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승자는 디아나 앨런 경입니다! 멋진 경기를 보여준 그녀에게 환호와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성기사단 출신일 거라는 내 추측답게 디아나가 보여준 압도적인 무력에 감화되기라도 한 모양이다.
경기의 시작을 선언할 때보다 한층 더 우렁찬 목소리로 디아나의 승리와 우리 쪽의 최종 승리에 대해 말하는 진행자의 얼굴에는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심이라는 게 듬뿍 담겨있는 진행자의 선언에 호응하듯 대회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이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디아나의 얼굴은 찌푸려진 채로 펴질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문득 웃음이 나왔다.
얼굴을 살짝 구긴 채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것이 엄마가 장난감을 안 사줘서 삐진 꼬맹이를 생각나게 했으니까.
어찌보면 주머니 안에서 방치되어 꼬깃꼬깃하게 구겨진 지폐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정도로 무대 위에서 내려오는 디아나의 표정에는 불만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누가 보면 진 줄 알겠네.'
그것도 그냥 진게 아니라 진행을 맡은 이의 오심 때문에 억울하게 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표정은 게이트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날 발견한 뒤로 한층 더 심화되었다.
내 얼굴을 보니 고작 몇 분 차이로 놓쳐버린 소원권의 존재가 그녀의 안에서 한층 부각되기라도 한 모양.
뭐, 그런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나와 가까워질수록 새로운 표정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으니까.
시무룩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내 눈치를 살피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그녀가 왜 내 눈치를 보나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진 것도 아니고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상대로 나온 세 명을 말 그대로 쳐부수지 않았나?
그래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디아나가 저렇게 내 눈치를 보는 이유를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말은 5분안에 끝내고 돌아올 것처럼 하고서 자신만만하게 출전했는데 정작 까고 보니 5분은 커녕 나름 넉넉한 편이었던 15분의 시간제한에도 맞추질 못했으니까.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던 디아나로서는 그랬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민망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랬을 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기고 온 사람이 저렇게 내 눈치만 보고 있으니 살짝 안쓰럽게 느껴지긴 했다. 얼굴에 달고 있는 생채기같은 상처 때문에 더 그랬다.
민망해서 선뜻 내게 다가오지는 못하고 게이트 입구 쪽에서 슬금슬금 움직이는 식으로 거리를 좁히고 있던 디아나를 힐끔 훔쳐보다가 속으로 피식 웃으며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오바되지는 않은만큼 내가 게이트 근처를 떠나지 않고 있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예상했지만 설마 내쪽에서 먼저 자신을 향해 다가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걸까.
내 접근에 대해 알아차린 디아나가 퍽 격렬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도망이라도 치려는 것처럼 벽에 찰싹 달라붙는 식으로 말이다.
그 모습을 보니 다시 한 번 웃음이 나왔다.
도망칠거면 제대로라도 치던가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으니까.
뭐, 덕분에 나야 좋았다.
그녀가 스스로 코너에 몰려준 덕분에 걸음을 재촉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앞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문제는 지금부터인데..'
기껏 멋진 모습을 보여줘놓고서는 시간제한을 못 지켰다는 것 때문에 시무룩해하는 이 여자를 대체 어떻게 달래면 좋을까.
상황이 워낙 특이하다보니 답을 내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설령 내가 여기서 '그래도 이겼으니까 소원권 드릴게요.'라고 말한들 디아나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자존심때문에라도 그럴 수밖에 없겠지.
'어쩐다..'
해서 잠시 고민하다가 모르쇠 작전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통할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으이구..'
칠칠맞게 다치고 돌아오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해줬을텐데 말이다.
고운 얼굴에 보란듯이 생채기가 나 있으니 신경이 안 쓰일래야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오셨어요?"
아무튼 일단 모르쇠 작전으로 나가기로 했으니 그걸 그대로 행동에다가 녹여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저 그녀가 승리하고 돌아온 것이 기쁘다는 것처럼 벽을 등지고 서 있는 디아나를 향해 한걸음 다가서며 그녀를 향해 슬며시 웃어보였다.
그랬더니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것이 참 가관이었다.
벽에 몰린 채로 몸을 크게 움찔거리는 것이 흡사 못 볼 거라도 목도한 듯한 사람의 그것이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말을 이어나갔다.
"멋있었어요."
쪽팔리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한 와중에도 칭찬만큼은 듣기 좋았던 걸까.
모처럼 제대로 된 반응이 디아나에게서 튀어나왔다.
뺨을 순식간에 발갛게 물들여버린 홍조와 순간적으로 위를 향해 치솟은 입꼬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그 반응이 드러난 건 말 그대로 잠깐에 불과했다.
너무 기뻐하는 티를 내는 것도 좀 그렇다고 본 건지 위를 향해 치솟았던 입꼬리가 움찔하고 떨리더니 다시 내려앉았으니까.
그 잠깐의 틈이면 충분했다.
동요라는 이름의 늪에 발목이 잡혀버린 디아나가 멈칫한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갑작스럽게 뻗어오는 내 손을 보고 대체 뭘 상상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디아나가 보여준 대응은 눈을 질끈 감는 것이었다.
설마 내가 자길 때리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에이,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그 따위 쓰레기 짓거리 해본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눈을 꼭 감은 디아나의 볼 위에다가 손을 올린 뒤 그곳에 실금처럼 난 생채기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훑었다.
"읏..!"
그제서야 쓰라림을 느끼기라도 했나 보다.
디아나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일그러졌다.
실망감 때문에 오랫동안 자각치 못하고 있었던 쓰라림이 꽤나 따끔했던 모양이다. 디아나의 눈살이 한껏 찡그려진채 파르르 경련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그녀로 하여금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빨리 끝내라는 말이었지 다치고 돌아오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물론, 속상해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효과?
말할 것도 없이 확실했다.
속상해 죽겠다는 것처럼 디아나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그리 내뱉은 순간 간신히 원래 색을 되찾아가던 그녀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터질 듯이 달아올랐으니까.
새하얀 얼굴이 벚꽃을 생각나게 하는 분홍빛으로 물든 것이 퍽 사랑스러운 모습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상처를 훑은 탓에 빨간 자욱이 그대로 남아있던 손가락을 충동적으로 입쪽으로 가져갔던 건 다름아닌 그것 때문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뭔가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게 손가락 끝에 묻은 걸 조심스레 혀로 훑으니 그 모습이 디아나가 보기에는 뭐랄까 굉장히 야릇하게 보이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만취한 사람마냥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채 내 얼굴을 홀린 듯 들여다보는데 숨이 좀, 많이 거칠었다.
그대로 날 덮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아마 이곳이 앞뒤로 탁 트여있는 복도가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는 숙소같은 곳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을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디아나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저대로 상처를 방치해두면 흉이 질게 뻔하니까.
고운 얼굴에 그런 게 남도록 할 수 없진 않겠는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을 한채 오도카니 서 있던 디아나의 손을 잡고 한쪽으로 이끈 건 그래서였다.
대기실로 가면 카트린느가 우릴 위해 특별히 내어준 비상약이 있으니 임시방편으로나마 그거라도 발라놓으면 좀 안심이 될 것 같기도 했으니까. 효과 하나만큼은 확실한 것이 카트린느의 약들이니 분명 그럴테지.
참으로 다행히도 디아나는 내가 순순히 이끄는대로 끌려왔다.
보아하니 아직 살짝 가출했던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모양.
언제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냐는 듯 헬렐레한 얼굴을 한채 날 따라 움직이는 디아나를 데리고 걸음을 옮기다가 막 생각났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그녀의 얼굴에 난 생채기에 집중한답시고 아직 정산하지 못한 게 하나 남아있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까.."
걸음을 옮기다 말고 갑자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운을 떼는 내 행동에서 무언가 불안한 예감같은 받은 것일까.
혹시라도 내 손을 놓칠세랴 살짝 힘이 들어가 있던 디아나의 손이 움찔하고 떨렸다.
손바닥 위에 얹어져있던 그녀의 손가락을 통해 전해져오는 그 떨림을 느끼면서 말을 이어붙였다.
"그.. 죄송해서 어쩌죠?"
"..으, 응?"
그 순간 디아나의 입술을 뚫고 튀어나온 것은 살짝 놀란 듯한 반응이었다.
설마 내가 사과를 할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걸까.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법 또렷하게 전해져오는 동요라는 반응을 느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 왜 있잖아요. 저희끼리 내기했던거."
그녀를 시무룩하게 만들었던 내기에 대해 언급하니 그녀는 다시 한 번 동요를 내보였다.
그럴 수밖에.
그녀 입장에서는 내가 말이 없어서 유야무야 잘 넘어가는 듯 했는데 딱 그 타이밍에 이 이야기가 나온 셈일테니까.
당연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15분이었죠? 저희가 내기로 했던 게?"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이번에도 돌아온 반응은 비슷했다.
아니, 어찌보면 전의 것들보다 더 큰 것 같기도 했다.
1분 차이로 소원권을 놓친게 그리도 원통했던 걸까.
어느 정도 미련을 놓았을 게 분명한 지금 생각해도 아깝게 느껴지는 건 매한가지였던 모양인지 내 손바닥과 맞닿아있던 그녀의 손가락이 바쁘게 꼼질거렸다.
손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그 근질근질한 감각을 만끽하면서 디아나를 향해 표정을 찌푸려보였다. 뭔가 곤란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나름대로 공을 들여서 그리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좀 다르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꿀꺽하고 침 넘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거칠게 흔들렸다.
동시에 긴장감이라는 것이 나와 그녀 사이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전적으로 디아나의 표정 때문이었다.
"제가 한 6분 정도까지는 확인했었는데.."
허나 그런 그녀의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중간에 시간 체크하는 걸 깜빡해버려서.."
그리 말하며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멋쩍은 미소와 함께 뒷통수를 긁적이며 면몫없다는 모습을 연출해보인 순간 언제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냐는 듯 디아나의 눈이 반짝하고 빛을 내뿜으며 그녀의 얼굴 위로 화색이라는 것이 감돌기 시작했으니까.
시시각각 일어나는 그러한 변화를 눈에 담으며 하던 말을 마무리했다.
대충 시간 체크를 깜빡한 건 내 잘못이니 이번에는 그냥 내가 진 걸로 하겠다는 식의 발언이었고, 그 발언을 접한 디아나의 얼굴은 뭐랄까.. 전과는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눈에 띄게 밝아졌다.
물론, 완전히 밝지만은 않았다.
제한시간을 넘긴 시점에서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얻게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쁘긴 한데 제한시간을 어긴 건 분명한 사실이니만큼 내심 양심에 찔렸던 모양.
그러한 감정이 그녀의 얼굴에도 고스란히 묻어나왔고, 덕분에 표정이 굉장히 묘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나는 내 제안을 무른다거나 그러진 않았다.
이렇게라도 소원권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반응이 그렇다보니 의문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었다.
대체 소원권을 가지고 내게 뭘 요구할 생각이길래 양심의 가책까지 외면해가며 저러나 싶었으니까.
'둘만의 오붓한 데이트?'
고작 그것 일리는 없겠지.
뭘까.
대체 뭘 요구한 생각인 걸까.
정말로 솔직히 말하자면 짐작가는 것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딱 하나 있긴 했으니까.
그러니까 디아나가 무려 소원권까지 사용해가며 나와 하고 싶을만한 일이 말이다.
그리고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미리미리 준비를 좀 해둬야겠는데..'
아무래도 그래야할 것 같았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그래도 잘 보이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테니까.
디아나에게 있어서도, 내게 있어서도 필시 그렇겠지.
물론, 어디까지나 내 설레발일 수도 있었기에 본격적으로 준비에 착수하기 앞서 디아나의 의중을 살짝 떠보기로 했다.
떡줄 놈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나 혼자 착각해서 쌩쇼를 하는 꼴만큼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소원권으로 뭐 하시려구요?"
해서 미소와 함께 그리 물었는데..
"으, 응? 아, 그.. 나, 나중에! 나중에 준비되면 알려줄게."
돌아온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아무래도 내가 예상한 게 맞는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