 내가 직접 진행본부로 쳐들어가겠다는 뉘앙스로 말을 하니 진행요원이 디아나를 향해 힐끔하고 시선을 던졌다.

나좀 어떻게 해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시선을 눈치챈 건지 아니면 기권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권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디아나가 한껏 인상을 쓰며 그리 물어왔다.


누가봐도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의아함과 당황을 동시에 느끼는 모습이라서 문득 웃음이 나왔다.

"정말 몰라서 물어요?"


"뭐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디아나의 손을 향해 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 내 손길을 피하듯 디아나가 황급히 손을 움직였지만 애석하게도 내쪽이  빨랐다.

그렇게 디아나의 손을 움켜쥔 손에 살짝 힘을 주어보았다. 그러자..

"이래도?"

디아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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