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디아나와 소원권에 관한 고찰은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말하는 뉘앙스를 보면 준비가 끝나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 했으니까.
특히나 마음의 준비라는 걸 끝내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거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그럴 수밖에 없다.
사안이 사안이니까.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선 디아나로서도 많은 결심이 필요할 터.
심지어 그녀는 그날 만났던 상대를 꽤나 어려워하는 듯 했다.
그러니 더더욱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 거다.
모르긴 몰라도 디아나가 날 상대로 소원권을 사용하는 건 교류전이 끝나고 난 후가 되지 않을까.
고로 지금은 언제 닥쳐올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는 당장 내일 모레로 예정되어 있는 결승전에 대해서 생각할 때였다. 그런 일은 거의 없겠지만 만에 하나 거기서 패배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골치가 많이 아파질테니까.
"먹혔을까요?"
바로 옆에서 걷고 있던 디아나를 향해 그런 질문을 던졌던 건 그래서였다.
서로 머리를 맞대는 편이 혼자서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봤으니까.
헌데 이게 왠걸?
디아나는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 으, 응?"
한 발 늦게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필시 그랬던 거겠지.
흡사 범행현장이라도 발각당한 사람처럼 당황하는 걸 보면 소원권을 가지고 할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길래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코앞까지 들이닥친 것부터 해결하고 보자는 의미로 그녀를 향해 살짝 주의를 주었다. 집중하라는 의미였다.
"저희 노림수 있잖아요."
"아, 그.. 가짜 대장 작전?"
헌데 생각한만큼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누가 들을지도 모르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작전의 이름을 입에 담는 걸 보면.
이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 있다면 나와 디아나를 이곳까지 데려올 때처럼 우리 옆으로 따라붙으려 하던 진행요원을 진작에 떨어뜨려놨다는 점이었다.
주변에 딱히 인적도 없었고 말이다.
그러니 방금 걸로 인해 우리 측의 작전이 새어나간다거나 그런 개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
그래도 주의를 줄 필요성은 있을 것 같았다.
운 좋게 주변에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공들여 세운 작전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갈아엎어야 했을 수도 있었으니까.
쉿-
"조심하셔야죠. 누가 들을지도 모르는데."
해서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와 함께 주의를 주니 그제서야 좀 정신이 들었던 모양이다.
살짝 찔끔한 듯한 표정과 함께 디아나가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방금 내가 꺼내들었던 화제로 잽싸게 합류했다.
"확신하기는 힘들지만 아마 통하지 않았을까? 사람은 보이는 것에 많은 영향을 받으니까.."
그게 디아나의 의견인가 보다.
그런 그녀의 의견은 내 추측하고도 어느 정도 합치하는 바가 있었기에 동의한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면 추측이라기 보다는 소망이나 바람에 가깝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걸려들 가능성이 크긴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디아나가 보여준 모습이 그만큼 압도적이었으니까.
그 광경을 제국 측 참가자들도 분명 봤을텐데 그걸 보고 기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이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필시 타고난 의심병 환자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 측의 노림수가 먹혔다고 가정하고 세부적인 틀을 짜올리는 게 맞겠지.
"선봉으로 누가 나올까요?"
"음, 글쎄.. 아마 그 파란 녀.. 성분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년이라고 하려다가 내 눈치를 봐서 급하게 선회한 게 눈에 훤히 보였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넘겼다. 지금 그런 건 중요치 않았으니까.
"전력가늠 용으로요?"
"응."
역시나 디아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말에 즉시 고개를 끄덕인 걸 보면 확실했다.
이미 출전해서 어느 정도 제 능력을 드러낸 바 있는 두 명과 대장일 게 분명한 바이올라를 제외하면 저쪽에서 베일에 쌓여있는 건 한 명밖에 없었다.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제국 쪽에서 선봉에 적합한 특징을 가진 건 그 슬라임녀 뿐이었다.
교류전에서 선봉은 야구로 따지면 리드오프, 쉽게 말해 1번타자와 같다.
그런만큼 투수의, 그러니까 우리 측에서 상대랍시고 내보낸 이의 전력을 보다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함과 동시에 거기서 그치지 않고 승리를 따낼 능력또한 지녀야만 한다.
그 점을 고려하면 교국과의 경기에서 차봉으로 나섰던 이보다는 슬라임녀 쪽이 차라리 선봉에 어울렸다.
당시 차봉으로 출전했었던 이는 교국 측의 부장과 대장을 연달아 꺾을 정도로 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긴 해도 특징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으니까.
강한데 밋밋하달까.
자꾸 야구하고 비교하게 되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한데 나설 때마다 무난하게 이겨주는 불펜 투수같은 느낌이었다.
뛰어난 것과는 별개로 인기가 없을 것 같은 타입이라고 해야할까.
그러니 그 밋밋한 타입보다는 슬라임녀가 선봉으로 나서게 될 가능성이 컸다.
뭣보다 제국 측 입장에서 보면 둘은 이미 드러난 전력이다.
끝까지 내지 않고 꽁꽁 숨긴 것에 비하면 파괴력이 상대적으로 덜할 수 밖에 없으니 제국 측으로서도 그들을 소모하는데 있어 거리낌같은 게 별로 없을 터.
그렇다고 그만한 카드를 아무 의미없이 소모하기도 그럴테니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먹으려 할 것이다.
그게 바로 슬라임녀 선봉과 밋밋녀 차봉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될 가능성이 컸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해야할까.
우리 측도 어느 정도 전력이 드러난 상태인 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제국 측하고 상황이 완전히 같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디아나야 그녀가 우리 측의 대장처럼 보일 수 있도록 착각을 유발하기 위해 일부러 전력을 드러낸 것이고, 진은 그게 정말 그녀의 전력이었는지 나조차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진이 정말 전생의 그 성녀가 환생한 거라면 가진 바 능력이 고작 그것 뿐일리 없으니까.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그녀는 괴물이었다.
그런 단어를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라는 의미일 뿐,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그녀는 말하자면 표본과도 같았다.
그러니까 한 세계를 다스릴 정도로 지고한 신성을 지닌 신의 애정이 한 명의 인간에게 오롯이 퍼부어지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시라고 해야할까.
본인이 그걸 폭력적으로 활용하질 않아서 그렇지 아마 그녀가 남을 해치는데 있어 조금이라도 더 적극적이었고, 공격 쪽에 약간의 재능이라도 있었다면?
인류의 존폐가 걸려있는 최후의 전쟁 당시에 마물과 마족이라는 놈들이 그렇게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남들은 여럿이 힘을 합쳐야 간신히 시전할 수 있는 최고위 성법을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었던 게 바로 전생의 그녀였으니까.
덕분에 그 덕을 톡톡히 본 적도 꽤 많았다.
공격 쪽 성법에 재능이 거의 없어서 공세를 펼칠 때는 거의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전투에서 밀려서 퇴각할 때는 그녀가 펼친 성법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했으니까.
그렇게 온존한 전력을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펼치려했던 것이 바로 최후의 결전이었고 말이다.
'정작 용사란 새끼가 빤스런을 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아쉽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내가 여태껏 거쳐왔던 모든 회차들 중에서 가장 '끝'에 가까웠던 순간이 바로 그때였으니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찌 확신할 수 있겠냐만은 만약 주인공이라는 새끼가 도망만 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나는..
"이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상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온 의아함이 듬뿍 담긴 음성 때문이었다.
자연스레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마 디아나 입장에서는 꽤 황당하지 않았을까.
바로 조금 전까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상대가 갑자기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대뜸 심각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한채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꼴이었을테니까.
그래서 그런 지는 몰라도 얼굴로 날아와 꽂히는 디아나의 눈빛 속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 의아함만큼이나 짙은 것이 바로 걱정이라는 감정이었고.
설마 내가 인상을 찡그린게 결승전을 걱정해서 그런 거라고 본 것일까.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너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차례까지 갈 일도 없게 할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내 손을 꼬옥하고 잡으며 저리 말하는 걸 보면 분명 그런 거겠지.
진지하면서도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는 디아나를 상대로 이제와서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것 때문이라고 말을 하기도 좀 그래서 입을 여는 대신 양쪽 입꼬리를 잡아당겨 애매하게 웃어보였다.
그러다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혹시 선봉으로 나서는 건 어떻겠냐고.
"그럼 혹시 선봉은 어떠세요?"
그랬더니 당황하더라.
"응? 선봉?"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원래 우리의 계획은 디아나를 최대한 앞순서에 내보내 그녀가 대장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을 게 분명한 제국 측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허나 그 앞순서에 선봉 자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빨리 나서봐야 차봉으로 나설 예정이었으니까.
거기까지가 우리가 합의했던 내용이었는데 그게 갑자기 변경되어버리니 놀란 모양.
그렇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 계획을 세웠던 건 제국 측의 전력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할 때였으니까.
헌데 이제는 편린이나마 알게 되었으니 당연히 그에 맞춰 계획또한 변경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선봉자리를 제안한 건 그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니 슬라임녀를 상대할만한 이가 마땅치 않았으니까.
특히나 원래 선봉에 서게될 예정이었던 앨리스는 슬라임녀와 상성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앨리스의 장점은 뭐니뭐니 해도 특유의 가벼운 몸놀림을 십분 활용해서 벌이는 히트앤 런 방식의 전투를 펼칠 때 가장 크게 도드라지는데 슬라임녀가 상대라면 그녀가 거리를 벌릴 때 견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비도술이 무용지물로 전락해버릴 가능성이 크니까.
기껏 손목 아프게 비도를 던지면 뭘하겠는가.
치명상을 입히기는 커녕 의미없이 비도를 낭비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텐데 말이다.
그 사실을 앨리스라고 해서 모르진 않았는지 저번에 슬라임녀가 선봉으로 나섰을 때 그녀는 슬라임녀를 보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디아나는 어떨까?
디아나는 이미 슬라임녀를 상대로 자신감을 드러낸 바 있었다.
그녀의 성격이 허튼 말을 하지 않는 성격임을 고려하면 실제로 자신이 있다는 뜻일테지.
그러니 선봉으로 디아나가 나서는 게 맞았다.
그녀가 선봉으로 나서서 슬라임녀의 뚝배기를 터뜨려버리기만 한다면 우리 측 전력을 파악해보겠다는 상대 측의 초반 전략을 분쇄하는 건 물론 차봉까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테니까.
설령 디아나가 적의 차봉을 꺾지 못한다 하더라도 문제될 건 없었다.
그리되면 앨리스를 내보내면 되니까.
오늘 보여준 게 있다보니 디아나가 고작 두 번째만에 나가떨어지는 경우는 쉬이 상상이 되지 않긴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혹시 또 모르는 거니까.
혹시나 디아나가 제국 측 차봉하고 붙어서 패배한다 하더라도 허무하게 그냥 패배할리는 없으니 적의 체력은 크게 소모되고 난 후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앨리스가 출전한다면?
아마 체력이 크게 소모된 상태의 적은 앨리스를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급급해 제대로된 공세를 펼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상성도 썩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그 밋밋녀가 차봉으로 나선다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긴 하다.
그렇지만 사실상 상극이나 다름없는 슬라임녀보다는 밋밋녀 쪽이 백배천배 나은 게 사실이기도 했다.
밋밋녀쪽은 어찌보면 디아나의 하위호환같은 느낌이라서 앨리스가 침착하게 경기를 풀어나가기만 한다면 어렵지 않게 승리를 따낼 수 있는 타입이었으니까. 심지어 지치기까지 한 상태라면 말할 것도 없었고.
'뭐, 이건 안 풀렸을 때의 이야기고.'
잘 풀리기만 한다면?
선봉으로 나선 디아나가 적의 선봉과 차봉을 잡아먹은 뒤 그 뒤까지도 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베일에 쌓인 세 번째 참가자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잘만 하면 그녀를 넘어서 대장인 바이올라까지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