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59)화 (258/366)



〈 25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생각해보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명이 있긴 했다.


그러니까 내가 거쳐왔던, 안면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직자들 중에 방금과 같은 자그마한 접촉만으로도 저런 반응을 보일만한 이가 말이다.

다른 이들하고는 다르게 나고 자란 환경 자체가 굉장히 특수하다보니 이성하고 접촉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주어지질 않았던 사람.

그래서 이성에 대한 내성이 한 없이 제로에 가까운 사람.


바로 '성녀' 말이다.

정확히는 전회차에서 '성녀였던' 이라고 해야할까.

보통이라면 아무리 성녀 타이틀을 달고 있다 해도 평생 이성과 접하지 않고 살지는 않겠지만 전회차의 케이스는 조금 특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회차의 성녀는 수녀들 사이에서 나고 자랐을 뿐더러 본인을 상대로 쏟아지는 신의 애정을 자각한 시점에서 신의 곁으로 돌아갈 때까지 순결을 지키겠다는 순결의 맹세를 했던 몸이니까.

 반대급부로 얻게 된 것이 바로 역대 성녀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압도적인 신의 애정, 즉 신성력이었고 말이다.


'뭐, 그것도..'

병신같이 주인공이면 무슨 짓을 저지르든 결국 용서받을 거라 생각했던 애새끼 하나 때문에 다 망해버렸지만.


아마 그 애새끼가 그딴 말도  되는 짓을 벌이지 않았다면?


이미 다 끝나버린 판국에 이런 걸 상상해봐야 달라지는  물론, 아무 의미 없다는 것또한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혹시..'라는 말을 중얼거리게 되는 건 이런 경우 자체가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혼란스러웠다.

관리자라는 놈으로부터 짤막한 설명 하나만 듣고 이 세계로 내동댕이쳐졌을 때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고.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할까.

알  없었다.


내게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는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확신할 수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냥 믿기 싫은 거다.


주인공이라는 결고 대적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내게 앙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이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딱 잡아떼고 있지만 분명 나에 대한 원한이 적지 않을 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회차에서 그 사건, 그러니까 용사에 의한 성녀 강간 미수 사건이 터지고 난 직후 그 누구보다 용사라는 이름의 애새끼를 적극적으로 변호했던 사람이 바로 나니까.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런 내 행동을 보고 진정한 우정이니 뭐니 하며 되도 않는 쌉소리들을 지껄여댔지만 애초에 당시 내게는 선택지라고 부를만한 것 자체가 없었다.

마왕이라는 놈이 제 부하들을 이끌고 쳐들어오기 직전인데 마왕의 유일한 대적자이자 가만히 들고 있기만 해도 주변에 있는 아군에게 사기적인 버프를 걸어주는 성검의 유일한 사용자를 대신전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감옥 안에서 썩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면 마왕 모가지는 누가 따고, 태생부터가 다른 탓에 기본적으로 열세일 수 밖에 없는 전력은 누구 손으로 메꾼단 말인가?


그래서 성녀 편에 서 있는 인사들의 제법 따끔한 눈빛을 일일히 받아내가며 열심히 용사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했드랬다.


전쟁 준비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그런 식으로 구르고 또 굴러서 얻어낸 결과가 그 애새끼를 전선에 세워 과를 공으로 갚게하는 것이었고 말이다.

그랬었는데 최종전을 앞두고 그 애새끼가 냅다 날라버렸으니..


'생각할수록 빡치네.'


현실이 그러하니 아마 진이 정말 전회차 성녀가 맞다면 그녀 입장에서 나라는 작자는 당장이라도 찢어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을 원수가 아닐까.

자길 강간하려 했던 놈을 기를 쓰고 변호했던 놈이자 그 강간미수범의 친우인 셈이니 말이다.

뭐, 그것도 내 정체를 눈치챘을 때의 이야기긴 하지만..


아마 십중팔구 눈치챘을 거다.


전회차의 인물이 새로운 회차까지 따라붙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는 탓에 정체를 숨기기 위한 노력또한 해본  없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싸우는 모습이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전회차에서 백작 나으리일 때의 모습이 새로이 얻은 이안이라는 껍질 위로 고스란히 겹쳐져보였을테니 말이다.

'골 때리네..'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 의문인 점이 하나 있다면 진의 정확한 목적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추측한대로라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어 내 목을 내리쳐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 말이다.

급하게 건답시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걸려버리긴 했지만, 꽤나 고등한 수법인 금제까지 걸어가며 제 정체를 숨기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디아나나 레이시아같은 이들과 손을 잡고 뭔가를 획책하는 듯한 모습도 그렇고 행동거지가 묘하게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내가 주인공 자리에 앉게 되었다면 조심스러움같은 건 집어던지고 일단 칼부터 뽑고 봤을테니까.

그런 식으로 무턱대고 행동해도 얼마든지 수습이 되는 자리가 바로 주인공이라는 자리니 말이다.

아무리 주인공이 처음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을 모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에도 저렇게 조심조심 행동한다는 건..

둘 중에 하나겠지.

그래야만하는 이유가 있거나 아니면 뭔가를 착각했거나.

과연 어느 쪽이 정답일까.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궁금했다.


궁금해서 옆에서 걷는 진을 향해 시선을 던져봤지만 형편좋게 깨달음같은 게 찾아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응? 왜?"


대신 전방을 향하고 있던 그녀의 시선만이 내쪽으로 돌아왔을 뿐.


뭐라고 답을 해야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 돌덩이녀를 상대했던 소감에 대해 물어봤다.

"음.. 어떤 느낌이었냐고?"


"응, 멀리서 보는 거하고 직접 상대하는 건 느낌이 완전히 다르잖아?"


특히나 상대의 방어력같은 부분이 궁금했다 말을 하니 '으음..'하는 소리를 내며 잠시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얼굴 위로 내비치던 진이 이내 돌덩이녀의 타격감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말을 들으며 걸음을 옮기니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이미 출전 준비를 끝마칠 디아나였다.

"아, 왔어?"

우리가, 아니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팔짱을 낀채 묘하게 가슴을 부각시키는 듯한 포즈로 서 있던 디아나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졌다.

그러더니 묘하게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그새 또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줄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하도 이쪽의 눈치를 보다보니 착각을 안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착각했던 건 어디까지나 잠깐에 불과했고  눈치챌  있었다.

디아나가 왜 이렇게까지 내 눈치를 보는 건지를 말이다.


아무래도 그녀는 내 응원을 원하는 듯 했다.


어차피 이기는 건 확정이지만 그래도 응원을 받으면 더욱 더 힘을 낼 수 있을  같기라도 했던 걸까.


헌데 그런 걸 대놓고 요구하자니 뭔가  그랬던 모양이다.


응원해달라고 말은 못하고 애꿏은 손가락만 꼼지락대면서 열심히 내 눈치를 살펴대는데 솔직히  웃겼다.

덕분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금제를 억지로 무시한 여파로 아까 전부터 머리를 찔러오던 통증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맘같아서는 그 보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이래서야 극적이지가 않겠지.

민망하고 부끄럽다는 듯 얼굴 위로 애매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날아와 꽂히는 디아나의 시선을 억지로 외면했던 건 그래서였다.


어차피 해줄거라면 조금 극적인 편이 받는 입장에서도  기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응원까지는 무리고 게이트 앞까지 바래다 줄 수는 있다고 둘러대니 디아나 입장에서는 그거라도 어딘가 싶었나 보다.


얼굴  가득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즉시 고개를 끄덕이는데 덕분에 참가자용 게이트까지 그녀와 동행하게 되었다.

물론, 약간의 저항이 있긴 했다.


디아나를 안내하기 위해 찾아온 진행요원이 넌 또 뭐냐고 제법 따끔한 시선을 던져왔으니까.

옆에 있던 디아나의 손을 조심스레 움켜쥐니 언제 그런  던졌냐는 듯 금세 거두어가긴 했지만.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렇게 앞서 걸어가기 시작한 진행요원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보니 알게 된 것은 디아나가 조금 다른 의미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손 하나 잡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걸음을 옮길수록 그녀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가며 몸이 무슨 각목마냥 뻣뻣해지더라.

이대로 가면 경기에 대한 긴장 때문이 아니라 나로 인한 긴장 때문에 경기를 그르칠 것만 같아서 그대로 손을 놓으려 하니 그건 또 싫으시단다.


손을 빼려 하기 무섭게 디아나의 손이 내 손을 꼬옥하고 움켜쥐어 그대로 제 손아귀 안에다가 고정시켰다.

'허..'


그럴 거면 긴장이라도 하질 말던가.

이게 뭐하는 건가 싶어서 속으로 허허로이 웃고 있자니 어느덧 무대로 통하는 게이트의 끝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무대까지 이대로 손 꼭 잡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제는 이만 헤어져야할 시간.


손을 놓는 것이 그리도 아쉬운지 나라라도 잃은 듯한 표정을 한채 조심스레 손에 힘을 푸는 디아나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발뒤꿈치를 들어올렸다.

내가 볼  응원의 말을 전하기에 이만큼 극적인 타이밍이 또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그녀의 귀와 내 입을 일직선상에 놓은 뒤..

"남은  총 세 명이었죠? 한 명당 5분씩 딱 15분만 기다릴게요."

디아나의 귀에 대고 그 말을 속삭였다.

묘한 뉘앙스를 주기 위해서 나름대로 목소리까지 조절해가며 그리 내뱉었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같았다.

저렇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면.


그래서 조금 더 힌트를 주기로 했다.

"15분이 되기 전에 돌아오면 소원 하나."

솔직히 말하자면 원래 생각하고 있었던 건 키스였다.


그걸 소원으로 바꾼  그래도 역시 키스보다는 소원 쪽이 좀 더 불타오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물론,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확실했다.

내 입에서 소원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온 순간, 디아나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그녀가 입술을 앙 다물었으니까.


무언가 중대한 결정같은 거라도 내린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더니..

"5분 안에 돌아오면?"


 상태로 씩 웃으며 추가 협상까지 시도하는게 아닌가?

5분이라.


한 판이라면 모를까 세 판을 5분안에 끝내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경기장이 워낙 크다보니 저쪽 참가자들이 무대 위로 올라오는데 걸리는 시간만 다 합쳐도 5분이 넘을테니까.


 사실을 디아나라고 해서 모르지 않을텐데 굳이 5분을 말한  그만큼 자신 있다는 소리겠지.

그렇다면 당연히 거기에 어울려줘야하지 않겠는가?


"음, 글쎄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는 걸로?"


그리 말하며 발뒤꿈치를 조금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는 오늘따라 한층  말랑말랑해보이는 그녀의 볼이 눈으로 들어온 순간 그대로 그곳에 입을 맞췄다.

쪽-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소리가 볼에 가져다 붙였던 입술을 떼어내는 타이밍에 맞춰서 우리가 서 있는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건 선금이에요."

이 이상을 원한다면 말한대로 5분 안에 끝내고 돌아와라.

그런 의미로 말했던 것이었고, 선금까지 치룬 대가는 확실했다.


어찌보면 일생일대의 결전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을 눈앞에 두고 염장질을 해대는 나와 디아나의 모습이  보기 싫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 디아나가 나갈 차례가 되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멀찌감치 물러나있던 진행요원 측의 재촉에 디아나가 그대로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고, 그렇게 그녀가 환하게 빛나는 게이트를 통해 복도를 빠져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소리들로 시끌벅적하던 바깥이 쥐라도 죽은 것마냥 조용해졌으니까.


갑작스레 내려앉은 그 침묵의 존재를 자각한 순간 직감했다.

차봉끼리의 대결이 끝나버렸다는 것을.

"스, 승자. 디아나 앨런."

아니나 다를까 바로 조금 전에 우렁차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차봉전의 시작을 알렸던 진행자가 얼떨떨함이 가득 배인 목소리로 디아나의 승리를 '선고'했다.


'이제  1분 정도 됐으려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5분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다음!!!!!"


디아나가 휴식을 이야기하던 진행자의 목소리를 그대로 잘라내며 왕국 연합측 참가자들을 향해 도발을 시전했다.

"나와."

그쪽 대기실을 향해 보란듯이 손가락을 까닥거리기까지 하면서.


'오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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