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물론,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욕심일 것이다.
바이올라는 오늘 디아나가 상대했던 것들하고는 다르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만전인 상태에서 붙어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텐데 바이올라의 앞까지 도달한다고 힘이 빠진 상태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고로 오늘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날로 먹기는 힘들 것이다.
분명 내게까지 차례가 돌아올테니까.
'주인공 빠와를 좀 보여주면 좋을텐데..'
이대로라면 세 번째로 나서게 될 가능성이 큰 진이 바이올라를 상대로 승리를 따낼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런 게 존재하기는 할지 모르겠다.
물론,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으니 진이 이길 가능성도 존재하기는 할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주인공답게 극적으로 각성을 한다거나 하다못해 전생에서 보여주었던 기량을 온전히 되찾기라도 한다면 지지는 않겠지.
전생에서 그녀는 바이올라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강한 존재였으니까.
허나 실제로 그리 될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고로 그냥 내게까지 차례가 돌아올 거라 보는 게 맞았다.
그렇게 결승전을 위한 엔트리가 확정되었다.
선봉에 디아나 차봉으로 앨리스 부장 자리에 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장 자리에 내가 들어가는 식이었다.
물론, 내 독단으로 결정한 건 아니었다.
디아나와 함께 대기실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둘하고도 상의를 해보고 내린 게 그것이었으니까. 겸사겸사 그곳에 구비해놓았던 카트린느의 비상약을 이용해 디아나의 얼굴에 난 생채기도 치료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결정한 것을 교국 측에 제출한 뒤 그대로 숙소로 돌아왔다.
출전 순서까지 제출한 이상 이제 남은 건 내일 있을 결승전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으니까.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내심 긴장이 됐던 모양인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별다른 대화없이 그대로 각자 숙소로 뿔뿔히 흩어졌다.
당연히 우릴 붙잡거나 그러는 이도 없었다.
보아하니 우리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맘같아서는 응원의 한 마디 같은 것도 해주고 싶은데 쉬려고 들어간다는 사람을 붙잡았다가 컨디션에 악영향을 끼치기라도 할까봐 다들 걱정이 됐던 모양.
그러한 분위기가 숙소 내에 팽배하다보니 그런 쪽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나조차도 방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다.
밖을 돌아다니자니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였으니까.
시선도 어마어마하게 끌릴 것 같았고.
해서 방 안에 드러누워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주제는 역시 진과 성녀에 관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성녀 쪽에서 뭔가 움직임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토록 허겁지겁 자리를 뛰쳐나간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헌데 이게 왠걸?
우리가 결승전을 위해 필요한 서류 제출을 끝마치고 숙소로 돌아올 때까지 교국 측은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의아했고.
'흠..'
혹시 교류전이 끝난 후에 접촉할 생각인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성녀 측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제재같은 것이 아니라 온건한 형태의 접촉이라면 지금은 시기가 썩 좋지 않았으니까.
진이 뭐 무투대회하고 하등 상관없는 상황이었다면 모를까 그녀는 결승전 진출자 명단에 참가자 중 한 명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만큼 사소한 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런 상황에서 접촉을 시도한다?
모르긴 몰라도 좋은 소리 듣기는 어려울 거다.
당사자인 진 뿐만 아니라 우리 측에게도, 우리의 상대인 제국 측에게도 그렇겠지.
우리 측은 당연히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는 이를 왜 자극하냐고 역정을 낼 것이고, 제국 측은 결승전을 앞두고 교국의 상층부가 우리 측 참가자 중 한 명과 접촉하려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혹시..'하고 색안경을 낄테니까.
쉽게 말해 긁어 부스럼 만드는 꼴이라고 해야할까.
그 사실을 성녀라고 해서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고로 접촉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교류전이 종료되고 난 후, 하다못해 결승전에서 진의 차례가 끝나고 난 후가 될 가능성이 높겠지.
내게 있어서 최선은 뭐니뭐니해도 전자였다.
후자의 경우 바이올라하고 드잡이질을 한답시고 바빠서 둘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지 못하게될 가능성이 크니까.
내가 궁금한 건 성녀가 진과 접촉하려는 이유였다.
진을 보고 놀란 거야 그녀가 모시는 여신의 나와바리 중에서도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교국 한복판이 타신의 신성을 품은 이가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 걸 목도한 셈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뭐, 궁금하기라도 했나?'
그러니까 진이 모시는 신의 정체같은 것이 말이다.
그게 아니면 혹시.. 여신으로부터 따로 언질같은 거라도 받은 걸까.
개인적으로는 후자 쪽이 그나마 가능성이 높을 것 같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은 '주인공'아닌가?
자기가 다스리는 세계가 멸망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상태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여신으로서는 당연히 진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었을 터.
그래서 성녀를 상대로 급하게 신탁같은 거라도 내린 것일까?
당장 진과 접촉하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쭉 읊어봤는데 의외로 그럴 듯 했다.
정말로 그 순간 신탁이 떨어진 거라면 성녀가 그렇게 허둥지둥 자리를 빠져나갔던 것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니까.
자기가 모시는 여신이 금과옥조같은 신탁을 내렸는데 당연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었겠지.
'아오..'
솔직히 말하자면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배배 꼬이는 느낌이었다.
진이 전회차의 그 폐성녀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인지하고부터 쭉 이랬다.
뭘 생각하려고만 하면 자꾸만 주인공이라는 카드가 폐기처분 되는 것만큼은 막기 위해 그 폐급 새끼를 변호한답시고 아둥바둥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으니까.
그때 반대편에서 날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은..
눈빛이..
'어땠더라?'
생각이 안 났다.
어쩌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걸수도 있었고.
대신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금제가 발동했음을 알려주는 통증이었다.
아까처럼 대놓고 떠올린 건 아니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까보다 한결 덜한 통증을 느끼며 침대에다가 머리를 파묻었다.
그리고는 일부러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당면해있는 과제가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시급한 게 있었다.
다름아닌 레이시아에 관한 것이었다.
모습을 드러낸데서 그치지 않고 나와 접촉하려다가 불발에 그쳐버렸으니 아마 지금쯤 그녀는 몸이 많이 달은 상태일 거다.
그런만큼 나와 다시 접촉하려 할 것이고.
그래도 결승전이 코앞인데 일단 그것부터 어떻게 하고 나서 접촉을 하든 뭘 하든 하지 않겠냐고?
'글쎄..'
지금 그녀가 과연 그런 걸 신경쓰기나 할까?
솔직히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때 복도에서 얼핏 봤던 레이시아의 모습은 이성이나 냉철함같은 단어하고 거리가 많이 멀어보였으니까.
하물며 이미 한 번 좌절당하지 않았던가?
이성이 더 흐려졌으면 흐려졌지 나아지지는 않았을 터.
딱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무투대회 참가자들의 눈치를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적막에 휩싸여있던 숙소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창문이나 벽같은 것을 통해 들려오는 그 소란을 인지한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레이시아가 이곳에 당도했다는 걸.
'거참..'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만..
공교롭기 그지없는 타이밍에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다가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침대 옆에 자리하고 있는 창쪽으로 향하니 과연 숙소로 통하는 출입구 앞에 서서 많은 이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숙소로 합류한 레이시아가 이끌고 온 일행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촐했다.
그녀를 포함해 세 명이 전부였으니까.
개중에 한 명은 그녀의 사저에서 생활할 때 종종 본 적 있는 익숙한 얼굴의 시녀였고, 다른 한 명은..
'음..'
처음보는 것이 분명함에도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얼굴을 하고 있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개중에서도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녀의 하늘빛 눈동자였다.
내가 아는 누군가의 것하고 꼭 닮아있는 색의 눈동자를 목도한 순간 깨달았다.
'저 사람이구나.'
디아나가 말도 없이 급하게 자리를 비웠던 날 그녀로 하여금 시무룩한 표정을 짓게 만든 장본인이 저 중년의 여성이라는 것을.
그녀의 정체는 아마도.. 디아나의 어머니겠지.
금발은 아버지 쪽 유전이었는지 디아나하고는 달리 갈색머리를 하고 있어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는데 보면 볼수록 확신할 수 있었다.
닮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니까.
디아나가 이대로 별탈없이 20살 정도를 더 먹고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다면 대충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근위대장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분명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근위대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왕의 옆에 붙어있지는 못할 망정 외국으로 출장이라니.
뭐, 덕분에 내일 레이시아의 걱정은 상대적으로 덜해도 될 것 같았다.
근위대장쯤 되면 칼질로는 사실상 왕국 내에서 최고라는 소린데 그런 이가 레이시아의 옆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면 그녀를 위협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테니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뒤늦게 소식을 접한 건지 우리 측에서 인솔역을 도맡은 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레이시아를 환대했다.
개중에는 클레어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레이시아를 향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보인 클레어가 이내 디아나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던 이를 향해 다가서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제법 친근해보이는 둘의 모습에 다시 한 번 확신했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예전에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기라도 했던 걸까.
제법 친근해보이는 둘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니 딱딱하기 그지없던 표정을 잠시 풀고 미미하게나마 미소를 머금은 채 클레어를 상대하고 있던 디아나의 어머니가 대뜸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더니 그대로 고개를 홱 돌려서 내쪽으로 시선을 던져대는데 얼떨결에 몸을 뒤로 뺀 덕분에 어찌어찌 눈이 마주치는 것까지는 피했지만 솔직히 좀 찔끔하긴 했다.
'아니, 뭔 놈의 눈치가..'
저 정도면 거의 짐승 수준 아닌가?
아니, 짐승도 저보다는 덜할 거다.
대놓고 쳐다본 것도 아니고 중간에 창문이라는 거름막이 버젓이 존재했는데도 이걸 바로 눈치까고 이쪽을 향해 시선을 던져올 줄이야.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며 벌렁거리는 심장을 달래고 있으니 환영인사가 얼추 끝이 났는지 레이시아가 마중을 나온 이들의 시중 아닌 시중을 받으며 숙소 안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출입구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준비를 좀 하고 있어야겠네..'
이곳보다 몇 배는 편한 기존 숙소를 버리고 굳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
어떻게든 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뜻일테니까.
직접 찾아오든 사람을 보내든 간에 분명 어떤 식으로든 기별이 있을 터.
그때를 위해서라도 준비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물론, 여기서 준비란 단장같은 걸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건 지금 상황하고 어울리지 않으니까.
'컨셉을..'
어떤 식으로 가져가는게 좋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부분을 결정하는 게 가장 시급했다.
해서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기본으로 가기로 했다.
때로는 정석적인 것이 더 잘먹히는 때도 있는 법이니까.
창문가를 떠나 방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건 그래서였다.
기본적으로 기숙사 비스무리한 역할로 쓰이던 곳이었다보니 개인에게 배정된 방의 크기는 그리 넓지 않았다.
생활하기에 불편한 정도는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움직이기에는 이래저래 걸리적거리는 게 많은 수준이라고 해야할까.
그렇기에 본격적으로 준비에 착수하기에 앞서 방해가 될만한 것들부터 치울 필요가 있었다.
드드드득-
우선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접객용 테이블과 거기에 딸린 소파들을 벽까지 밀었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자그마한 공터에 엎드린 뒤..
천천히 팔굽혀펴기를 하기 시작했다.
굳이 무리할 필요없이 적당히 땀만 나오면 됐기에 중간중간에 적당히 휴식을 취해가며 내일 있을 결승전을 위해 다른 생각같은 건 하지 않고 한창 컨디션을 끌어올리는데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 같은 모습을 꾸며내고 있자니..
똑똑-
기다려마지 않았던 소리가 방 안으로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