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디아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녀도 직감한 것이리라.
자신이 나서야하는 순간이라는 걸.
"앨런 경? 안에 계시다면 대답해주십시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라도 좀 주면 좋으련만 누군지 모를 진행요원은 가차 없었다.
덕분에 디아나의 얼굴이 한층 더 굳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 표정이 보기 안쓰러워서 조심스레 그녀의 등 위에다가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햐읏..?!"
엄지손가락을 세워서 그녀의 등골을 가볍게 쭉 훑어내렸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비명에 가까운 신음성을 내지르며 몸을 크게 움찔한 디아나가 이내 날 향해 시선을 던져왔다.
지금 이게 뭐하는 거냐고 묻는 듯한 그 시선에 무어라고 말을 하는 대신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디아나의 얼굴 위로 실소가 번지더니 이내 그녀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녀올게."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뒤에 앨리스도 있고 나도 있다는 걸 잊지 말라는 의미로 가슴을 팡팡 두들겨보이니 디아나가 다시금 피식거렸다.
내가 자기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
뭐, 그런 목적도 어느 정도 있긴 했지만 무리할 필요없다는 말또한 진실이었다.
경기에서 힘을 너무 빼버리면 이후에 벌어질 사교도 놈들의 테러에서 아무 것도 못하게될 가능성이 크니까.
그래서 무리하지 말라고 한 것인데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아서 가볍게 숨을 고르고는 그대로 문쪽을 향해 돌아서는 디아나를 향해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세웠다.
"그냥 한 말 아니에요. 다치겠다 싶으면.."
얼마든지 포기해도 된다고, 뒤에서 처리하면 되니 부담가질 필요 없다고 말을 하려 했는데 디아나쪽이 한 발 더 빨랐다.
자연스럽게 뻗어온 디아나의 손이 내 머리를 가볍게 훑었다.
무리하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살짝 까치발을 든채 내 머리를 두어번 정도 쓰다듬은 그녀가 그대로 몸을 돌려 진행요원의 부름에 응했다.
"허.."
그야말로 아차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고, 덕분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방을 빠져나가는 디아나의 뒷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짓는 것 뿐이었다.
'아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살아온 세월로만 따지면 내쪽이 몇 배는 위일텐데 연하취급을 당하니 이게 참.. 멋쩍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그렇달까.
바로 조금 전에 디아나의 손이 스치고 지나간 곳을 자꾸만 만지작댄 건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낯간지러운 듯 하면서도 근질근질한 느낌을 떨쳐낼 수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런 식으로 한동안 멍하니 문만 바라보고 있다가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넋놓고 멍 때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방을 빠져나오니 디아나는 이미 진행요원을 따라 대기실을 빠져나간지 오랜지 대기실 안에서 그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한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앨리스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의 진이 대기실을 지키고 있었다.
앨리스의 모습을 확인한 즉시,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일단 그녀쪽으로 향했다.
돌아온 걸 보니 무사히 내가 부탁했던 일을 끝마친 듯 했으니까.
"어떻게 됐어요?"
그녀의 옆에 앉자마자 목소리의 볼륨을 한껏 낮춘 채 그리 물었던 것또한 그래서였다.
부탁한 일을 잘 끝냈는지 어땠는지 확인 정도는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랬더니 일단 움찔하는 반응부터 돌아왔다. 아무래도 원래 몸으로 돌아간 게 워낙 오랜만이다보니 순간적으로 놀랐던 모양.
그렇게 흠칫했던 것도 잠시 그녀가 내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 일단 부탁해놓긴 했는데.."
슬쩍 말끝을 흐리는 걸 보면 그 이후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걸까.
'하긴..'
그녀가 아무리 간곡하게 부탁을 해본들 정작 부탁을 받은 쪽에서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해서 누락시켜버리기라도 하면 거기서 끝이니까.
그 아는 사람이라는게 설마 성녀일리는 없으니 아마 성녀와 동행한 호위 중에 한 명일텐데 아마 그 사람도 지금쯤 상당히 난감할 거다.
앨리스가 어떤 표정과 목소리로 부탁했을지 나야 모르지만 분명 나름대로 굉장히 심각한 사안이라는 걸 어필했을테니 제 마음대로 누락시키기도 좀 그랬을테니까.
그렇다고 타국의 대표 쯤이나 되는 인물에게 무턱대고 말을 거는 무례를 범할 수도 없었을테니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아마 발을 동동 구르고 있지 않을까.
눈을 가늘게 뜬채 반대편에 위치한 귀빈석을 향해 시선을 던졌던 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만큼 최대한 안력을 돋궈서 귀빈석 내부를 관찰하니 과연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뭐라도 마려운 것처럼 묘하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한 명의 모습을 말이다. 아, 물론 그녀또한 진행요원들과 같이 금발의 소유자인건 매한가지였다.
보아하니 제딴에는 나름대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면 티가 많이 났다.
특히나 시선같은 게 그랬다.
그녀와 페어를 이루고 있는 다른 여성은 꿋꿋이 전방만을 주시하고 있는데 그녀는 시선이 자꾸 바이올렛 쪽을 향했으니까.
그러면서 이따금씩 멈칫멈칫대는데 보는 내가 다 답답할 정도였다.
그렇게 앨리스의 부탁이라는 짐을 넘겨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대체 뭐가 그리 재밌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종일관 웃는 낯을 한채 옆에 앉아있던 성녀와 담소를 나누고 있던 바이올렛의 시선이 날 발견한듯 내쪽에 고정되었다.
처음에는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올렛이 아는 건 쇼타 모드일 때의 모습 뿐이니까.
헌데 이게 웬걸?
바이올렛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더니 이내 그녀가 날 향해 보란듯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흥미로움으로 가득 찬 표정은 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얼떨떨했다.
이렇게 쉽게 내 변화를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해서 당황하고 있던 것도 잠시, 한 가지 가정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설마 표식 때문에?'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그것밖에 가능성이 없긴 했다.
그게 아니라면 바이올렛이 날 보자마자 내가 그녀가 알고 있는 '이안'과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건덕지 자체가 없었으니까. 설령 그녀가 내 과거 모습에 대해 알고 있다해도 그랬다.
'그나저나..'
왜 저리 기분이 좋아보이는 걸까.
설마 내가 자길 바라보고 있었다고 생각해서?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저렇게 시종일관 흡족해하는 미소가 얼굴을 떠나질 않는 걸 보면.
덕분에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성녀를 상대할 때 머금고 있던 미소는 접대용이었다는 걸 말이다.
그렇게 씩 웃으며 똑바로 시선을 맞춰오는 바이올렛의 모습을 보며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식 전달이라는 게 꼭 일방통행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 전까지는 살짝 부담스럽다 여겨서 스리슬쩍 피하고 있었던 바이올렛의 시선과 똑바로 눈을 맞췄던 건 그래서였다.
그렇게 시선이 교차한 순간, 어쩐 일인지 살짝 흐릿하게 보이던 그녀의 모습이 한층 더 선명해졌다.
꼭 마치 그 잠깐 사이에 시력이 향상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현상, 그렇기에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바이올렛이 표식을 이용해 뭔가 수작질을 부렸다는 걸.
'가까이서만 되는 게 아니었나?'
표식가지고 뭔가를 시도할 때마다 철썩 들러붙어오길래 필수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설마 본인의 사심을 채우기 위한 페이크였을 줄이야.
나조차도 뒷통수가 이리 얼얼할 지경인데 아직 제 언니와 관련된 사실들에 대해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바이올라가 진실을 알게 될 경우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뭐, 아무튼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아까보다 조금 더 잘보이게 되었으니 그만큼 소통또한 원활하게 이루어질테니까.
해서 즉시 바이올렛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거리가 거리다보니 내가 여기서 암만 입을 벙긋대본들 제대로 전해질리 만무했기에 최대한 몸짓을 사용해봤는데 멀리서 볼 때는 좀 아니었나 보다.
바이올렛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오르더니 이내 그녀가 실소를 터뜨렸다.
반응이 좋지 않은 건 가까이 앉아있는 앨리스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안? 뭐해?"
"이상했어요?"
"응, 꼭 살찐 닭이 퍼덕거리는 것 같더라."
살찐 닭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이 근육으로 꽉 들어찬 몸의 어디가 살이 쪘다고 말하는 건지..
그런 식으로 앨리스와 아웅다웅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
이렇다할 전조도 없이 낯선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려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낯선 목소리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릿속으로 울려퍼진 그것은 분명 바이올렛의 목소리였으니까.
그럼에도 처음에 낯설다고 느낀 건 그녀의 목소리를 이런 식으로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이안?"
바로 조금 전까지 실랑이를 벌이던 상대가 갑자기 우뚝하고 멈춰서니 의아했던 것일까.
앨리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져왔지만 거기에 답을 하고 앉아있을 겨를같은 건 내게 없었다.
이 와중에도 바이올렛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울려퍼지고 있었으니까.
-들려?
내게 깃든 동요가 그녀가 앉아있는 곳에서도 훤히 보이는지 재차 울려퍼진 목소리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웃음기가 배어있었다.
그럼에도 싸늘함쪽의 비율이 훨씬 더 크긴 했지만.
-옆에 있는 그 년은 누구길래 그렇게 친해보이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놀라운 것 이상으로 답답했다.
아무래도 이또한 목덜미에 새겨진 표식의 공능 중 하나인 모양인데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서 써먹을 수가 없었으니까.
기껏 누군가의 입을 거칠 필요없이 그녀에게 다이렉트로 내가 알아낸 정보를 전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는데 말이다.
'말을 걸거면 어떻게 쓰는 지 알려주기라도 하던가..'
속으로 그렇게 씨근덕대고 있으니 그제서야 제 실수를 눈치챘던 모양이다.
-아, 나한테 말을 걸려면 표식이 있는 곳에다가 손을 가져다 댄채로 내게 전하고 싶은 말을 강하게 떠올리면 돼.
그냥 떠올리는 것도 아니고 강하게 떠올리라니.
참으로 두리뭉술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일단은 알려준 방법대로 해보기로 했다.
"잠시만요."
여전히 의아한 시선을 한채 날 바라보고 있던 앨리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던 건 당연히 그를 위함이었다.
아무래도 보는 눈이 한두 개가 아니다보니 이곳에서 하긴 좀 그랬으니까.
멀찌감치 앉아있는 바이올렛의 시선이 신경쓰이기도 했고.
그래서 아까 내 정체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으로 다시 들어왔는데..
-뭐야, 더 보여주지.
아까워하는 듯한 탄식이 머릿속으로 울려퍼졌다.
-그게 원래 모습인가 보지? 역시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수단이 있었구나.
대체 뭐가 그리 신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바이올렛은 쉬지 않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여러모로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날 농락하기 위한 말을 즐겨하는 그녀긴 해도 말수가 많은 편은 분명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지는 몰라도 어찌보면 살짝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설마 앨리스와 꽁냥대는 모습을 보고 질투가 치솟기라도 한 것일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알려준 방법대로 행하기 위해 목덜미 부근에다가 손을 올려둔채 머릿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반복해서 되뇌였는데..
-그나저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든단 말이지.. 솔직히 쬐끄만한 모습은 다 좋은데 너무 연약해보여서 그게 좀 불만이었거든.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집중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야말로 듣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기 충분한 말들이 무슨 융단폭격마냥 머릿속으로 퍼부어졌다.
'아오 좀..'
제발 집중 좀 하게 조용히 해달라고 외쳤던 건 그래서였다.
내 딴에는 말 그대로 짜증이 나서 아무 생각없이 외쳤던 것이었는데..
-응? 조용히 하라고 한 거야?
이게 정답이었나 보다.
새삼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웅웅하고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