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레이시아 시점****
"..죄송해요.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이 귓가로 울려퍼진 순간 가슴 속에서 뭔가가 삐걱하고 파열음을 냈다.
아니, 어쩌면 뭔가가 떨어진 것 같기도 했다.
쿵소리를 내며 바닥에 쳐박힌 것이 살려달라고, 자길 구해달라고 몸을 펄떡거렸다.
그 간절하기 그지없는 외침에도 차마 그것을 향해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몸도 마음도 얼어버린지 오래니까.
맹세컨대 이토록 추위에 떨어본 건 태어나서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겨울로 접어들기 시작한 교국의 밤공기는 매서웠다.
뼈가 시리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비로소 알 것도 같았다.
헌데 그 매서운 밤공기보다도 방금 이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짤막한 말 한 마디가 더 시리게 느껴졌다.
한겨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얼음물을 뒤집어 쓰면 이런 느낌일까.
등줄기, 혹은 가슴어림에서부터 시작된 시린 감각이 순식간에 손끝, 발끝까지 퍼져나가 손하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것만 같았으니까.
이미 꼴 사나운 모습이란 모습은 전부 보인 것 같은데 거기에 하나 더 얹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를 악물었다. 힘조절에 실패했는지 아랫턱쪽에서 욱씬거리는 통증이 올라왔지만 무시했다. 차라리 그 편이 나았으니까.
'차라리..'
이쪽을 경멸하듯 바라봤다면, 상종하기 싫다는 것처럼 대했다면 이 정도로 가슴이 시리지는 않았을텐데.
이쪽을 걱정하는 듯한 태도라도 보여주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느낌은 받지 않았을텐데.
이안의 입을 뚫고 나온 한 마디는 스스로 상상했던 광경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어서 그래서 더 가슴이 시렸다.
그가 다 이해한다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었다면?
추위에 시달리다 따뜻한 난로를 마주한 것마냥 구원받은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쪽을 경멸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었다면?
비참함은 느꼈을지언정 안도했을 것이다.
타인을 상대로 감정을 드러낸다는 건 그 사람에게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증거니까.
헌데 방금 그 한 마디는 둘 중에 어느 쪽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희망이라는 이름의 끈을 놓지 못한 건 짤막하게 덧붙여진 '지금은'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기댈 수 있는 곳이 그곳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 기댐의 결과물이 설령 파멸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그곳에 모든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렇게 나온 것도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잡념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
듣자마자 알았다.
저건 거짓말이라는 걸.
정말로 그랬다면?
저렇게 급하게 뛰쳐나온 듯한 모습은 아니었겠지.
뿐만아니라 아까처럼 화를 내지도, 입고 있는 걸 벗어 이 두 손에 둘러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와서 거짓을 말해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알고 있을텐데도 이안은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가 얼마나 멍청한 행동을 저질렀는지를.
교류전에 관한 사항은 이곳까지 오면서 이미 모두 보고 받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알고 있었다.
내일 있을 경기에 참으로 많은 것이 달려있다는 걸.
만약 내일 거기서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교류전 후에 있을 '교류'의 우선권은 제국 측이 갖게 될 것이다.
애초에 그게 교류전의 진짜 목적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우선권을 확보한 제국 측에서는 과연 누굴 지명할까?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지레짐작 하겠냐만은 딱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제국 측에서 지명할 이들 중에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사내가 들어갈 거라는 것.
그래,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저런 몸임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겠지.
그래야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을테니까.
내일을 위해 몸 상태를 세심하게 조율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안의 옆얼굴에는 흘린지 얼마 되지 않은 것같은 땀방울이 방울방울 맺혀있었다.
꼭 흘리다만 눈물처럼 보이는 그것의 모습을 목도한 순간 아까하고는 다른 의미로 찬물을 뒤집어 쓴 것만 같았다.
'나는..'
대체 뭘 하려고 했던 걸까.
사람이 어쩜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을까.
스스로 초조하고 불안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쩌면 일생일대의 순간일지도 모르는 것을 앞두고 있는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서..
생각하면 할수록 참담했다.
정말 자신이 이안을 사랑하는 게 맞기는 할지 의심마저 들 정도로.
어쩜 자신은 그냥 그를 갖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마냥 그에게 소유욕을 느끼고 떼를 쓰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한 번 시작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지만 억지로 외면했다.
이제와서 이 감정에 사랑 외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일을 저지를 자신따위 자신에게는 없었다.
"그러니까 전하께서 이해해주시면.."
죄스러웠다.
양해를 구해야하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자신일진데 정작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와 얼굴을 한채 양해를 구하고 있는 건 다름아닌 이안이었으니까.
"..그래."
그 가책을 견딜 수가 없어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입술을 채찍질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중을 기약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리 하자니 마음 속에서, 머릿속에서 새카맣게 타버린 뭔가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자기는 더 이상 기다림을 견딜 수 없다고 비명을 지르는 듯 했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행동으로 옮겼다.
네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말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거라도 해야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 한 마디가 뭐라고 그것을 입밖으로 내뱉은 것만으로도 심장어림 한쪽이 뻥 뚫려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헛헛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럼.."
대화가 마무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이는 건 혹시라도 자신이 계속 이곳에 서 있을까봐 걱정이 돼서 그런 거겠지.
해서 황급히 걸음을 내딛어 그의 옆을 지나쳤다.
맘같아서는 손에 둘러진 그의 겉옷이라도 다시 몸에 걸쳐주고 싶었지만 차마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하루가 1년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 그 자그마한 온기라도 없으면 이 시린 감각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이기적이라 욕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이미 그 기다림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충분히 맛봤으니까.
다만..
"..다치지 마."
그대로 자리를 떠나기 전에 그 한 마디만큼은 전하고 싶었다.
개인의 운명, 그리고 국가간의 자존심을 포함해 많은 것이 걸려있는 경기다.
그 사실을 참가자들이라고 해서 모르진 않을테니 다들 알게 모르게 받는 압박감이 상당할 터.
압박감은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긴장은 사고를 불러들인다.
친선이라는 명목하에 날을 제거한 무기를 사용하고, 여차할 경우에 진행자가 바로 개입한다지만 그렇다고 사고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날만 제거했다 뿐이지 쇳덩어리라는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
다들 어떻게든 이겨보겠다고 분명 힘이 잔뜩 들어가있을텐데 그렇게 휘둘러진 걸 잘못 맞기라도 했다간..
쓸데없이 불안함을 불러일으키는 상상을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차단했다.
그리고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금 재촉했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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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구만..'
서둘러 자리를 뜨는 레이시아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노림수가 제대로 먹혀든 것 같다고.
정말로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긴 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세심하게 상황을 꾸며보인건 레이시아가 폭주할 가능성을 최대한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나와 관련된 여성들 중에서 가장 위험한 타입이 그녀라는 걸 말이다.
'사실 카트린느도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최면 향초라는 말도 안 되는 물건까지 굳이 창조해가면서 어떻게든 날 따먹으려고 하는 카트린느도 사상 면에서 위험성이 상당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는 선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었다.
최소한 그녀는 남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최면 향초를 사용하려 한다거나 그러지는 않으니까.
카트린느가 그걸 사용하는 건 어디까지나 나와 단둘이 있을 때 뿐이었다.
반면에 레이시아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저번 사건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었고.
그야말로 브레이크가 고장난 에잇톤 트럭이 어떤 느낌인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해야할까.
일단 한 번 폭주하기 시작하면 뭔가와 부딪혀서 박살이 나거나 박살을 낼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게 바로 레이시아였다.
참으로 다행히도 저번 폭주 때는 내 기지 덕분에 접촉사고 수준에서 그쳤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를 통제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행동으로 옮겼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먹혀든 것 같았고.
'사실 뭐..'
레이시아가 저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것들 중에 손에 넣지 못한게 없을테니까.
무려 왕녀님 아닌가?
그것도 그냥 왕녀가 아니라 날 때부터 유력한 왕위계승권자였으니 아마 뭔가를 가지고 싶다 말하면 바로바로 눈앞으로 대령되는 삶을 살아왔을 터.
헌데 정작 진심으로 손에 넣고 싶은 게 생겼는데 바라는대로 손에 들어오지는 않고 움켜쥐려고 하면 자꾸만 튕겨나가버리니 당연히 미치고 팔짝 뛸 수밖에 없겠지.
그러다 눈이 홱 돌아버린 것일 것이고.
아마 당시에는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을 거다.
'뭐, 아무튼..'
레이시아를 통제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소리다.
선도 선이지만 폭주했을 때 가장 파멸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또한 바로 그녀니까.
탱자탱자 놀기 바쁜 여왕을 대신해 국정의 태반을 책임지며 사실상 여왕이나 다름없는 권한을 행사하는 존재가 눈이 돌아가서 폭주한다고 생각해봐라.
그리고 그 폭주가 오롯이 한 사람을 향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높으신 분일수록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이다.
그게 사람을 얼마나 고달프고 미치게 만드는지 이미 초회차때 충분히 경험해봤으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라면 난 백이면 백 적으로 돌리지 않는 쪽을 택할 거다.
'자, 그럼..'
코앞까지 들이닥쳤던 문제도 어찌어찌 잘 해결한 것 같으니 다시 방으로 돌아가보실까.
이 날씨에 바깥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는 레이시아가 걱정이 되어서 급하게 달려나온 듯한 모습을 연출한답시고 땀에 젖은 몸을 한채 그대로 뛰쳐나왔더니 슬슬 몸 곳곳에 매달려있던 땀방울이 식으며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비슷한 이유로 걸치고 나왔던 겉옷을 레이시아에게 뺏겨버려서 더 그랬다.
'하필 뺏어도 그걸 뺏어가냐..'
이러다가 재수없게 덜컥 감기라도 걸리는 건 아니겠지?
그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돌아가는대로 따뜻한 물로 차갑게 식어버린 몸을 좁 뎁혀준 다음에 잠을 자든 뭘 하든 해야할 것 같았다.
귀찮다고 이대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버리면 바이러스 좋은 일만 될테니까.
아마 신나서 달려들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그러다보니 든 생각은..
'뭔 놈의 바람이..'
날림공사인게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몸이 떨릴 리 없으니까.
방에는 그나마 난로라도 있었지 이건 뭐..
'야왼데?'
아니, 이건 야외보다 더 했다.
대체 어디에 구멍이 그렇게 뚫려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이 한 방향으로 집중되서 쏟아지는 탓에 옥상에 있을 때보다 더 추운 느낌이었으니까.
걸음을 재촉했던 건 그래서였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 온수로 몸부터 씻었다.
그리고는 난로 앞에서 몸에 남은 물기를 깔끔하게 말려준 뒤, 그대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물론,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정도면 감기 방지 대책으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나 보다.
결승전 당일 아침, 훙훙하고 살벌하게 울려퍼지는 바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날 반긴 건..
"에.."
코막힘이었다.
그것도 꽤 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