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60)화 (259/366)



〈 26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핀포인트 도발의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확실했다.


'하긴..'


왕국 연합측으로서도 사양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자기네 차봉을 불과 몇초만에 꺾어버린  보고 디아나가 우리쪽의 실질적인 대장이라 판단했을텐데 그런 이가 휴식시간 따위는 필요치 않다는 듯 다음을 외치고 있는 상황이니까.


고작 몇  힘을 쓴 것 가지고 체력이 빠져봐야 얼마나 빠졌겠냐만은 아마 그게 어디냐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때로는 그 얼마 안 되는 차이가 승패를 갈라놓기도 하는 법이니 말이다.

고수와 고수의 싸움에서는 더더욱 그렇고.


'그나저나..'


지금까지는 오로지 레이시아에게만 허락되었던 소원권에 제대로 눈이 멀어 화려하게 저질러버린 디아나한테 정신이 팔려서 다른 곳을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와서 확인해보니 장외까지 날아가 벽에 처박혀있는 왕국 연합  차봉또한 돌로 이루어진 몸을 하고 있었다.

설마 왕국 연합측 참가자들은 죄다 저 종족인 걸까.

선봉에 이어 차봉까지 저 모양이니 어쩌면  번째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탁-

"본인 실력에 자신이 있으신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무례하시군요."

가볍게 땅을 밟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여태껏 등장했던 돌덩이녀하고는 여러모로 정반대에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니까 돌덩이녀들이 한없이 무거워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면 지금 나타난 이는 한없이 가벼워보인다고 해야할까.


대회장 안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바람들은 디아나와 마주보고 서 있는 여성의 몸 속으로 시시각각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연두빛의 반투명한 몸을 지닌 여성의 몸 주위로 먼지나 돌 부스러기같은 것들이 소용돌이치며 제법 위협적인 형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지금이야 소용돌이 치는 속도가 느려서 그렇지 만약  속도를 마음대로 조절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일 것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몸에 걸친 거라고 해봐야 좀 튼튼할 뿐인 천쪼가리가 고작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겠지.


가까이 접근하는 순간 옷이고 뭐고 저 살아있는 믹서기 속으로 빨려들어가 싹다 갈려버릴테니 말이다.

차라리 디아나가 나처럼 창을 사용했다면 그 리치의 우위를 십분 활용해서 소용돌이의 범위 내로 들어가지 않고 멀찌감치서 툭툭 견제를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을 노리는 식으로 풀어갈 수라도 있었을텐데..


'어떻게 하려나..'

꽤 흥미로운 상황인만큼 전회차 성녀에 대한 생각같은 건 잠시 접어둘 수 있었다. 그 상황이 내게는 퍽 기껍게 느껴졌다. 금제의 범위 안에 들어가는 생각을 아까 전부터 쉬지 않고 반복했더니 슬슬 머리가 반으로 쪼개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통증이 올라오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그게 얼굴 위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던 걸까.


"그.. 괜찮으십니까?"

나와 디아나를 여기까지 안내해주었던 교국 측 진행요원으로부터 걱정어린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거기에 대고 신경쓰지 말라는 의미로 손을 휘휘 저어보인뒤 다시금 디아나가  있는 현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디아나가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인 것처럼 상황을 묘사하긴 했지만 난 이미 디아나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디아나가 쌓아올린 무(武)는 호락호락한 수준이 아니니까.


그녀가 어떤 식으로 그것을 쌓아올리는지 옆에서 지켜봐왔기에 잘 안다.


소용돌이녀의 주변으로 흐르는 바람이 아무리 강해도 디아나가 일평생에 걸쳐 쌓아올린 것 앞에서는 산들바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런 식으로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상황을 묘사했던 것은 디아나가 자체 타임어택을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소용돌이녀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소용돌이녀는 5분이라는 제한시간 속에서 상당히 까다로운 상대로 거듭날 수 있는 포텐셜정도는 충분히 지닌 듯 했으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작정하고 도망만 다녀도 5분이라는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디아나에게 있어 최악은 5분이라는 시간제한이 존재한다는 걸 상대에게 들키는 것일 것이다.

뭐, 실제로 그리될 가능성은 많이 낮긴 하지만 말이다.


'자..'


그래서 디아나가 생각해낸 방법은 뭘까.

때마침 울려퍼진 시작 선언에 안력을 돋구니 소용돌이녀와 대치하듯 서 있던 디아나가 입고 있던 제복 상의 쪽으로 손을 가져가더니 그것을 그대로 잡아뜯었다.

세심하게 관리되어 휘황찬란한 황금빛을 사방으로 흩뿌리던 단추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렇게 자신이 입고 있던 정복 상의를 풀어헤치고 블라우스 차림이 된 디아나가 지탱해준 것을 잃고 꼴사납게 매달린 꼴이 되어버린 정복 상의를 반대로 뒤집더니 그대로  왼팔에다가 휘감았다.


'왼팔?'


팔을 보호할 생각이었다면 오른팔이 나았을텐데 오른팔을 제쳐두고 왼팔을 택한 이유가 뭘까.

그런 의문과는 별개로 정복 상의를 겹겹이 겹쳐서 방어력을 높인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아까도 말한 적 있지만 정복 상의는 옷 치고는 나름 두꺼운 편이니까.

그것이 겹겹이 겹쳐진다면?

소용돌이녀 주변으로 흐르는 삭풍이 아무리 거세어도 몇 분 정도는 충분히 버텨줄 터.


"어딜!"

물론, 소용돌이녀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뜬금없이 시작된 디아나의 탈의쇼에 벙찐 표정을 하고 있던 것도 잠시, 저대로 가만히 내버려둬선 안 되겠다고 판단한 건지 경계하던 태도를 집어던지고 그대로 디아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으니까.


역시나 몸 주변으로 흐르는 바람을 스스로의 의지대로 조종하는 게 가능했던 모양인지 소용돌이녀의 움직임에 맞춰서 대회장 안으로 울려퍼지던 바람소리가 조금씩 흉흉해졌다.


훙훙훙훙-


아마 빵같은  저 안으로 집어던지면 그대로 빵가루가 되지 않을까.

그러니 사람 피부 쯤이야 단번에 갈아버리고도 남겠지.


그런 삭풍을 휘감은 팔이 디아나의 얼굴을 노리고 쇄도했다.

저기에 휘말린다면?

디아나의 고운 얼굴은 생채기 투성이가 되어버릴 것이다.


다들 그러한 결과를 상상한 것일까.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일제히 눈을 질끈 감는 광경이 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뻗어져나간 소용돌이녀의 손이 디아나의 얼굴 바로 앞까지 접근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인지 팔보호대가 얼추 완성됐음에도 가만히  있기만 하던 디아나가 마침내 움직임을 보였다.


움직인 건 다름아닌 옷으로 꽁꽁 싸매둔 왼팔이었다.


턱-

소리없이 뻗어져나간 것이 그대로 소용돌이녀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와 함께 디아나의 얼굴 위로 번져나간 건..

"잡았다-"

진득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그것을 마주하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소용돌이녀가 바람의 출력까지 높여가며 황급히 잡힌 손을 빼내려했지만 디아나는 팔에 감아둔 정복 상의가 걸레짝이 되건 말건 움켜쥔 손을 결코 풀지 않았다.


흰색의 천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묵빛의 빛이 번뜩였다.

검이라기 보단 몽둥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 지상을 향해 떨어져내리는 운석과도 같은 궤적을 그리며 소용돌이녀의 어깨를 향해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퍼억하고 박같은 게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어억-"


디아나에게 잡힌 손을 빼내기 위해 지랄발광을 하던 소용돌이녀의 몸이 그대로 반으로 접혀버렸으니까.


그러더니 다시 일어서질 못하더라.


그렇게 적의 부장까지 깔끔하게 박살낸 디아나가 얼굴에 달라붙은 먼지를 손으로 슥 훑어내며 왕국 연합측 대기실을 향해 선언했다.

"다음."


쉬는 시간이고 뭐고 필요없이 바로 상대해줄테니 얼른 기어나오라고.


그런 식으로 패기 넘치는 모습을 선보인 디아나였지만, 참으로 애석하게도 5분은 커녕 15분의 시간제한도 지키기 힘들 것 같았다.

그녀가 선보인 패기에 눌려버린 것인지 아니면 디아나가 보여준 압도적인 강함과 그녀가 상대방을 도발까지 해가며 대련을 서두르려고 하는 이유 사이에 무언가 상관관계가 있을 거라고 판단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왕국 연합측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참가자가 대결의 속행을 거부했으니까.

심지어 바로 앞에서 건너뛰었던 것까지 추가해줄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우스운 건 진행을 맡은 교국 측에서 왕국 연합 측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었고.

디아나의 도발로 인해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른 건 좋은데 이대로 가면 대결이 너무 일찍 끝나버릴 것 같았던 모양.


덕분에 디아나의 꼭지만 돌아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분노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쉬는 시간인만큼 대기실로 돌아가서 편히 휴식을 취해도 된다는 진행자의 발언을 깔끔하게 무시해가며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는 식으로 말이다.

안 그래도 한창 달아오르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휴식시간이라는 찬물을 뒤집어 쓰게 되어 불만에 가득 차 있었던 몇몇 관객들이 디아나가 만들어낸 분위기에 편승했고, 군중심리라는 것에 휘말린 이들이 또 거기에 편승하면서 대회장 안은 졸지에 '여자'답지 않게 도발을 회피해버린 왕국 연합 측 참가자 겸 유일한 생존자를 성토하는 듯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우우우!! 젖 떼라!!"


"나가뒤져!!"


"눈치 없는 거 보니까 사귀는 남자도 없겠네!!"

군중심리라는  이럴 때 보면 참 무섭다.

누군가 선을 넘는 발언을 하면 그걸 듣고  수 없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발언의 수위를 올려버리니까.

꼭 마치 화구 위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뚝배기를 보는 것 같았다.


이대로 펄펄 끓다가 그대로 펑하고 터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고 해야할까.

뭐, 뜨거움만큼이나 효과도 확실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성토에 짓눌려버리기라도  것인지 아니면 차라리 빨리 져버리고 끝내버리는 게 그나마 덜 망신일거라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왕국 연합 측의 마지막 참가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끝까지 채우지 않고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너무 순진한  아닌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감상밖에는 들지 않았다.

나같았으면 이미 욕이란 욕은 실컷 먹은 상황인만큼 그게 억울해서라도 주최측에서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버텼을테니까.


이제와서 허둥지둥 기어나와봐야 그동안 제멋대로 늘어난 수명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닐텐데..

아, 혹시 윗선에서 압박을 넣기라도 한 걸까?


그만 욕멕이라고?


그런 거라면야 저렇게 허둥지둥 기어나온 것도 충분히 이해할  있었다.


지금 신나게 욕을 해대는 사람들이야 오늘 보고 말 년놈들이지만 그쪽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쓰잘데기 없는 지연 작전에 꼭지가 돌아가버려서 세기말 패왕으로 각성하기 직전인 디아나를 상대로 승리를 따낼 가능성은 전무하니 일단 윗선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건 확정인데 거기에 밉상짓까지 한다?

아마 앞으로 일주일밖에 못 산다는 말을 들은 시한부라도 그딴 짓은 안할 거다.


의사에게 들은 기한을  채우는 것보다 야심한 밤에 초대한 적 없는 손님이 숙소를 방문하는 게  빠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떠밀려 나온 건지 아니면 본인의 의지로 기어나온 건지  수 없는 왕국 연합 측 마지막 참가자는 그림자를 사람의 형태로 빚어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땅속성 바람속성 다음에는 암속성이냐..'

놀라운 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시커먼데도 이목구비만큼은 굉장히 또렷해서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코고 어디가 입인지 구분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몰라도 얼핏 보면 모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범인 캐릭터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  손목에 마취시계 차고 다니는 꼬맹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애니메이션 있지 않은가?

아무 것도 모르는 꼬꼬마 시절에는 범인 캐릭터만 나왔다하면 벌벌 떨기 바빴었는데 말이다.


대가리가 커질대로 커진 지금에 이르러 비슷한 걸 보니 무섭게 느껴지기는 커녕 우습기만 했다.

아무튼 그래서 앞서 나온 소용돌이녀는 바람을 제 몸처럼 다루는 모습을 보여줬었는데 말이다.

얘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시커먼  보면..'

그림자라도 조종하려나?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애석하게도 그걸 확인할만한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에 제대로 꼭지가 돌아버린 디아나가 진행자의 개전 신호에 맞춰서 왕국 연합측 대장을  그대로 묵사발을 내버렸으니까.

'어우..'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교국 측에서 대련용 철검이랍시고 쥐어준 저건 역시 철몽둥이가 맞았다는 걸.

그렇게 결승전과 3, 4위전 대진이 확정되었다.

디아나가 출전하고서 약 16여분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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