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잘 됐네.'
부들대는 바이올렛을 보며 싱긋 웃었다. 고소한 것도 고소한 거지만 이만큼 잘 풀릴 수가 없었으니까.
제국 측에서 선봉으로 누가 내보낼지 정확하게 맞췄을 뿐더러 디아나의 체력을 크게 소모하지 않는 선에서 슬라임녀를 정리했으니까.
이게 다 슬라임녀가 욕심을 부려준 덕분이었다.
만약 그녀가 히트앤런이 아니라 철저히 런만 고집했다면?
꽤나, 아니 상당히 골치 아파졌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쪽에게는 일종의 시간제한이 걸려있으니까.
'얼마나 걸렸지?'
속으로 1차전이 끝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을 헤아리고 있으려니 진행을 맡은 이들이 박수를 요구해왔다.
-그야말로 결승전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호투를 보여준 두 참가자에게 박수와 환호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빨리 끝나기는 했어도 앞서 봤던 졸전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경기보다는 훨씬 스릴 넘치고 긴장감또한 넘쳤던 걸까.
진행자의 멘트가 끝나기 무섭게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둘을 향해 쏟아졌다.
그럼에도 둘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슬라임녀는 패배의 치욕을 곱씹고 있는지 쓴 약이라도 들이킨 얼굴이었고, 디아나는..
'흠.'
아무래도 벌써 다음 상대를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자, 그럼 저희는 10분의 휴식시간을 가진 후에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10분 뒤에 뵙겠습니다~!
생각에 잠긴 디아나의 표정을 보고 어제와 같은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예감같은 거라도 받았던 것일까.
진행자 석을 차지하고 앉아있던 두 남녀가 1차전을 마무리 짓는 멘트와 함께 그대로 화면에서 내뺐다.
덕분에 난감해진 건 나였다.
쉬는 시간이 길어도 너무 길었으니까.
허나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이미 선수를 빼앗겨버린 상황이었으니까.
답답한 마음에 앉아있던 자리에 등을 기대고 몸을 축 늘어뜨리니 '흐음..'하는 소리를 내며 제 턱을 만지작거리던 앨리스가 대뜸 날 향해 시선을 던져왔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왜 이쪽의 눈치를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런 것 같길래 무슨 일이냐는 식으로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지니 그녀가 비로소 입을 열어 제 용건을 밝혔다.
"그.. 안 내려가봐도 돼?"
내려가보다니?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뜬금없어도 너무 뜬금없었으니까.
그러나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지금쯤 밑에서 다음 경기를 기다리고 있을 디아나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아뇨."
고개를 가로저었던 건 그래서였다.
솔직히 내려가고자 한다면 못 내려갈 것도 없긴 했다.
같은 참가자로서 우리 편 참가자를 응원하러 가겠다는데 지들이 뭐 어쩔텐가.
비켜 서야지.
"지금 제가 내려가봐야 방해밖에 안 될 거에요."
그럼에도 고개를 가로저은 건 분명 그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방금 디아나의 얼굴 위를 차지하고 있던 표정은 나도 잘 아는 것이었다.
주로 일생일대의 순간을 앞에 둔 이들이 저런 표정을 짓곤 했으니까.
그런 이의 옆에서 얼쩡거려봐야 잡념을 심어주는 꼴밖에 되지는 않을테지.
그래서 나름대로 자제한 거였는데..
앨리스가 보기에는 좀 냉정해보였던 모양이다.
작은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던 그녀가 이내 내 귀에다가 제 입술을 가져다붙였다.
-나는 응원하러 와 줘야 해?
그리고는 그런 말을 속삭이는 게 아닌가?
그걸 듣고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었던 건 속삭이는 목소리 속에 담겨있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알겠어요?"
"진짜지? 약속한거야?"
확답을 받고 싶어하는 것 같길래 설령 다리가 뿌러지더라도 가겠다고 답을 하니 그제서야 앨리스가 흡족한 얼굴을 한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확히 딱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주 신났네?
심기가 제대로 상한 듯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려퍼졌다.
물론, 바이올렛의 것이었다.
자기는 선봉으로 출전한 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허무하게 패배해버려서 속이 뒤틀리는데 기껏 표식을 새겨넣은 놈은 그걸 가지고 놀리는 것도 모자라 다른 년하고 시시덕대고 있기까지 하니 빈정이 안 상할래야 안 상할 수가 없었던 모양.
그래서 거기에 대고 한술 더 뜨기로 했다.
그동안 누적된 걸 갚아주기에 이만한 기회가 또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앉아있는 쪽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예의 그 썩은 미소를 날려보냈다.
내가 보낸 답장을 바이올렛이 확인했는지 어쨌는지 확인하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누군가를 농락해본 적은 많아도 농락을 당해본 경험은 거의 없는 모양인지 도발 비스무리한 것을 날릴 때마다 상당히 생생한 반응이 돌아왔으니까.
반응이 어찌나 싱싱한지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런 식으로 바이올렛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고 있었더니만 그런 내 모습이 옆에서 볼 때는 상당히 요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야.."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앨리스가 질문을 던져왔다.
"아까부터 혼자서 뭐해?"
"아."
그제서야 깨달았다.
바이올렛의 것까지 나눠받아 평범한 사람의 것을 가뿐히 초월한 시력을 지니게 된 내게는 보이는 것이 그렇지 않은 앨리스에게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긴 특별히 눈이 좋은 편은 아니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마침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당한 게 하도 많다보니 나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으니까.
해서 즉시 앨리스를 향해 손을 뻗어 팔걸이 위에 얹어져있던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내쪽으로 잡아끈 다음에..
"손좀 흔들어봐요."
"응?"
"저쪽 방향으로요."
"이, 이렇게?"
그녀 입장에서는 상당히 뜬금없게 들렸을 내 주문에 앨리스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해보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손만큼은 착실히 내가 주문한대로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정확히 내가 지시한 방향을 향해서였고, 그에 대한 반응은 즉시 돌아왔다.
-작작 하지?
어떻게 하면 이를 악문 듯한 느낌까지 살릴 수 있는 걸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울컥한 것 같기도 하고, 1절에 이어 2절까지 했으니 이만하면 그만할 때도 된 것 같아서 붙잡고 있던 앨리스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런 식으로 그간 바이올렛에게 받은 걸 되갚아주고 있는 동안 10분이라는 시간이 모두 흘러갔는지 관객석을 비추고 있던 스크린 위로 진행자들이 재등장했다.
-10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그만큼 결승전 경기가 흥미롭다는 말씀이시죠?
-네, 2차전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금방 가더라구요.
-그렇습니까? 그럼 한 번 들어보고 싶은데요?
-네?
-2차전 말입니다. 밀튼 씨는 어떤 식으로 흘러갈 거라 보시나요?
열심히 상상했다고 하니 어디 들어나보자.
그런 뉘앙스로 던져진 여자 쪽의 질문에 남자 쪽의 얼굴이 어색하게 변했다.
-어, 음.. 그게.. 아! 일단 제국 측에서 어떤 참가자를 내보냈는지부터 확인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럴까요? 아! 마침 준비가 끝났다고 하네요. 한 번 같이 확인해보시죠!
여자 쪽의 신호와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선봉을 발표할 때처럼 나무판이 나란히 늘어선 광경이 스크린 위로 등장하더니 아까도 등장했던 진행요원이 슬라임녀의 초상화가 새겨진 나무판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던 것을 그대로 까뒤집었다.
그렇게 공개된 제국 측의 차봉은..
'..흠.'
예상했던 것하고는 사뭇 달랐다.
어제 차봉으로 출장했던 이가 오늘도 차봉으로 나올 거라는 게 내 예상이었는데 정작 차봉 자리에 앉아있는 건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아, 아직 출장한 적 없는 참가자죠?
-네, 그렇습니다.
-저는 제국 측에서 1차전에서 사용했던 순서를 그대로 가져갈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한 번 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신나게 뉴페이스에 대한 토론을 이어나갔다.
물론, 딱히 영양가같은 건 없었다.
그들의 토론에서 건질 수 있었던 건 지니아라는 이름 석자 뿐이었으니까.
예상했던 것하고는 사뭇 다른 상황.
이미 무대 위에 올라와있던 디아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던 건 그 때문이었다.
어쩌면 당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헌데 정작 눈으로 들어온 그녀의 얼굴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어느 정도 예상하기라도 한 것같은 반응이었고, 덕분에 안심할 수 있었다.
누구와는 다르게 그녀는 요만큼도 흔들리지 않은 듯 했으니까.
그렇게 안심하고서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기 무섭게 머릿속으로 울려퍼진 건..
-왜? 예상했던 거하고 다른가 봐?
이죽대는 듯한 바이올렛의 목소리였다.
물론, 가볍게 무시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자..'
베일에 쌓여있던 제국 측 세 번째 참가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기대감일지 혹은 다른 무언가일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심장이 두근두근대는 걸 느끼고 있으려니 진행자가 제국 측 차봉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와 함께 게이트 끝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건..
'미친 저게 뭔..'
거인이었다.
딱 그 단어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거대한 여성이 게이트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어찌나 큰지 대회장 안에서 오직 그녀만이 원근감이라는 세상의 법칙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 몸도 제법 큰 편이라 생각하는데 저건 말이 안 됐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클 수가 있는 걸까.
심지어 그냥 크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 거대한 육체에 오밀조밀한 근육이 꽉 들어차 있었으니까.
'저 정도면..'
거의 병 수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머릿속으로 울려퍼진 건 웃음기가 듬뿍 배인 바이올렛의 목소리였다.
-놀랐어? 하긴 지니아 경이 크긴 하지. 무려 거인족의 피를 이어받은 몸이니까.
거인족이라니.
별의 별 종족이 다 존재한다는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것까지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다만 거인족이 아니라 피를 이어받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옛날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종족인 듯 했다.
'허..'
보면 볼수록 헛웃음만 나오는 피지컬이었다.
그녈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두 명의 진행자도 기겁 비스무리한 걸 얼굴에 한가득 담고 있었다.
-크, 크군요.
-그, 그러네요.
사람이 진정으로 당황하면 어휘가 굉장히 단순해지곤 하는데 지금 진행자들의 상태가 딱 그러했다.
그런 둘에게로 쪽지같은 것이 전해졌다.
참가자에 대한 정보라도 되는 걸까.
화면에 잡히지 않는 곳에서 내밀어진 그것을 여자 쪽이 받아들었고, 이내 그녀의 입을 통해 쪽지의 내용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관객 분들 놀라지 마십시오! 지니아 참가자는 무려! 거인족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엄청 대단한 정보라도 전하는 듯한 뉘앙스로 내뱉어진 그 말에 안 그래도 시끌시끌하던 회장 내부가 더욱 소란스러워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앨리스의 반응도 관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 놀라운 거야 인정하지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싶었으니까.
아니면 혹시 거인족이 무슨 짓이라도 한 걸까.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띄워올리고 있으려니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거인녀 옆으로 진행요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들의 손에는 거대한 쇠몽둥이같은 게 들려있었다.
통짜 철로 된 건 그것또한 마찬가진지 진행요원들이 낑낑대면서 옮긴 그것을 거인녀가 가볍게 들어올렸다.
충분히 무거워 보이는데 거인녀 입장에서는 영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얼굴 한가득 베어물고 있던 거인녀가 여전히 근처를 떠나지 않고 있던 진행요원들을 향해 휘휘 손을 저어보였다.
파리라도 내쫓는 듯한 그 몸짓에 뒤로 물러나던 이들의 얼굴 위로 울컥하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싶었는지 그때부터 거인녀가 손에 든 것을 휘둘러대기 시작했으니까.
그 기세가 자뭇 살벌했던 모양이다.
진행요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해버린 걸 보면.
그렇게 대련에서 사용할 무기의 점검을 끝마친 거인녀가 드디어 무대 위로 올랐다.
그리하야 마침내 둘이 마주보고 선 순간, 눈으로 들어온 광경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멀리 떨어져있을 때도 비교가 확 됐는데 나란히 서 보니 이건 뭐 어린아이와 어른의 대결을 보는 듯 했으니까.
'이거 힘들 수도 있겠는데..'
디아나에게는 미안하지만 마음 속으로 그녀의 불리함을 점치고 있던 순간..
-자! 그럼 결승전 2차전 경기! 시작해보겠습니다!
진행자의 외침과 함께 결승 2차전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