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디아나 시점****
두근두근하고 심장이 뛰었다.
긴장한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긴장을 안 하는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으니까.
어느새 손바닥을 적신 땀을 옷에 대충 문질러 닦아내며 가볍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검을 배워서 다행이라고.
사실 어렸을 적에는 검 휘두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검을 수련하는 건 어린아이가 좋아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 재밌고 흥미로운 일이 도처에 널려있는데 연무장에 가만히 서서 팔 아프게 검을 휘두르는 걸 과연 누가 좋아할까.
그래서 몇 번은 수련을 빼먹고 도망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에게 붙잡혀서 금세 원위치로 돌아오긴 했지만.
당시에는 그게 신기하기도 원망스럽기도 했다.
더 놀고 싶은데, 친구들은 하고 싶은 걸 하며 논다던데 자신은 왜 이런 거나 하고 있어야 하는 건가 싶어서 원망스러웠고, 신기함은 어디에 숨어도 귀신같이 자신을 찾아내던 어머니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봐도 완벽하게 숨었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인가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늘 어머니에게 들키는 건 똑같았으니까.
뭐, 아무튼 이 이야기의 요점은.. 어머니에게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엇나가려 할 때마다 붙잡아주시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지도 못했을테니까.
어쩌면 관객석에서 마음 졸이며 경기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제발 왕국이 승리하기를, 그리하야 이안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다행이라 생각했다.
열심히 단련해온 덕분에 최소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해야하는 신세는 면한 듯 했으니까.
'후우..'
자꾸만 숨이 벅찼다.
덕분에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긴장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초조한 것이었는지를.
딱 좋게 풀어져서 절호조인 몸과는 다르게 자꾸만 마음이 술렁이는 건 그 때문이겠지.
그렇지만 괜찮았다.
이마저도 양분으로 삼으면 되니까.
마음의 술렁거림, 어머니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긴장감, 교류전의 향방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이 주는 중압감.
가을바람에 떨어진 낙엽마냥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던 그것들을 한 곳으로 그러모아 그대로 불을 지폈다.
-그냥 한 말 아니에요. 다치겠다 싶으면..
그 순간 머릿속으로 울려퍼진 말은 공교롭게도 그것이었다.
꼭 마치 방금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울려퍼지는 그 말에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알고 있다.
저 말을 한 이안에게 악의는 요만큼도 없다는 것도, 저게 자신을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자꾸만 분한 마음이 드는 건 기사된 자로써 어쩔 수 없었다.
무리하지 말라는 건 자신이 끝까지 가지 못하고 결국에는 패배할 거라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패배부터 생각하는 기사는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머릿속에서 패배와 관련된 단어를 모두 지웠다.
대신 승리라는 단어 하나만 깊게 새겼다.
간단한 일 아닌가?
상대로 누가 나오든 간에 베고, 또 베어버리면 되는 거다.
그걸 총 네 번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교류전도 끝나겠지.
그렇게 마음을 다지며 경기를 앞두고 지급받은 대련용 철검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손바닥으로 착 감겨드는 서늘하고도 묵직한 감각.
솔직히 말하면 그리 성에 차지는 않았다.
애병이 주는 딱 알맞게 서늘하게 딱 알맞게 묵직한 느낌에는 확실히 미치지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눈을 감고 아까 전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잡념을 쉬지않고 베어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까지 베어낸 순간..
"이제 나가시면 됩니다."
고대하던 순간의 막이 올랐다.
운명을 매듭지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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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겠지?"
그게 상대 측 선봉과 마주보고 서 있는 디아나를 보며 앨리스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을 입에 담은 그녀는 어느새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자신의 차례가 아니라도 디아나와는 운명공동체다 보니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한 걸까.
그런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어보였다.
"질 것 같아요?"
"아니, 그렇지는 않겠지만.."
혹시 말이 씨가 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나 보다.
말끝까지 흐려가며 말을 아끼는 걸 보면.
딱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회장 상공을 차지하고 있던 거대 스크린에 대치하듯 선채 서로 악수를 나누는 두 여성의 모습이 비춰졌고, 그걸 보고 이제 정말 경기 시작이 코앞임을 직감한 이들이 일제히 기대감이 듬뿍 담긴 환호성을 토해냈다.
그 가운데 이제는 완전히 심판 역에 정착해버린 전 진행자가 둘 사이로 제 손을 들이밀었고..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그것이 위로 들어올려지는 순간, 우렁차기 그지없는 두 남녀의 목소리가 대회장을 한바퀴 휩쓸었다.
둘이 서로 힘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꼭 마주잡고 있던 손을 놓고 몸을 뒤로 물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디아나가 어제 보여주었던 세기말 패왕과도 같았던 기세를 경계한 것일까.
적당히 물러난 디아나와는 다르게 슬라임녀 쪽은 거의 무대 끝까지 물러난 상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놀랐다.
뒤로 물러날 때 보여준 탄력이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까.
'생긴대로 논다고 하더니만..'
저 탄력을 도망치는데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슬라임녀의 다리가 수축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꼭 모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고무인간을 보는 듯 했다.
그렇게 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는 슬라임녀와는 달리 디아나의 태도는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검을 꼿꼿하게 치켜세운 그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한껏 벌어진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다음이었을 것이다.
슬라임녀가 디아나와 비슷한 느낌으로 쥐고 있던 대련용 철검을 손안에서 반 바퀴 빙글 돌려 그것을 역수로 움켜쥐었다.
그 모습이 퍽 익숙해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그게 그녀가 숨기고 있던 발톱이었나 보다.
도망치더라도 그냥 내뺄 생각은 또 없다는 걸까.
눈빛이 서늘하기 짝이 없는 것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디아나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덩달아 자세를 낮추며 하체를 수축시키는 슬라임녀를 보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예상 범위에 없던 상대를 상대하기 위해 슬라임녀가 어떤 작전을 들고 나왔는지 덕분에 알 것도 같았으니까.
아무래도 슬라임녀는 자신의 선에서 디아나의 체력을 최대한 빼먹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듣는 이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어조로 상황을 중계하고 있던 두 남녀의 입에서 비슷한 내용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슬라네르 참가자의 선택은 지연전인 것 같은데 밀튼 씨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통할 거라 보십니까?
-굉장히 정석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나쁘지 않다는?
-네, 아무래도 경기 방식이 방식이다보니 설사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역할만 다하면 될 거라고 판단한 듯 하네요. 그만큼 자신의 뒤에 버티고 있는 이들을 믿고 있다는 뜻일테고요.
-아, 그러고 보니 제국 측에서 참가명단에 이름을 올린 분 중에는 황녀님도 한 분 계셨죠?
-네, 3황녀님이신 바이올라 님이시죠. 제국 내에서 열린 것이긴 하지만 여러 무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이름을 날린 분이시구요.
이번 건 확실히 몰랐던 정보였다.
설마 바이올라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을 줄이야.
새삼스레 알게된 사실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자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반응을 보니 몰랐나 보네?
많이 놀랐냐고 놀리기라도 하는 듯한 그 목소리에는 굳이 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바이올렛에게 놀림 비슷한 걸 당하는 동안에도 디아나와 슬라임녀 사이의 거리는 착실하게 좁혀지고 있었다.
그리고 디아나가 한 걸음을 더 내딛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팡-!
풍선같은 것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무대 가장자리까지 몰려있던 슬라임녀의 신형이 그대로 사라졌다.
거의 하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체를 수축시킨다 싶더라니만 튀어나가는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푸른색의 궤적이 디아나를 향해 짓쳐들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옆을 그대로 지나쳐갈 생각인 모양.
그 와중에 디아나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는지 일직선으로 쇄도하는 푸른색 궤적 사이로 묵색의 빛이 번뜩였다.
쐐애애액-
꼭 그런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지는 듯 했다.
그렇게 슬라임녀의 손에 들린 대련용 철검이 디아나의 어깻죽지를 강타하기 직전이었다.
디아나의 손에서 대련용 철검이 떨어졌다.
정확히는 그녀가 놓아버린 것이었지만.
덕분에 자유를 되찾은 디아나의 양손이 교묘한 움직임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를 타고 오르는 뱀처럼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슬라임녀의 팔을 휘감은 디아나의 손이 그대로 슬라임녀의 옷자락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슬라임녀의 얼굴 위로 기겁하는 표정이 떠오르는 게 마치 슬로우모션으로 찍은 것마냥 느릿하게 전개되었다.
'이야..'
바이올렛의 감각을 일정부분 공유받은 덕분인지 원래 몸으로도 불가능했던 기현상에 새삼 감탄하고 있으려니 디아나의 팔 사이에 갇혀있던 슬라임녀의 팔이 빠르게 수축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덕분에 통통했던 소매가 바람빠진 풍선마냥 홀쭉하게 변해버렸지만 그럼에도 디아나는 손에 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뭐..
-깔끔한 던지기!
-아! 슬라네르 참가자! 날아갑니다!
그랬다.
아무래도 그대로 무대 밖까지 날려버려서 장외패 시켜버릴 생각이었던 모양.
그 꼴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야겠다 싶었던 걸까.
디아나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 한껏 수축했었던 슬라임녀의 팔이 쭉 늘어나더니 그대로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그렇게 휘두른 것으로 무대 귀퉁이를 휘감아 날아가던 몸을 멈춰세운 슬라임녀가 그대로 무대 위에 착지했다.
뜻밖의 비행이 상당히 아찔했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퍼런 얼굴을 더욱 퍼렇게 물들인 슬라임녀가 누군가의 손 안에서 주물러진 액체 괴물처럼 변해버린 몸을 황급히 추슬렀다.
그 틈을 놓칠 디아나가 아니었다.
-디아나 참가자! 쇄도합니다!
스스로 내던졌던 것을 다시금 주워든 디아나가 그것을 앞세운 채 슬라임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슬라임녀가 떨어뜨린 철검 앞까지 도달한 그녀가 그것을 그대로 차올렸다.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걷어차인 것이 그대로 슬라임녀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갔다.
그에 슬라임녀가 황급히 몸을 옆으로 젖힌 순간, 이미 디아나는 그녀의 옆에 도달해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디아나의 일방적인 원맨.. 아니 원우먼쇼였다.
상대는 무기조차 없는 상황.
그나마 슬라임녀가 제 몸을 늘이는 식으로 반격을 시도하긴 했지만..
단단히 작정한 디아나 앞에서는 의미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디아나는 어제 내 앞에서 했던 말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고스란히 증명했다.
'베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검이 얼마나 뭉툭한들 상관없다고 했던가?
디아나의 손에 들린 것이 섬뜩한 빛을 발할 때마다 반격을 위해 길게 늘어난 것이 깔끔하게 잘려 허공으로 비산했다.
그야말로 디아나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
덕분에 아까 전부터 머릿속으로 울려퍼지던 목소리도 뚝 멎어버렸다.
'조용하니 좋네.'
어디 표정은 어떨까 싶어서 그녀가 앉아있을만한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지니 공교롭게도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녀도 내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마침 잘 됐다고 생각했다.
바이올렛을 향해 보란듯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던 건 그래서였다.
그런 내게 지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바이올렛이 똑같은 표정으로 응수해왔다.
그 모습이 꼭 '그래봐야 이제 고작 한 명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렇게 바이올렛을 상대로 눈싸움 비스무리한 걸 벌이고 있던 바로 그 순간.
디아나의 검이 슬라임녀의 방어를 뚫어냈고..
-아아아..!
진행을 맡은 두 남녀의 입에서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를 것이 새어나옴과 동시에 디아나의 검이 슬라임녀의 목을 점했다.
누가봐도 디아나가 승리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상황.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위를 향해 비뚜름하게 말려올라가 있던 바이올렛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경련하는 광경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