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67)화 (266/366)



〈 26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더 잴 것도 없이 즉시 추적에 나섰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경기장 자체가 기본적으로 뻥 뚫려있는 구조인지라 여차할 때 몸을 숨길만한 곳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나마 여기저기에 물건을 쌓아놓은 게 좀 있어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하면서 추적을 이어나갔다.


덕분에 기껏 차려입은 정복에 먼지가 덕지덕지 달라붙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카트린느한테서 건네받은 중화제를 복용하고 원래 몸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차피 갈아입을 옷이었으니까.


헐크마냥 쩍쩍 갈라진 쫄 반바지를 입고 경기에 나설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렇게 불꽃같은 잠입액션을 펼쳐가며 불꽃녀의 뒤를 밟고 있자니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에 맞춰서 복도를 따라 메아리치던 발자국 소리가 갑자기 뚝 멎었다.

'설마 들켰나?'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오는 불안감, 그것을 감지한 순간 바로 눈부터 굴렸다.


몸을 숨길만한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참으로 다행히도 바로 옆에 나무통같은 걸 쌓아둔 게 있어서 일단 그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그대로 최대한 숨을 죽이고 있으니..

"흐음.."

짤막하게 숨을 내뱉은 불꽃녀가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최대한 기척을 숨겼다.

어쩌면 이쪽을 낚으려는 걸 수도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두어 번 정도 울려퍼지던 발자국 소리가 뚝하고 멎더니 이내 다시금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허나 아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거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듯 조금씩 작아지던 아까하고는 달리 소리가 점차 커졌으니까.

꼭 마치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역주행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각-

발자국 소리가 벽을 따라 메아리쳤다.

또각- 또각-


규칙적으로 울려퍼지는 그 소리가 서서히 내 숨통을 죄어왔다.


'아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앨리스한테 비도라도 하나 빌려왔을텐데 말이다.


 안에 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보니 술렁거리는 마음을 쉬이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발자국 소리는 시시각각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여차하면..'


시시각각 가까워져오는  소리에 속으로 모종의 결심을 다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또각또각또각또각또각또각또각또각-


발자국 소리가 갑자기 폭주했다.

그에 결심이고 뭐고 몸을 숨기고 있던 곳에 최대한 몸을 구겨넣으니..


'어우 시발..'


딱  순간 발자국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내가 몸을 숨기고 있는 나무통 옆으로 검은색 구두코가 슬며시 삐져나와있는 모습을 말이다.

내쉬려던 숨까지 다시 목구멍 안으로 밀어넣었던 건 그래서였다.


불과 한 5미터쯤 될까.


그 정도 거리에 불꽃녀가 서 있었다.

여차하면 들킬지도 모르는 상황.

"흐음.. 잘못들었나?"

해서 숨조차 참고 있으려니 그런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에 꾸역꾸역 참고 있던 것이 안도의 한숨이라는 것으로 화해서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오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참았다.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있는 힘껏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 위로 땀방울이 맺히고, 조금씩 시야가 아득해지기 시작했을 때 기다려마지 않았던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또각-


그렇게 울려퍼지기 시작한 것이 천천히 멀어져갔다.


참고 있던 숨을 입밖으로 내뱉은 건  소리가 기존에 유지하고 있던 간격만큼이나 멀어지고 나서였다.


'어우  떨려 죽겠네..'


덕분에 새삼 실감했다.

이런 식으로 어디에 잠입하고 그러는  역시 나하고는 맞지 않는다는 걸.


'차라리 다 때려부수는 게 마음 편하지..'


잠입같은 건 사람이 할 짓이 못 됐다.


아무튼 뭐, 충분할 정도로 거리가 벌어졌으니 이제 다시 추격에 나설 때였다.

아주 잠깐 '포기'라는 이름의 선택지가 머릿속으로 떠오르긴 했지만 외면했다. 여기까지  이상 뭐라도 건져야했으니까.

그렇게 다시금 불꽃녀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다만, 지금처럼 빈손인 상태로는 안심이 안 되기도 하고, 여차할 때 대응도 불가능할 것 같아서 복도 한켠에 쌓여있던 나무 막대를 조심스레 챙겼다.


이곳을 대회장으로 리모델링할 때 쓰이고 남은 것인지 거의 내 키에 버금가는 길이인지라 맘같아서는 반으로 쪼개고 싶었지만 차마 그것까지는 할  없었다.

막대가 부러지면서 날 소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으니까.


그 탓에 불편한 동행을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이거라도 쥐고 있으면 여차할 때 휘둘러보기라도  수 있을테니까.

혹시라도 막대 끝부분이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조심조심 불꽃녀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마침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기어들어온 이유를 말이다.


"..준비는.. 어떻.."


거리가 상당하다보니 목소리가 중간중간 끊어져서 들려오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상대가 누구냐는 건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봤다.  딴에는 들킬 가능성까지 감수해가면서  행동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썩 효용은 없었다.


하필이면 옆으로 꺾이는 모퉁이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탓에 암만 고개를 내밀어봐도 모퉁이 너머에 있는 이의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으니까.

'자리를 옮겨?'


 생각도 하긴 해봤다.


그리하면 꼼짝없이 들킬 것 같아서 바로 접었지만.


그렇게 내가 누군지 모를 흑막의 정체를 확인해보겠답시고 낑낑거리는 동안에도 둘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얼굴 확인을 포기하고 다시 엄폐물 뒤로 몸을 숨기고 귀에 손을 가져다 붙였던 건 그 때문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들의 계획이라도 확실하게 귀에 담아놔야겠다 싶었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그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뜨문뜨문 들려오던 것이 점차 또렷해지는 걸 느낄  있었다.

"..그림자.. 심어.. 경기.. 습격.."


"방심하.. 준비.. 모두 끝.."


그럼에도 중간중간이 누락되어 있는 건 매한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몇 개는 건질 수 있었다.


이를테면 경기나 습격같은  그랬다.


 두 개만 따로 떼놓고 보면 경기 중에 습격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경기 후에 힘이 다 빠져있을 때 습격하겠다는 건지 확실치 않았지만, 거기에다가 뒤에 따라붙은 방심이라는 단어를 덧붙이면?

습격이 이루어지는  높은 확률로 경기 후가 되겠지.


그때쯤이면 나한테 잔뜩 시달려서 힘이고 뭐고 남아있지 않을테니 한창 쌩쌩한 상태일때 습격을 가하는 것보다 암살에 성공할 확률이 크게 높아질테니까.

의문인 점이 있다면 가장 먼저 튀어나온 그림자라는 단어인데..

'그림자..'

보통 그림자라고 하면 암살자나 첩자를 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그런 케이스일까.


아니면  그대로 그림자?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전자일  같긴 했지만 그렇다고 후자일 가능성또한 경시할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국 연합 측에는 정말 별의 별 인종이 다 있는 듯 했으니까.


어제 대장으로 출전한 바 있는 그 시커먼 것은 디아나라는 벽 앞에서 딱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긴 했지만..

'기만이었다면?'


디아나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기 급급했던 모습이 실은 무언가 수작질을 부리기 위해서였다면?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으니 지금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할 때였다.


그렇게 그림자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새겨넣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불꽃녀와 누군지 모를 이의 대화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확인해봤.. 이대로 끝.. 너무 아깝.."


포문을 연 건 다름아닌 불꽃녀였다.

"확실.. 부실.. 약간 충격.. 그대로 붕괴.."

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듣자마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부실이라는 말과 붕괴라는 말 덕분이었다.


아무래도 날림으로 지어진 듯한 대회장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붕괴했을 때의 광경을 떠올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저들 입장에서도 그냥 지나치기가  그랬을 것이다.

약간의 수고만 감수한다면 정말 궤멸적인 수준의 피해를 교국 측에 선물해줄 수 있는 각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그걸 그냥 지나친다?

차라리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못 본척 하고 그냥 지나친다는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리지 않을까?

여신교의 위세가 어마어마한만큼 저들로서는 그동안 받아온 핍박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헌데 그걸 이자까지 쳐서 갚아줄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떡하니 등장했으니 당연히 그걸 붙잡으려 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둘의 대화가 점차 결행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헌데.. 괜찮.. 위험할 수.."

"내 걱정은.. 올바른 세상.. 기꺼이 희생.."

아무래도 저들의 목표는 교류전에 이름을 올린 나라들의 대표자들이 모여있는 귀빈석인듯 했다.

불꽃녀의 목소리에서 비장함이 느껴지는  보면 직접 저지를 생각인 걸까.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상 즉석에서 결정된 것이니만큼 당연히 기존에 세워둔 계획과는 다르게 이래저래 빈틈이 많을 수 밖에 없는데 그녀가 직접 결행한다면 어지간한 빈틈은 거의  메꿀  있겠지.

특히나 테러에 필요한 물건을 귀빈석 내부로 들이는 일이 굉장히 쉬워질 거다.

3, 4위전하고 결승전이 끝나게 되면 남은 순서라고 해봐야 폐막식이 전부인 상황에서 일국의 대표를 상대로 깐깐하게 굴 정도로  막힌 이는 없을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대충 하는 시늉만 하고 들여보내주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폭발물을 점화시키는데 사용할 불씨를 귀빈석 안으로 들이는 것도 불꽃녀라면 어려울  없겠지.


생긴대로 논다고 왕국 연합측 차봉이었던 이가 바람을 어느 정도 제 입맛대로 조종하던  생각하면 허공에서 불씨 하나 피워내는 것쯤이야 불꽃녀에게는 일도 아닐 가능성이 크겠지.

아니, 생각해보니 굳이 그렇게까지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온몸이 불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손을 가져다대는 것만으로도 불이 붙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그리되면 폭발에 다이렉트로 휘말리게 되겠지만..

'왠지 멀쩡할 것 같단 말이지..'

그러니 저렇게 선뜻 희생을 자처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폭발 속에서도 멀쩡한 불꽃녀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동안에도 둘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결국 즉석에서 세운 그걸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걸까.

둘은 어느새 물건을 어떤 식으로 조달할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리 물건을 준비해놓을테니 찾아가라는 식의 대화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뒤로 물렸다.


둘의 대화가 얼추 마무리되고 있는 상황이니만큼 미리미리 몸을 빼둘 필요가 있었으니까.

다 끝나가는 판국에 들키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었기에 혹시라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유의하며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멀리서도 훤히 보이는 불꽃녀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그대로 몸을 돌려 냅다 튀었다.


맘 같아서는 호신용으로 챙겨둔 나무 막대도 내팽개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디 적당한 곳이 있으면 그곳에 숨겨놓기라도 할텐데 영 성에 차는 곳이 없었으니까.

참으로 다행히도 대기실에 도착하기 전에 그것을 숨길만한 곳을 찾을  있었고, 그렇게 찾아낸 곳에 나무 막대를 쳐박아둔뒤 그대로 대기실로 복귀했다.

그리고는 앨리스부터 찾았다.


내가 바깥을 뽈뽈거리고 돌아다니는 동안 오늘 경기에서  무구 손질을 끝마쳤는지 그녀는 뭔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3, 4위전을 코앞에둔 대회장 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방향에는 어제도 봤던 진행자가 열정적이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메인이라기 보다는 곁가지에 가까운 느낌인 게 3, 4위전이다보니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기대감이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고, 그걸 대비해 미리미리 분위기를  달궈놓으려는 모양.

따로 친분이라도 있는 건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앨리스의 옆으로 가서 두어번 정도 헛기침을 했다.


물론,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함이었고 그 효과또한 확실했다.


"응? 어디 갔다왔어? 꼴이.."


내 옷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먼지들이 신경쓰이는 걸까.

놀란 듯 눈을 크게 뜬채 그리 말하는 앨리스의 귀에다가 그대로 입술을 가져다붙였다.


그리고는 새로이 알아낸 사실들을 그대로 때려박았다.

그런  발언에 앨리스의 표정이 극변한 순간.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때마침 토해내진 진행자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3, 4위전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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