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66)화 (265/366)



〈 26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코가 막히긴 했어도 그리 심한 수준의 감기는 아니었다.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것도 없었고, 기침같은 것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 건 하필이면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머릿속을 제멋대로 헤집어대는 탓이었다.

왜, 하필, 오늘.

그러한 단어들의 조합이 내게 속삭이는  했다.

오늘 하루 재수없을 거라고.

'씁..'


어떻게 카트린느한테라도 들려서 급하게 코감기약이라도 처방받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니 타이밍 좋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이안? 아직 자?"

목소리를 들어보니 디아나였고.


아직 집합시간까지는 그래도 꽤 남았는데 왜 벌써 찾아온 걸까.


궁금한 마음에 갓 녹인 치즈마냥 축축 처지는 몸을 이끌고 문앞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단단히 걸어잠궈놨던 문을 열어제끼니..

"그.. 혹시 괜찮으면 간단하게 산책이라도 하지 않을래? 몸도 미리 풀어둘 겸.."


긴장감에 휩싸여있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제는 딱히 긴장같은 건 하지 않는 듯 하더니 오늘 몰아서 하려고 그랬나 보다.


분이라도 바른 것마냥 희게 변해있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긴장했어요?"

그랬더니 스리슬쩍  시선을 피하던 디아나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사실을 인정했다.


"..쪼금?"


솔직히 좀 의외였다.


이렇게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만큼 긴장했다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귀찮음은 잠시 집어던지고 그녀의 바람대로 아침산책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해서 빠르게 복장을 갖추고 그녀의 옆에 자리하니 내 모습을 슥 훑던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혹시.. 감기걸렸어? 목소리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긴 했는데 그래도 티가 나는 건 어쩔  없었나 보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는 사람한테 걱정이라는 짐까지 얹어주고 싶지는 않아서 잽싸게 부정했다.

"아뇨? 그냥 일어난지 얼마 안 되서 그래요."


"그래?"

"네, 난로 틀어놓고 자니까 방이 건조해져서 자고 일어나면 목이 잠기더라구요."

그리 말하고는 보란듯이 헛기침을 두어번 정도 해보이니 디아나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많이 건조하긴 하더라. 천이라도 물에 적셔서 걸어놓고 자지.."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게요."

"그래, 까먹지 말고."

잊지 말라고 당부라도 하는 것처럼 싱긋 웃어보이는 디아나를 향해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준 뒤 슬며시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그나저나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나가죠? 괜히 다른 사람하고 마주치기라도 하면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까."


"그래."


그렇게 숙소를 빠져나와  주변을 가볍게 돌기 시작했다.

그래도 코에 신선한 공기가 좀 들어가니 막혀있던 게 그나마 좀 뚫리는  같은 느낌이었다.

애석하게도 완전히 나아지진 않았지만.


그런 나와는 달리 디아나의 얼굴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기는 커녕 더 딱딱해지기만 했다.


바로 옆에서 뛰는 날 의식한답시고 표정관리에 들어간 상태임을 고려하면 자꾸만 긴장이 되는 모양.

'하긴..'

생각해보니 그럴만 하다 싶었다.


결승전도 결승전이지만 아마 지금쯤 어머니가 그걸 지켜볼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할테니까.


디아나의 어머니는 꽤 엄격한 편인듯 했으니 긴장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을 터.


그래서 그냥 닥치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여기서 내가 뭐라고 말한들, 설령 긴장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그녀를 다독인들 지금의 디아나에게는 먹힐  없으니까.


잠깐 긴장을 풀 수는 있어도 한순간일 거다.


해서 그녀가 스스로 그것을 정리할  있도록 묵묵히 그녀의 옆을 지켰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보는 내가  안쓰러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디아나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얼추 정리가 끝나가는 모양.


"후우..!"

그리고 그녀는 턱까지 벅차오른 숨을 크게 내뱉는 것으로 얼굴 위에 남아있던 한줌의 긴장마저도 완벽히 떨쳐냈다.

그리하여 그녀의 얼굴 위에 남겨진 건 딱 좋은 수준의 고양감이었다.


그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끝마친 디아나를 데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니?


"이, 이안 혹시 내 나이프 시스 못 봤어?"

이번에는 앨리스 차례였다.

"나이프 시스요?"

"으응,  왜 네가 선물해줬던  있잖아. 분명 어제 깨끗하게 닦아서 건조대 위에다가 올려뒀었는데.."


내가 선물해준 것이라 함은 검은색 가죽으로 된 그걸 말하는 거겠지.

건조대는 공용으로 쓰이는  말하는 것일테고.

거기에 널어뒀다면 밤새 밤손님이라도 다녀가지 않았다면 따로 누가 손댔을 리는 없을텐데 말이다.

혹시 고양이나 새가 훔쳐가기라도  걸까.


어느새 그걸 제 행운의 증표같은 걸로 삼기라도 한 모양인지 묘하게 불안증세를 보이는 앨리스와 함께 수색에 나섰다.

손을 덜덜 떠는 것이 이대로 내버려두면 장기 중 하나인 비도술은 커녕 칼질조차 제대로 못할 것 같았으니까.


"건조대 위에다가 뒀다고 했죠?"


"으응.."


선물해준  잃어버린 거나 다름없는 상황인만큼 내 눈치가 보였던 걸까.

시무룩한 얼굴을 한채 고개를 끄덕이는 앨리스를 상대로 사정청취를 이어나갔다.


"확실해요? 방에 가져다 둔  아니고요?"


"아냐.. 내가 분명 어제 저녁에 거기에 뒀었단 말야.."


울먹이기까지 하는 것이 다른 데다가 놓고 깜빡한  아닌 듯 했다.

해서 일단 건조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분명 여기다가 이렇게 널어뒀었는데.."


앨리스는 무려 손짓까지 해가며 자신이 어제 저녁 했던 행동을 그대로 재현했지만 그렇다고 사라진 것이 다시 나타나지는 않았다.


'아니, 잠깐만..'

어제 밤에  오지 않았나?


눈이라고 해봐야 얼마 내리지도 않아서 그새 다 녹아서 없어지긴 했지만 분명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레이시아가 눈을 맞으며  기다리고 있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니까.

그렇다는 건?


"혹시 이거 누가 관리하는 지 알아요?"

"어? 응.."


해서 앨리스를 따라 건조대의 관리를 맡은 이에게로 향하니 과연 그곳에서 그녀가 찾고 있던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알고보니 밤에 내린 눈때문에 혹시나 눈에 맞으면 상할 것 같은 것들을 따로 골라서 안으로 들여놨던 것.

그렇게 생각치도 못하게 보모 비스무리한 역할을 수행하다보니 어느새 경기장으로 출발해야하는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긴장감?


그런  껴들 틈 따위는 없었다.


선봉과 차봉을 맡아줄 디아나와 앨리스를 케어한답시고 정말 정신없이 바빴으니까.


방에 틀어박혀 있기라도 했는지 숙소 그 어디에서도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진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쯤이었다.

"괜찮아?"


내가 지쳐보이기라도 했던 걸까.

등장하자마자 그리 묻길래 이쪽은 충분히 멀쩡하니 네 몸부터 챙기라는 뜻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그렇게 진을 마지막으로 오늘 결승전에 나설 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고, 덕분에 더 기다릴 필요 없이 경기장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관객들과 입장시간이 겹치게  경우 소란이 일어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상당히 이른 시간에 출발했건만 경기장 주변은 이미 기대감을 잔뜩 머금은 이들로 복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정확히는 어제 압도적인 활약을 보여주었던 디아나를 알아보고 우리 주변으로 몰려든 건 거의 필연적인 일이었다.

덕분에 경기 시작하기도 전에 힘부터 빼고 시작하는  했으나 다행히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다.


교국 측에서 미리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경기장 주변에 진행요원들을  깔아둔 덕분이었다.

성기사단 인원을 그대로 빼오기라도 했는지 하나같이 금발머리를 하고 있는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그나마 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사이 우리측 대표나 다름없는 디아나가 최종 확인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잠시 우리 곁을 떠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앨리스에게 접근했다.

"밤 사이에 뭐 없었어요?"


그녀 곁으로 가서 붙자마자 질문부터 던져봤지만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것들은 영 신통치 않았다.


고개를 가로젓는게 전부였으니까.

그렇기에 의아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뭔가 음모를 꾸미는 이들이 가장 바쁜 때가 언제겠는가?


당연히 결행일 바로 전날일 것이다.

전날인만큼 기존에 세워놓은 계획도 점검하고, 계획에 필요한 것들은 모두 갖춰졌는지 점검하면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결행일 전날인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어떻게 된 걸까.

앨리스를 향해 질문을 던졌던  다름아닌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감시를 맡긴 사람이 회유당했을 가능성은.."


"없어. 어제 직접 만나서 확인했었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는 모습이  단호했다.

그렇다면 그쪽은 아니라고 보는  맞겠지.


그런 식으로 머릿속으로 떠오른 체크리스트에 적힌 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해봤지만 개중에서 그 어떤 것도 걸려드는 게 없었다.

'설마 이건 아니다 싶어서 접었나?'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정도였다.

"그.. 정말 제대로 들은 거 맞아? 혹시 착각한 건.."

앨리스의 심정도 나와 비슷했는지 처음으로 내 증언을 의심하는 듯한 모습이 그녀에게서 튀어나왔다.

물론,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의심을 일축시켰다.

다만 어색하게 변해버린 분위기까지는 어찌할 수 없어서 그녀와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일단 뭐.. 끝까지 눈을 떼지 말라고 해두기는 했으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거든 바로 기별이 올테니 그 때 이야기하자며 대화를 마무리 지은 앨리스가 아까 전부터 손질하고 있던 비도를 손에서 내려놓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암만 파헤쳐봐도 이렇다할 건덕지가 나오지 않는 쪽을 신경쓰느니 당장 코앞으로 들이닥친 결승전에 집중하는 편이 훨씬 나을  같다고 판단한 모양.

그런 그녀를 방해하기도 좀 그래서 다시 원래 자리로 복귀했다.

 사이 결승전 전에 펼쳐질 3, 4위 전의 준비가 얼추 끝이 났는지 어느새 대회장 안으로 관객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 걸까.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어제 입장했던 수의 배는 되는 듯 했다.

거의 뭐 관객석이 콩나물 시루처럼 보일 지경이라고 해야할까.


상황이 그렇다보니 불안한 예감을 쉬이 잠재울 수가 없었다.

사고 치기에 이만한 환경도 또 없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번거롭게 바이올라의 암살까지 갈 필요도 없이 귀빈석 중에 하나만 무너뜨려도 대참사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패닉에 빠진 이들이 자기들끼리 밀고 넘어뜨리고 밟으면서 피해자를 양산할테니까.


그 광경이 실제로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눈에 훤해서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을 핑계 삼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던 건 그래서였다.

가만히 있느니 미리미리 몸이나 풀어둘겸 사교도 놈들이 좋아할만한 곳을 둘러보는 편이 그나마  나을 것 같기도 했으니까.


겸사겸사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도주로로 삼을만한 경로도 눈에 좀 익혀놓고 말이다.


그렇게 대기실을 빠져나와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금지된 곳을 정처없이 걸어다녔다.

당연히 혼자였다.

대기실을 벗어나자마자 진행요원이 따라붙으려 했지만 화장실을 간다고 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더라.

덕분에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올 수 있었는데..

'흠?'


놀랍게도 선객이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몸부터 숨긴다고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는데 일단 확실한 건 누군지 모를 선객이 진행요원 중에 한 명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금발이 아니었으니까.

'분명 적발이었단 말이지..'

그것도 그냥 적발이 아니라 타오르는 듯한 적발이라고 해야할까. 진짜 불이 일렁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새빨간 것이 걸음걸이에 맞춰서 이리저리 흔들리더라.

'..잠깐만.'


타오르는 듯한 적발이라.


공교롭게도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말에 딱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가 귀빈들 중에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 왜 개막식 당시에 투마치토커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많은 이들의 원성을 샀었던 왕국 연합측 대표있지 않은가.

내 기억이 맞다면 그녀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몸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머리카락또한 불로 이루어진 건 마찬가지였고.

지금쯤이면 귀빈석을 지키고 있어야할 양반이 참가자들 외에는 출입이 허용되지 않은 구역에는 무슨 일일까.


'이거 아무래도..'

냄새가 났다.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묘한 냄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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