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64)화 (263/366)



〈 26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왔구나..!'


마침 잘 됐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팔굽혀기도 슬슬 질려가던 참이었으니까.


'본인이 직접 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

아무리 애가 닳을 대로 닳은 상황이라고 해도 그녀와 동행한 이들이 레이시아가 직접 나서도록 내버려둘리 없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이곳에 있는 이들은 다들 하나같이 유망한 이들 뿐이었다.


그런만큼 당연히 인맥또한 넓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이들 앞에서 일국의 왕녀씩이나 되는 이가 남자 방 앞에서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보인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순식간에 왕국 전역에 그와 관련된 소문이 쫙 퍼질 것이다.

대충 일주일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도 땅덩어리가 상당한 편이니 더 걸릴 수도 있고.


아무튼 생각이 있는 이라면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런고로 지금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는 건 레이시아가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아까 동행했던 시녀거나 그 시녀에게 짬을 당한 누군가일 가능성이 크겠지.

애초에 레이시아가 직접왔다면 문을 두들긴 시점에서 목소리를 내서  찾아온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렸을 것이다.


문 너머에 서 있는 것이 시녀라면?

그에 걸맞는 대응을 보여주면 될 터.

"음..누구십니까?"


해서 살짝 목소리를 조절해 지친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리하면 당연히 답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슥-

대답대신 돌아온 건 문틈 사이로 들이밀어진 무언가였다.

'쪽찌?'


새하얀 걸 보면 그런 거겠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그것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니 문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가 똑똑하고 재차 문을 두들겼다.


얼른 확인하고 답장을 돌려달라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집어들어 확인해보니 그곳에는..


-옥상에서 기다리마.

꽤 눈에 익은 필체로 된 짤막한 문장이 적혀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레이시아의 것이었다.


꽤나 절박한 상황일게 분명함에도 쪽지 위에 자리하고 있는 글의 필체는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더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수가 없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부르면 내가 '넵!'하고 즉시 응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정말로?


정말로 그런 거라면 기꺼이  같잖기 그지없는 착각을 깨부숴줄 용의가 있었다.


'아니면 혹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할 생각인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전자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추울텐데..'


교국에 도착할 당시만 하더라도 완연한 가을이었지만 그것도 이제  말이었다.


시간이 약 두 달 가까이 흐른 탓에 이제 가을이라기 보단 겨울에 가까운 날씨가 됐으니까.

그래도 낮에는 아직 늦가을에서 초겨울 정도 되는 수준이긴 하지만, 밤에는 정말 더럽게 추웠다.

교국 측에서 방마다 난로를 하나씩 비치해주고 연료도 빵빵하게 넣어주긴 했지만 솔직히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대체 어디서 바람이 그리 들어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웃풍이 숭숭 들어오는 탓에 암만 난로를 빵빵하게 때워놔도 담요로 몸을 싸매지 않으면 어느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날씨가 이런데 바깥에서 밤을 샌다?

몸이 허락하는만큼 두텁게 싸매도 십중팔구 앓아누울 거다.

문제는 레이시아가 그런 식으로 꼼수를 부릴 리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데 그런 꼴사나운 모습으로  기다린다?

차라리 앓아누웠으면 누웠지 그러지는 않을 터.

그러니..


'나갈 타이밍을 잘 잡아야겠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당장 그녀의 부름에 응할 생각은 없었다.

쪽지를 손에 든채 문을 향해 입을 열었던 건 그래서였다.

"..죄송하지만 나갈 생각 없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너머에서 내가 답을 내놓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주 또렷하게 느껴져서 들으란 듯이 내뱉으니 돌아온  침음성에 가까운 소리였다.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라고 하셨습니다."


역시나 그 시녀가 대신 왔나 보다.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분명 그런 거겠지.

주인의 뜻이 그러하니 부디 부름에 응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제법 간절함이 느껴지는 시녀의 목소리에 섣불리 답을 하지 않고 일단 침묵을 택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내가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있다는  상대방이 인지할  있도록 중간중간에 한숨과 침음성을 섞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침묵하다가..


"..그래도 제 뜻은 변치 않을테니 이만 돌아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다른 곳에까지 신경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잠긴 목소리를 연기하며 여전히  너머에서 버티고 있는 레이시아의 시녀를 상대로 축객령을 내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그녀도 내일 결승전에 출전해야하는  붙잡고 실랑이를 하는 게 내심 마음에 걸렸던 걸까.


아니면 슬슬 모여들기 시작했을게 분명한 주변의 시선들이 신경쓰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중에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문 앞을 떠나는 소리가 쪽지마냥 문틈 사이를 비집고 흘러들어왔다.

그렇게 시녀를 떠나보냈지만 곧바로 문앞을 떠나지는 않았다.

혹시 또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해서 시녀가 문틈 사이로 건네준 쪽지를 손에 꼭 움켜쥔채 잠시동안 문앞을 지켰다.

동시에 시간을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적절한 타이밍을 잡기 위함이었다.

너무 일찍 나가도  됐지만 그렇다고 너무 늦게 나가는 것도 피해야 했으니까.

'보자..'


대충 1시간 정도면 충분하려나?


그 이상은 아무리 나와의 만남이 간절한 상태라 해도 울컥할 가능성이 크니까.


원래 인간이라는  그렇지 않은가?


힘든 게 허용치 이상을 넘어가면 자연스럽게 남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물이었다.


그건 레이시아라고 다르지 않을 터.


아니, 어쩌면 레이시아기에 더할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런 쪽에 면역이 있을  같지는 않으니까.

추위에 떨어본 적은 있어도 그것에 장시간 노출되본 적은 당연히 없을테지.


1시간으로 잡아두었던 것에서 10분을 뺀  그래서였다.


생각해보니 1시간도 힘들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방을 나서야할 시간을 확정지은  뭔가 엄청난 고민이라도 떠안은 사람처럼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이 그냥 적당한 곳에 앉아서 시간을 때우다가 나가도 되긴 했지만 이런  원래 감정이입이 중요한 거니까.

그 한국산 카사노바놈도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연기를 할 거라면 마인드컨트롤부터 완벽하게 하라고 말이다.

해서 행동이라도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해봤더니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조금씩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정신무장을 얼추 끝내고 나니 정해뒀던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래도 살짝 여유가 있어서 짐을 뒤져 가디건 느낌의 겉옷을 몸에 걸쳤다.

물론, 단추는 잠구지 않았다.

그게 포인트니까.


그렇게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걸치고 나온 듯한 룩을 완성하고 나서야 방을 나섰다.

 안을 빙글빙글 도는데 집중하느라 창쪽에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어느새 바깥은 어둑어둑하게 변해있었다.


어느덧 겨울냄새를 풍기기 시작한 공기만큼이나 해도 짧아진 걸까.

다들 내일을 위해 일찌감치 쉬러갔는지 복도는 벽에 걸린 등이 타들어가며 나는 소리 외에는 조용했다.


내딛는 걸음걸음에 맞춰서 타닥타닥하고 불똥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렇게 주홍빛으로 물든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목적지는 레이시아가 기다리고 있을 옥상이었다.

옥상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선객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옥상 문은 반쯤 열려있었다.


그틈 사이로 레이시아의 모습을 확인할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눈을 맞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새카맣게 물든 밤하늘을 수놓으며 나풀거리던 새하얀 것들이 하나둘씩 그녀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추운 걸까.


아니면 답답한 걸까.

"후우.."


빨갛게 물든 손가락을 입쪽으로 가져간 레이시아가 그대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녀의 입에서 뿜어져나온 새하얀 김이 담배연기마냥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끼익-

추위를 견디지 못한 레이시아가 몸을 웅크리는 타이밍에 맞춰서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말하지 않았느냐. 알아서 내려가겠.."

따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더니 측근이 데리러 온 줄 알았나 보다.

한숨섞인 목소리와 함께 내쪽을 돌아보며 그리 말하던 레이시아가 날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이안."


날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내심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걸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꼭 마치 믿을  없는 무언가를 목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만져봐야 제 앞에 서 있는 내가 진짜라는 걸 확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모양이다.

레이시아의 손이 위로 올라왔다.


허나 그것이 내게 닿는 일은 없었다.

날 향해 뻗어지기도 전에 그대로 멈춰버렸으니까.

 몸짓이 꼭 본인에게는 그런 행동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듯 했다.

여러모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언제부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계셨던 겁니까."

아주 세심하게 목소리를 조절했다.

안 나갈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음에도 미련하게 날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에게 화가 난 것처럼 목소리에 분노를 담았다.


그리고 그 위에다가 걱정을 쌓아올렸다.

당연히 레이시아를 향한 것이었다.


그렇게 감정을 살짝 드러낸 뒤,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농담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피가 터져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꽉 깨물고 있으니  모습을 확인했는지 레이시아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동시에 차마 날 향해 뻗지 못하고 스스로 내렸던 손을 그녀가 꽉 움켜쥐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내게 손을 뻗을 것만 같았던 걸까.


덕분에 나와 그녀 사이로 울려퍼지는  새하얀 것들이 내려앉으며 나는 소리 뿐이었다.

사락-

그런 소리들이 몇 번이고 귀를 울렸다.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그 소리가 대충 스무 번 정도 울려퍼지고 나서였다.

아무 말 없이 성큼 레이시아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뒤로 도망치기 전에 잽싸게 손을 움직여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완전 얼음장이잖아.."

동시에 그리 중얼거리며 속상해죽겠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효과?


말할 것도 없이 확실했다.

추위 때문에 가뜩이나 발그레하게 물들어있던 레이시아의 얼굴이 숫제 터지기라도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광경을 볼 수 있었으니까.

물론, 거기에 대놓고 시선을 두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야 여태껏 연기를 한 이유가 없으니까.

레이시아의 반응을 힐끔하고 한 번 확인한 뒤로는 줄곧 내 손 안에 갇혀있는 그녀의 손쪽에 시선을 집중했다.


"기다릴거면 따뜻하게라도 입고 기다리던가.. 손이 이게 대체 뭡니까? 다 부르텄잖아요.."

이번에는 말로만 끝내지 않았다.

문득 걱정이 돼서 급하게 뛰쳐나온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어깨 위에다가 걸쳐놓았던 겉옷을 벗어 그대로 레이시아의 손을 감쌌다.

 얼음장같은 손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지켜보는 레이시아에게는 그런 내 행동이 무언의 허락처럼 비춰졌던 모양이다.


분에 넘치는 호사에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꼭 깨물고 있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이안.. 나는.."


오랫동안  공기 속에서 방치되어 있었던 탓일까.


레이시아의 목소리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하고는 달랐다.

살짝 잠겨있었고, 동시에 떨리고 있었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레이시아가 방금 그  마디를 입밖으로 내뱉기 위해 얼마만큼의 용기를 냈는지를.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걸 끝까지 들어줘야할 의무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죄송해요.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아요."


그 말 한 마디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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