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68)화 (267/366)



〈 26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시작됐구만.'

갑작스레 초조해졌다.

아직 무엇하나 제대로 준비가 끝난 게 없건만 탕하고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려퍼진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그.. 확실한 거야?"

"네, 직접 봤어요.  눈으로 직접."

확인차 던져진 앨리스의 질문에 신경질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래서였다.

운명의 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데 시간을 낭비하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참으로 다행히도 모처럼 내비친 신경질적인 반응의 성과는 결코 적지 않았다.


드디어 앨리스가 나와 같은 심각함을 공유하기 시작했으니까.

"사실이라면 최악인데.."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뭐든 일이 터지기 전에 막는 것이 최고지만 상대방의 지위가 지위다보니 그것을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기가 어려웠다.


물건이 전해지는 타이밍을 모르기에 더욱 그랬다.

재수없으면 역효과만 날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혹시 그쪽에 아는 사람 없어요?"


앨리스를 향해 그리 물었던 건 그래서였다.


"있긴 있는데.."

아는 사람이 있기야 하지만 그 사람을 이용해 뭔가를 하는 건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앨리스의 눈썹이 밑으로 늘어지며  자를 그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게 어딘가 싶었다.


어차피 이쪽에서 딱히 뭔가를  생각은 없었으니까.


골치 아픈 데다가 섣불리 손대기 힘들 정도로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나보다 능력좋은 이에게 떠넘기면 되니까.


내게는 골치아픈 문제라도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앨리스에게 귀빈석 쪽에 아는 사람이 없냐고 물었던  그래서였다.

남한테 떠넘기더라도 무턱대고 떠넘길 수는 없으니 말이라도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 전에 필히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믿을만한 사람이에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앨리스가 모를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질문을 받은 앨리스가 그대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뭔가를 숙고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두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가 다시금 눈을  순간, 제비꽃을 닮은 눈동자 속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이내 그 보랏빛 원 안에 둥지를 튼 건 가히 절대에 가까운 신뢰였다.


귀빈석 쪽에 있다던 아는 사람이 그만큼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걸까.


'대체 누구길래..'

맘같아서는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눌러 참았다.


지금 중요한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럼.."

지금 이 순간에도 사교도란 놈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테니 우리도 당연히  템포에 맞춰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뒤쳐지는 일도 없을테니 말이다.


해서 그 아는 사람을 이용해 제국 측에 이 사실을 전해달라고 앨리스를 상대로 부탁했다.

물론, 그런 내 부탁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다녀올게."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앨리스가 그대로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녀와 교대하듯 이런저런 확인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던 디아나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다가 앨리스와 마주치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녀의 행선지가 궁금했던 모양인지 디아나는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부터 찾았다.


그리고는 턱짓으로 대기실 문쪽을 가리키며 앨리스의 행선지에 대해 묻는데..


"일이 좀 있어서요."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진행요원들조차 믿기 힘든 만큼 사실대로 말할 경우 그게 사교도 놈들의 귀에 들어가게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가 없었으니까.


참으로 다행히도 이미 테러 건에 대해서 알고 있는 만큼 눈치껏 알아들은 것인지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이 된 디아나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조금 전까지 앨리스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가서 뭐했어요?"

"그냥 뭐.. 정말 이 순서가 맞는지 확인하고 서약같은 것도 하고 그랬지."


상대 측에서 대표로 누가 나왔는지에 대한 언급이 딱히 없는  보면 장소를 나눠서 따로 진행했나 보다.


'하긴..'


그것만으로도 스포가 될  있으니 당연히 그리하는 게 맞긴 하지.

그런 식으로 적당히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교국과 왕국 연합 간의 3, 4위전을 관람했다.

"어느 쪽이 이길  같으세요?"

"글쎄.. 개인적으로는 교국 쪽에 우세할 것 같긴 한데.."

그 말은 교국 측 참가자들의 기량이 더 뛰어나다는 소리인 걸까.


추측이라 해도 간과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어제 왕국 연합  참가자들의 뚝배기를 깨부쉈던 이가 바로 디아나 아니던가?

 명 빼고 다 직접 상대해본만큼 얼추 파악이 끝났을 터.


"뭐, 그것도 그건데.. 솔직히 저쪽 참가자들 컨디션이 그리 좋을  같지는 않아서."

"아, 하긴.."


좋을 수가 없긴 했다.


어제 그렇게 깨졌는데 좋을  있겠는가.

그래도 3, 4위전을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몸만큼은 완벽에 가깝게 회복시켰을테지만.. 그것들이 산산조각 나버린 자신감까지 이어붙여주진 않았을테니까.


싸움에 있어서 기세라는 것이 차지하는 역할이 적지 않은만큼 왕국 연합 측은 시작부터 패널티를 안고 시작한 상태라 봐도 무방했다.

그만큼 형편없이 깨졌으니까.


그에 비해 교국 측은 제국을 상대로 나름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점을 고려하면 교국 측이 주최국으로서 최악의 결말만큼은 면할 수 있을 듯 했다.


'주최해놓고 꼴찌는 좀 아니지..'

우승이나 준우승이야 제국과 우리라는 트럭이 버젓이 존재하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3등은 해야 주최국 체면이 좀 서지 않겠는가.

교국 측에게는 참으로 다행히도 3, 4위전의 양상은 디아나가 예측한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교국 측이 잘해서라고 하기는 좀 애매했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십분 살려 어제 입은 자잘한 부상들과 소모된 체력을 완전히 회복하는데 성공했는지 교국 측에서 내보낸 이들이 어제 못지 않은 기량을 선보이긴 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부각된 것이 왕국 연합 측 참가자들의 형편없음이었다.


보아하니 몸에 크게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어제 하도 처참하게 발렸다보니 아직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던 걸까.

진과 좋은 경기를 펼쳤던 돌덩이녀를 제외하면 어째 다들 하나같이 맥아리가 없었다.

오죽하면 지든 말든 딱히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보여질 정도였다.


덕분에 굉장히 궁금해졌다.

대체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저런 식으로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나 했으니까.


뭐, 덕분에 회장 안의 분위기는 좋았다.

주최국이니만큼 일반 관객들 중에서는 교국민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는데 교국이 그래도 3위라도 할  같은 모습을 보이니 다들 어제 맛보았던 패배감은 잠시 잊고 들뜨기 시작했으니까.

거기에 진행자가 불어넣은 뽐뿌때문에 잔뜩 기대감을 머금었다가 왕국 연합  참가자들이 보인 형편없는 모습 때문에 실망한 이들이 야유를 퍼붓기 시작하면서 대회장 안의 분위기는 혼돈 그 자체가 되었다.


그 가운데 오늘도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왕국 연합 측 대장이 진행자의 부름에 응해 게이트 저편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그거 있잖아."

나와 같이 경기를 관람하던 디아나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거라니 뭘 말하는 걸까.

의아한 마음에  말을 꺼낸 장본인을 향해 시선을 던지니 멀찌감치 자리하고 있던 진쪽을 힐끗하고   쳐다본 디아나가 이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중화제였나? 그거 슬슬 마셔둬야 되는  아냐?"

"아."


확실히 슬슬 그럴 시간이긴 했다.


일전에 카트린느가 들려주었던 설명을 떠올려보면 급조 중화제의 효과가 지속되는 시간은 약 90여분 정도였다.


그 점을 고려하면 최대한 복용을 미루다가 경기에 들어가기 직전에 마시는 편이 최선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건 굉장히 형편좋은 소리다.

중화제를 마시고 원래 몸으로 돌아간다고 끝나는  아니니까.

다른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내가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안'과 동일인이라는 걸 증명해야 경기에 출전하든 뭘하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그 증명이 쉬울 리 없었다.


이 몸에 관한 비밀을 진행을 맡은 교국 측에 대고 설명한들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줄  만무하니까.


오히려 우리 쪽에서 지기 싫어서 괜한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겠지.

그래서 생각해둔 방법이 미리 교국 측 책임자를 불러다놓고 그 앞에서 중화제를 마시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쑥쑥 자라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면 믿기 싫어도 믿게  수밖에 없을테니까.

당연히 통하지 않을 설명을 하는 고생도 피할 수 있을 터.


뿐만아니라 다른 이유도 있었다.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 달만이다보니 어느 정도 적응기간이 필요할 것이라 봤으니까.


하물며 '원래 몸'이라고 하기도 솔직히  애매했다.

원래 몸으로 돌아가더라도 목덜미에 새겨진 표식이 사라진다거나 그럴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만큼 지금 받고 있는 효과가 원래 몸에도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소린데..


'안 그래도 사기적인 몸에 버프까지 들어가면..'


효율이 얼마나 뻥튀기 될지 감히 짐작조차 할  없었다.

그렇기에 미리미리 변해두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라는 게, 특히나 제대로 단련된 몸은 정밀하게 만들어진 기계와도 같아서 약간만 달라져도 천지차이로 달라지곤 하니까.


그렇기에 경기에 나서기 전에 몸의 컨디션을 최대한 세심하게 조율해놓을 필요가 있었다.


"음, 그럼 여기서 할까요?"

"여기서는.. 좀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길래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멀리갈 필요도 없이 대기실 바로 맞은 편에 적당한 크기의 방 하나가 비어있어서 그곳을 변신 장소로 택했다.

그렇게 자리를 잡아두고 나서 교국  사람들을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혹시 뭐 문제라도.."

디아나를 통해 불러온 이들의 반응은 묘하게 신경질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3, 4위전이 절찬리에 진행중인지라 다들 나름대로 바쁠텐데 그런 상황에서 불러온 거니까.

"일단 지켜봐주시겠습니까? 설명은 그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디아나가 그들을 상대하고 있는 사이 그녀가 조달해준 커다란 천을 망토 두르듯 몸에다가 둘러맸다.

그리고는 대기실에서 챙겨온 급조 중화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묘하게 서늘한 느낌을 주는 병을 그대로 입 앞까지 가져왔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뚜껑을 따니 뽕하고 경쾌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다만,  안에 담겨있는 것의 냄새까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어우..'

대체 뭐랑 뭘 섞으면 이런 파멸적인 냄새가 탄생하게 되는 걸까하고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자니 디아나와 대치하듯 서 있던 이들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윽..! 이게 무슨..!"

"아니, 지금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이런 짓이나 하려고 저희를 이곳까지 부른 겁니까?"

"교류전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아까 전부터 무슨.."

아무래도 마지막으로 발언한 이는 커다란 천을 망토마냥 두르고 있는 내 모습에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영웅놀이에 심취한 애새끼처럼 비춰지기라도 했던 걸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노려보는 교국  담당자들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병 안을 채우고 있던 것을 그대로 입 안에다가 때려부었다.


왠지 혀에 닿으면 냄새만큼이나 파멸적인 맛이 날 것만 같아서 최대한 혀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입 안으로 쏟아부어지는 것을 목구멍 안으로 꿀꺽꿀꺽 삼키니..

두근-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병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이제 곧 시작될 거라고 일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윽고 몸을 덮쳐온 것은 몸 전체가 심장으로 변해버린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쿵쿵하고 심장이 발작하듯 뛰어대는 소리가 쉬지않고 귓가로 울려퍼졌다.


동시에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수 없는 열기가 몸을 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몸이 펄펄 끓는 것만 같았다.

그 감각을 견디기 힘들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니 이번에는 누군가 내 몸을 억지로 잡아늘리는 듯한 감각이 몸 전체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옛날 형벌 중에 사지를 밧줄로 묶은 뒤 그것들을 각각 소들에다가 묶어서 죄인이 말 그대로 사지분해가 될 때까지 잡아당기는  있는데 꼭 그걸 당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우와..'


미치겠네 정말.

정신이 조금씩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추락하던 내 의식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은..

"저, 저게 무슨.."

"말도 안 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경악이 듬뿍 담긴 목소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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