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58)화 (257/366)



〈 25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허술함과는 별개로 성능 하나만큼은 제대로 된 놈인가 보다.

잠깐 무시했을 뿐인데 이렇게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마치 누군가 내 머리에 대고 도끼질이라도 하는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견디기 쉽지 않은데 어지러움까지 이때가 기회랍시고 달려드니 당장이라도 픽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머리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벽을 손으로 짚었던 건 그래서였다.

"후.."


그래도 머리를 비우고 심호흡을 몇 번이고 반복하니 어지러운 건 그나마 좀 나아지는 것 같긴 했다.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은 여전하긴 했지만.

'남의 머리에다가 무슨 짓을 해놓은 거야..'


그래도 이 정도면 길가다가 갑자기 픽 쓰러질 일은 없을  같아서 다시금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생각해봤다.

왜 하필이면 이런 식의 금제를 걸어두었는가 하고.

"윽..!"


금제를 발동시키는 트리거가 사제, 혹은 수녀라니.

 말인 즉슨 내가 자길 보며 그러한 단어들과 관련된 무언가를 떠올리는 걸 막고 싶었다는 뜻일텐데 솔직히 말하자면 '굳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으니까.


그걸 숨기려 했던 이유도 이유지만, 그래봐야 이미 전생의 일일뿐인데 말이다.


남한테 이런 식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허술하기 짝이 없는 금제까지 걸어가며 황급히 숨길 필요가 있었나 싶었으니까.

딱 거기까지 도달한 순간이었다.

여태까지는 그러한 경우를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었기에 이전까지는 떠올리지조차 못했던 가능성 하나가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그 가능성이 머리를 스친 순간, 일단 부정부터 하고 봤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앞서 말했듯 그러한 경우가 지금까지  한 번도 없기도 했고.

문제는 그런 식으로 말이 안 된다는 식으로 부정하려 해도 여태껏 드러난 요소요소들이 그게 정답이 맞다고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진이 내게 걸어놓은 금제와 관련된 부분같은 게 그랬다.


놈이 정말로 자신의 전생에 대해 숨기고 싶어서 그런 금제를 내게 걸어둔 거라면?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진의 전생에 대해 모르니까.

상식적으로 알 리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진은 내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금제를 '굳이' 걸어놓았다.


그게 의미하는 게 뭐겠는가?


'아는 사이였다?'


나하고?

그래, 분명 그런 거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굳이 이런 짓을 벌일 이유가 없으니까.


그것도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었겠지.


아마, 자그마한 힌트만 주어지면 바로 상대방의 정체에 대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전생에서 말이다.

'시발..'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니 조금씩 위기감이라는 놈이 가슴 속에서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전회차에서 엮인 적이 있는 이와 다시 엮이는 경우는 아까도 말했듯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하물며 그렇게 재차 엮이게 된 이가 나처럼 조연따리인 것도 아니고 떡하니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위기감이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상 초회차를 제외하면 회차가 좋게 끝난 적이 없으니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이대로는 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매번 빅 엿을 선사해주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이전 회차에서 나와 엮인 적이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을 터.

 중에 하나가 주인공 자리에 앉아있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주인공이라는 존재가 누군가를 조져버리고 말겠다고 작심하면  대상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봐왔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힘든 것이 내가 진의 목을 따버리는 순간 이번 회차도 끝이니까.

그뿐만이랴?

조연으로서의 맹세를 어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어마어마한 패널티를 먹이겠지.

분명 그럴 거다.

어느 정도 패널티가 주어지게 될지 지금  시점에서는 알  없지만, 가벼운 수준은 아닐 것이다.

 회차를 시작할 때마다 그 관리자라는 놈들이 몇 번이고 강조하는 게 조연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소리들이니까.


근데 조연 주제에 주연의 모가지를 따버린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노예로 시작해서 박박 굴렀던 초회차보다 비참한 꼴을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그 꼴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진을 상대로 손을 쓰는 건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진은 그딴 것 없이 날 마음껏 후두려 팰  있었고.

'엿같네..'


그야말로  말이  어울리는 상황.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점이 하나 있다면 진의 전생을 특정하는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다름아닌 놈의 전생 덕분이었다.

동시에 이 세계의 성녀가 진을 보고 격렬하기 그지없는 반응을 보였던 이유또한 깨달을  있었다.


보나마나..

'신성력.'

그래 그것 때문이겠지.

육신에 귀속되어 있기에 뒈져버리면 그대로 끝인 다른 신비들과는 다르게 신성력만큼은 영혼 자체에 귀속된 힘이라 죽었다가 전혀 다른 몸에서 되살아나더라도 그대로 따라갈테니까.

설령 깨어난 곳이 전혀 다른 세계라 해도 그 사실만큼은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성녀도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거겠지.


성녀 입장에서는 그녀가 모시는 신의 것과 전혀 다른 성질의 신성을 지닌 이가 눈앞에서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 상황이었을테니까.

어찌보면 자신이 모시는 여신의 영역이 침범당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니 당연히 과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그나마 정상적인 신성력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마 지금쯤 마지막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사교도 놈들처럼 뒤틀리고 망가진 것이었다면 무투대회고 뭐고 즉시 체포부터 하고 보지 않았을까.


아무튼 중요한  그런 게 아니라 진이 전생에서도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부분이었다.


그 말은 즉, 전생에 성직에 몸 담고 있었을 거라는 소리고.


그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성직자 놈들이냐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쪽에 몸 담고 있는 놈들하고는 생리적으로 맞질 않았다.

사실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나야 주인공 놈을 도와 끝만 보면 되는 입장인만큼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입장인 반면에 놈들은 과정또한 중시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나마 2회차인가에 만나서 일행이랍시고 같이 돌아다녔던 몽크 놈은 개중에서 나은 축에 속했다.


고지식하긴 해도 적당히 타협을 볼  아는 놈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다른 년놈들은 어땠는고 하면..


'치료 원툴인 주제에 무슨 일만 생겼다 하면 시끄럽게 입 털어대는 놈들.'


딱 그랬다.

전투 결과를 두고 민간인의 희생을 좀  줄이는 쪽으로 갈 수는 없었냐느니, 못  게 아니라 안 한  아니냐따위의 소리를 지껄일거면  뚝배기 하나라도 터뜨리고서 그런 말을 하던가.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후방에서 '오또케 오또케.'를 외치다가 전투가 끝나면 그제서야 스리슬쩍 얼굴을 들이밀며 하지도 않은 고생은 자기 혼자  한  하는 것들이 바로 성직자란 년들이었다.


물론, 모든 이가 전부 그랬던 건 분명 아니지만 '대개' 그랬다.

그렇다보니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 좋게 보일리 만무했고, 그 꼬락서니를 지켜보다가 참다참다 못해 한 마디 얹은 게 쌓이고 쌓여서  집단하고 내 사이는 사실상 최악이라 봐도 무방했다.


헌데 그런 식으로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은 년들 중에 하나가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


한숨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까 전부터 머리를 쪼개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곳을 거세게 압박하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이안?"


아니, 통증이 아까보다 심해진 것처럼 느껴졌던 건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어디 아파? 안색이 창백한데.."

그도 그럴 것이 그런 걸 내게 걸어둔 장본인이 지금 내 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그토록 애타게 찾고 있었던 진행요원을 옆에 대롱대롱 매단 채로 말이다.


겉으로는  걱정하고 있는 듯 했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진의 눈빛은 분명 관찰하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혹시나 제가 걸어둔 금제가 발동한 건 아닐지, 그래서 내가 자신의 전생에 대해 접근하는데 성공한 건 아닐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일까..


제법 따끔한 그 시선에 즉시 벽을 짚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하도 찡그리고 있었던 탓인지는 몰라도 제멋대로 부르르 경련하는 얼굴 근육을 억지로 잡아늘려 미소라는 것을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별거 아냐. 아침부터 긴장되서 아무 것도 못 먹었거든. 그래서 잠깐 현기증이 왔나 봐."

그러니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 없다고 손을 휘휘 저어보였음에도 진의 얼굴 위에 드리워진 걱정이라는 그늘은 걷힐줄 몰랐다.


"그럼 뭐라도 먹어야 되는  아냐? 계속 그럴 텐데.."

"됐어. 지금 먹어봐야 체하기만 할걸."

물론, 사양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굶은  사실이었지만, 굳이 지금 뭔가를 먹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마침 잘 됐네."

"응?"

"안 그래도 찾고 있었던 참이었거든."


그리 말하니 나름대로 유심히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진의 얼굴 위로 '나를?'이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에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고개를 가로저은  그녀의 옆에 자리하고 있던 교국 측 진행요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 저, 저요?"

설마 여기서 내가 자길 가리킬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모양이다.


우리의 대화에 관심없는  엄한 곳을 응시하고 있던 진행요원의 얼굴 위로 당황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표정에  걸맞는 목소리까지 내가며 당황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던 것도 잠시, 진행요원까지 맡을 정도로 선택받은 자신이 쉽게 당황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 걸까.

언제 당황했었냐는  사무적이면서도 근엄함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인 그녀가 날 향해 질문을 던져왔다.

"무슨 일이시죠?"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와서 그래봐야 헛수고라는 생각밖에는 안 들긴 했지만.

그리 생각했음에도 거기에 어울려주는 척을 했던 것은 그리해서 나쁠 게 없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아, 별건 아니구요."

손을 휘휘 저으면서 다른 손을 이용해 멀찌감치 서 있던 진을 내쪽을 향해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내 접촉에 당황했던 걸까 손가락 사이에 잡힌 옷 아래에서 몸을 움찔대는 기색이 전해져왔다.


그럼에도 진은 잡아당기는 내 힘에 저항하지 않고 굉장히 순순히  앞까지 끌려왔다.


저항할만한 힘이 남아있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진이 내 앞까지 도달한 순간 그녀를 잡아당기는데 사용했던 손을   그것을 이용해 그녀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멀뚱멀뚱 내쪽을 바라보고 있던 진행요원을 상대로 밝혔다.


진의 차례는 여기까지라는 걸.

"네? 기권하시겠다구요?"


"네."

끝까지 싸워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라면 모를까 딱 봐도 멀쩡해보이는데 기권을 외칠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당황한 진행요원을 상대로 보란듯이 고개를 끄덕여주니 그녀가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부터는.."


"제출했던 순서대로 디아나 앨런이 나설 겁니다."


"네네, 그럼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전해야할 필요성같은 거라도 느낀 건지 진행요원이 황급히 자리를 떠나고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을 풀어주었다.

그랬더니 눈으로 들어온 건..

'..음?'


생각치도 못했던 광경이었다.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보다 윤기가 흐르는 듯한 흑색 머리칼 사이로 수줍게 얼굴을 내비치고 있는 새하얀 귀가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꼭 마치 부끄러움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저래서야 이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면역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아무리 속세하고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게 성직자들이라고 해도 저 반응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그래, 꼭 마치 평생동안 남자 손이라고는 한 번도 못 잡아본 사람처럼 말이다.

'어..?'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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