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강하게 떠올리라는 말이 설마 그런 의미였을 줄 누가 알았으리랴.
아무튼 방법을 알아냈으니 됐다.
이제 남은 건 전하고자 마음 먹은 걸 전하는 것 뿐.
그 전에 잠깐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사안이 사안이다보니 혹시라도 중간에 누락이 생기기라도 하면 곤란할테니까.
-들립니까?
그렇게 숨을 고른 뒤 말을 걸어봤는데 어째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설마 이번에는 약했던 걸까.
-들려요?
-들리냐고요.
-들리면 대답 좀 해주시죠.
대답이 돌아온 건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이고 난 후였다.
-어, 잘 들려. 아까부터 잘 들렸어.
-아니 그러면 왜 진작에..
답을 하지 않은 거냐고 따지듯 물었더니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게 참으로 가관이었다.
-기뻐서?
기쁘다니?
-처음에는 질색하더니 잘 쓰는 것 같아서 좋네.
할 말이 없었다.
그만큼 생각치도 못한 부분을 찌르고 들어왔으니까.
그런 내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바이올렛 예의 그 기쁨이 배어든 목소리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보니까 내게 급히 전해야할 거라도 있는 것 같던데.
눈치 하나는 정말 귀신같은 여자였다.
덕분에 나야 편하고 좋았지만.
-놈들의 계획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어요.
-그래? 흠..
-아무래도 동생 분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았던 모양이에요.
-욕심이 많은 놈들이네. 꼭 누구처럼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좀 찔렸다.
날 가리키는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아무튼 그래서?
-놈들이 노리는 건..
-혹시 여기야?
이번에는 그리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맞나 보네. 그럼 흉수는 혹시..
머릿속으로 불꽃녀에 대한 언급이 울려퍼진 순간 내심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면 맞나 보네.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
그런데 불꽃녀가 흉수라는 건 어떻게 맞춘 걸까.
설마 찍은 건가?
그런 내 내심을 짐작키라도 한 것처럼 바이올렛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냥 좀 이상하더라고. 나같았으면 빡치고도 남았을 상황인데 묘하게 침착하달까? 거기에 냄새도 좀 났고.
-냄새요?
-응, 교국 놈들은 마지막 날이라고 딱히 세심하게 안 살펴본 모양인데 우리 코까지는 못 속이지.
아무래도 불꽃녀가 몰래 반입한 인화물질의 냄새같은 거라도 맡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네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 내 코를 고쳐준 게 그대니까.
그 말에는 뭐라 답을 하기가 애매해서 그냥 침묵했다.
물론, 바이올렛도 내 침묵을 딱히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무튼 전할 말은 그것뿐?
-아, 그것말고도..
바이올라와 관련된 계획에 대한 것까지 빼놓지 않고 전하니 어쩐지 비꼬는 듯한 음성이 머릿속으로 울려퍼졌다.
-흐음, 그랬구나아.. 바이올라가 그렇게 걱정됐어? 그런 위험까지 감수할 정도로?
어째 이번 울림은 전의 것들하고는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조금 더 질척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찐득찐득한 것이 귓속을 제멋대로 헤집는 듯 했다.
소름이 안 끼칠래야 안 끼칠 수가 없는 그 느낌에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 있으니 바이올렛이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그림자라.. 그럼 저것들은 그것 때문인가?
저것들이라니 뭘 말하는 걸까.
-뭐, 짐작가는 거라도 있어요?
-아니, 짐작이고 자시고 무대를 대놓고 그림자로 덮으려고 하고 있는데?
머릿속으로 울려퍼진 그 말을 들은 순간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대회장만큼이나 거대한 것이 바로 대련이 펼쳐지는 무대인데 그걸 그림자로 덮는다?
그러려면 돔이라도 올리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는데 바이올렛은 아니었나 보다.
-거기는 창문같은게 없나 보네? 그럼 나와서 확인해봐. 그러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걸.
그렇다길래 잠시 목덜미에서 손을 떼어내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뭘 하다 온 거냐며 말을 걸어오는 앨리스를 적당히 상대하며 그녀가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창앞에 섰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바이올렛이 말한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허, 미친..'
저게 뭐람.
그러니까.. 하늘에 거대한 디스플레이같은 게 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대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진행자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춰지고 있었다.
저게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준비하는데 왜 이리 오래 걸리나 했더니만..'
설마 저걸 준비하려고?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알게되었다.
결승전을 위한 준비는 저 평면 디스플레이 뿐만이 아니라는 걸.
하늘을 가려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대회장 상공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던 거대 디스플레이 위로 새로운 이들의 모습이 비춰졌다.
두 명의 남녀였고, 그들의 목소리로 추정되는 것이 회장 안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자, 다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시작은 여성 쪽이었다.
이런 대회가 많은 것도 아닐진데 능숙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포문을 연 그녀가 자신과 자신의 옆을 차지하고 있는 남성에 대해 소개했다.
그에 맞춰 남성이 꾸벅 고개를 숙인 순간, 회장 안으로 휘파람소리가 울려퍼졌다.
-하하, 호응 감사합니다.
-자, 우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설명을 드려야겠죠? 밀튼 씨께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네, 지금 여러분께서 보고 계신 이것은 무투대회의 대미라 할 수 있는 결승전을 위해 왕국 연합 측에서 특별히 준비해주신 것으로..
상공에 떠 있는 거대한 디스플레이는 수령족의 힘을, 회장 안으로 울려퍼지는 자신들의 목소리는 풍령족의 힘을 빌린 것이라는 게 남성의 설명이었다.
'저게 물이라고?'
과연 설명을 듣고 보니 표면이 묘하게 일렁이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교류전을 위해 이런 놀라운 기술을 선뜻 제공해주신 왕국 연합측 관계자분들께 박수 부탁드립니다.
그 사이 회장 안에는 이제는 심판으로 전락해버린 기존의 진행자를 대신해 새로이 진행을 맡게된 남녀의 멘트에 호응하여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불꽃녀를 향한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지고 있었다.
박수를 치고 있는 건 귀빈석 안에 자리하고 있는 이들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바이올렛도 분위기에 맞춰서 감탄한 듯한 표정을 한채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지만..
-우습지 않아? 이런 기술을 자기들 차례가 다 끝난 다음에 내놓는다는게 말이야.
정작 머릿속으로 울려퍼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시니컬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자기네 참가자들이 졸전을 펼치는데도 화 한 번을 안 내더라. 나같았으면 진작에 다 목을 날려버렸을텐데.
허나 거기에 집중하고 있을 겨를같은 건 없었다.
대회장 상공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저것의 존재가 너무나도 신경이 쓰였으니까.
지금이야 진짜 모니터라도 된 것마냥 얌전하게 평평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저만한 질량의 물이 저 높이에서 특정지점에 다이렉트로 쏟아진다고 생각해봐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력으로 창을 휘두른다면.. 아니, 그래도 부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질량이 너무 압도적이었으니까.
섣불리 쳐내려고 들었다간 쳐내기는 커녕 그대로 박살이 날테지.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저게 암수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부분이었다.
저 상태로 그대로 떨구게 되면 당연히 작용하는 힘또한 분산이 될 수밖에 없을테니 저걸 암살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일정한 질량이 될때까지 모아야할텐데 다들 하나같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벌인다?
바로 눈치채는 이가 나올 것이고, 그리되면 바이올라는 그것을 피하는데 집중할 거다.
그걸 맞춘다?
차라리 다른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거다.
그 사실을 암살을 획책한 이들이라고 해서 모르진 않을텐데 분명 다른 수단을 동원할 터.
그게 바로 '그림자'일 것이고 말이다.
다들 하늘만 쳐다본다고 지상 쪽에는 딱히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데 위에 드리워진 것때문에 지상에는 여기저기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정말 저들이 사용하려는 암기가 그림자라면 그것을 활용하기에 이만한 환경도 또 없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진행 역을 맡은 남녀의 대화는 어느덧 승부예측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밀튼 씨는 어느 쪽이 승리할 것 같으신가요?
-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왕국? 쪽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네요.
-왜죠?
-어, 음.. 어제 경기를 보신 분들이라면 공감하시겠지만 왕국 측에 디아나 앨런 경이라는 분이 계신데..
그런 식으로 시작된 남자의 이야기는 결국 어제 디아나가 보여준 모습이 굉장히 멋있어서 우리 쪽을 응원하게 되었다는 말로 끝이 났다.
'저 새끼가?'
지금 감히 누구한테 끼를 부리는 걸까.
발칙하기 그지없는 진행남의 행동에 헛웃음을 짓고 있자니 너무 노골적으로 디아나만 찬양한 것이 내심 눈치가 보였던 모양이다.
-뭐, 뿐만 아니라 왕국 쪽에는 저와 같은 남성 분들도 두 분이나 계시니까요. 그렇다보니까 아무래도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더라구요.
-그러셨군요. 하하하.
이게 바로 자적자라는 걸까.
말만 들어보면 '같은 남자니까 응원한다!'라는 느낌이었지만 뉘앙스는 그렇지 않았다. 에둘러서 표현하긴 했지만 분명히 나와 진의 전력을 깎아내리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더 열받는 건 거기에 편승해 은근히 속을 긁어대는 바이올렛의 행동이었다.
거기에 대고 답을 하지 않았던 건 그래서였다.
굳이 대꾸할 필요없이 직접 증명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사이 두 남녀의 대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 드디어 양쪽의 출전순서가 공개되었습니다!
-다함께 보시죠.
남자 쪽이 손을 앞으로 뻗은 순간, 물로 만들어진 스크린 위로 새로운 것이 등장했다.
고급스러운 나무판들이 나란히 도열해있었고, 그 옆에 진행요원으로 보이는 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우선 제국 측 선봉입니다.
그 말이 대회장 안으로 울려퍼진 순간,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진행요원이 왼쪽 나무판들 중에서 맨 위에 위치하고 있던 것을 반대로 뒤집었다.
그러자 등장한 건 어제도 봤었던 슬라임녀의 초상화가 박혀있는 앞면의 모습이었다.
'역시..'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일단 선봉은 이쪽에서 예측한대로였으니까.
-예측한대로 됐나봐? 기뻐보이네.
그런 내 모습을 확인했는지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거기에서 패배에 대한 걱정따위는 새끼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쪽의 예측이 들어맞았든 말든 무조건 자기들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어제도 선봉으로 나오셨던 분이죠?
-네, 어제 선봉으로 출장하셔서..
어제 슬라임녀의 활약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한 진행녀가 우리 측 선봉에 대해 언급하는 식으로 진행요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다음은 왕국 측 선봉입니다. 과연 누가 나올지..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화법과 함께 진행요원의 손이 오른쪽 나무판 중 제일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제국 측과 같이 어제 선봉으로 출장하셨던 분이 그대로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진행자로써 나름 있어보이고 싶었던 걸까.
두 명의 진행자 중 남자 쪽이 그런 의견을 내놓은 순간, 진행요원의 손에 잡힌 나무판이 반대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무판 앞면에 박힌 디아나의 초상화가 드러난 순간, 나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제 추측을 늘어놓던 남자 쪽의 목소리가 그대로 끊어졌다.
시끌시끌하던 대회장이 삽시간에 조용하게 변해버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회장 안으로 웅성거림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동요라는 감정이 듬뿍 담겨있는 소리들이었다.
그만큼 그들 입장에서는 의외의 결과였다는 소리겠지.
-어..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디아나 앨런 참가자가 선봉입니다!
있어보이는 이미지의 구축을 위해 제 추측을 늘어놓기 바쁘던 남자 쪽이 벙쪄있는 사이, 여자쪽은 그야말로 신이 났다.
-아무래도 왕국 측에서 뭔가 노리는 바가 있는 듯 한데 밀튼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둘이 나란히 진행을 보길래 나름 친한 사이인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저렇게 이때가 기회랍시고 물어뜯으려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걸 보면.
-어, 음.. 선봉에 최대 전력을 배치해서 제국 측의 허를 찌름과 동시에 제국 측의 전력을 최대한 줄여보겠다는 거 아닐까요?
-그래도 대장 역을 맡아야할 이를 선봉으로 배치하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크지 않을까요?
-어, 으음.. 그, 그렇긴 한데..
여자 쪽이 남자 쪽을 신나게 쥐고 흔드는 동안 양측의 선봉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작부터 터져버린 이변 덕분에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분위기 속에서..
-양측 선봉의 준비가 끝난 것 같군요! 그럼 바로 결승전 첫 경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결승전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