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끝났네.'
배쪽을 움켜쥔채 무대 바닥하고 찐하게 키스를 하고 있는 돌덩이녀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직감했다. 선봉대 선봉 대결에서는 우리가 승리한 것 같다고.
일단 내 의견은 그랬는데 돌덩이녀 본인의 생각은 또 달랐던 모양이다.
엎어진채 몸을 파들파들 떨던 돌덩이녀가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손중에 하나를 떼어내더니 그것을 이용해 바닥을 짚었다.
"끄으으.."
그리고는 그것에 의지해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다리가 풀릴 정도로 데미지를 먹은 상황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몸을 억지로 일으킨들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었다.
'다시 고꾸라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니 잘 쳐줘봐야 샌드백 신세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을 본인이라고 해서 모르지 않을텐데도 저토록 기를 쓰고 몸을 일으키려 하는 건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아마도 그런 거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패배라는 단어가 눈앞에서 아른거릴게 분명한 상황에서 저토록 이를 악물 이유가 없으니까.
설마 뭐, 왕국 연합 측 대가리들한테 무투대회에서 승리할 경우 일족을 부흥시켜주겠다는 식의 약조라도 받은 걸까. 그래서 저렇게 필사적인 거고?
'뭐..'
돌덩이녀한테 희망이 아예 없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엄청난 소리를 터뜨렸던 마지막 한 방에 꽤나 많은 체력을 투자했던 것인지 진의 상태도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으니까.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은 만큼 본인은 그 사실을 나름대로 숨겨보려고 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그녀의 몸 곳곳에서 그러한 기색들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개중에서 가장 심각해보이는 건 뭐니뭐니해도 팔쪽이었다.
시체의 그것마냥 핏기라고는 한줌도 없이 허옇게 질린 손등 하며, 부들부들 경련하는 팔까지.
그 모든 것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무대하고 제법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또렷한 존재감을 드러냈을 정도로 강렬했던 마지막 그 한 방은 진으로서도 상당한 반동을 감수하고서 펼친 것이었다는 걸.
쉽게 말해서 뒤는 생각 안 하고 일단 저지르고 본 식이랄까.
내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진은 이미 평범한 타격만으로도 돌덩이녀한테 충분한 데미지를 주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굳이 무리를 한다?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혹시라도 실패했다면 기껏 확보해놓은 우위를 헌납하는 것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대로 패배라는 결과로 직행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 사실을 진이라고 해서 모르진 않았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과 같은 걸 일단 저지르고 봤다는 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서?'
모르긴 몰라도 성녀가 급하게 자리를 비운 것하고 관련이 있지 않을까.
'뭐, 아무튼..'
그 부분이야 나중에 천천히 알아본다 치고..
"이 이상은 힘들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디아나도, 앨리스도 그렇다고 하니 이만 불러들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게 뭐, 최종전도 아니고 굳이 무리하게 둘 필요가 없으니까.
그랬다가 쓸데없이 부상이라도 입는다면 결국 곤란해지는 건 이쪽이었다.
해서 자신이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디아나를 다시 의자에 눌러앉힌 뒤 그대로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물론, 진의 차례는 여기까지라는 사실을 진행 측에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대기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게 분명한 진행요원을 찾아 걸음을 옮기며 아까봤던 광경을 머릿속으로 되새김질했다.
하필이면 그때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에 진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돌덩이녀한테 그만한 데미지를 선물했는지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딱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진이 사용한 방식이 일반적인 건 아니라는 것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진의 방식에는 뒤가 존재하질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진은 그러한 방식을 사용함에 있어 굉장히 익숙해보였고.
그렇기에 더 의아한 것이었다.
뒤는 생각하지 않는 방식이 익숙할 정도라면 뒤따위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 상태로 싸운 적이 많다는 뜻일텐데 저 년한테 그럴만한 상황이 있었나 싶었으니까.
'아니면 혹시..'
나는 알지 못하는, 그녀의 전생으로부터 비롯된 습관이기라도 한 걸까.
정말로 그런 거라면 더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전생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그런 식의 싸움방식이 몸에 배일 정돈가 싶었으니까.
혹시 나처럼 인류 최후의 전선같은 곳에서 박터지게 싸우다가 뒈지기라도 한 것일까.
한 번이라도 패배하는 순간 뒤고 뭐고 없는 그런 전장 말이다.
그런 식으로 이 몸으로 들어오기 전에 겪었던 생에 대해 떠올리고 있으려니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
저런 걸 어디서 봤나 했더니만..
진이 선봉으로 나서서 보여준 방식은 명백히 이질적이다.
보통 사람은 그런 식으로 자기희생을 담보로까지 해가며 싸우지 않으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진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상처를 입게 되어도 상관없으니 보다 확실하게 상대방에게 데미지를 입히고 보겠다는 식의 싸움을 하는 이들은 대개 둘 중에 하나였다.
뭔가에 취해서 고통이라는 걸 망각해버렸거나 어지간한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는 회복능력을 갖추고 있거나.
둘중에서 전자의 경우는 사교도 놈들이나 흑마법에 발을 담군 놈들에게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케이스였고, 후자의 경우는..
'사제하고 성기사들이 그랬지.'
괜히 사교도 놈들이나 흑마법사 놈들이 성기사들을 두고 바퀴벌레니 뭐니 하면서 학을 떼는 게 아니었다.
진짜배기 성기사들은 회복력이 거의 재앙에 가까운 수준이니까.
말 그대로 지치지 않는 살육전차라 해야할까.
차라리 약하기라도 하면 체력전으로 끌고 가서 신성력이 소진되는 걸 노려볼 수라도 있을텐데 일단 성기사 타이틀을 달고 있다 하면 하나같이 괴멸적인 무력을 갖춘 이들이다 보니 그러기도 힘들었다.
덕분에 시간을 끌어보려다가 뚝배기가 날아간 사교도 놈들이나 흑마법사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일반적인 성기사가 대충 그런 느낌이라면 전생에서 접했던 이들은 또 달랐다.
그때는 정말 한 번 밀리면 말그대로 모든 게 끝이라서 그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라는 작자도 자기 밑천까지 싹싹 긁어다가 전선에다가 때려박는 상황이었으니까.
신의 직접적인 힘을 행사하는 건 인과율이니 어쩌니하는 참으로 쓰잘데기 없는 법칙으로 막혀있어서 신이 전장에 직접 강림한다거나 하늘에서 거대한 손이 내려와 마물 놈들을 찍어누르는 일같은 건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대신 신이 갓 뿜어낸 날 것 그대로의 신성이 항상 전장을 휘감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거기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건 다름아닌 전선의 한축을 담당하던 사제와 성기사들이었다.
신성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인간친화적인 기운인지라 다들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긴 헀지만, 그 중에서도 신성'빨'을 잘 받는 이들이 있다면 바로 사제와 성기사들이었으니까.
원래는 하루종일 기도를 올려도 찔끔찔끔 베풀기만 하던 신이라는 작자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아낌없이 퍼주는 나무가 되니 그 무엇보다도 신성력에 영향을 많이 받는 그들은 말그대로 괴물이 되어버렸다.
머리만 날아가지 않으면 팔이 날아가든 다리가 날아가든 그 자리에서 1초만에 말끔하게 재생해버리는데 덕분에 그들의 싸움법 자체가 바뀔 정도였다.
원래도 신성력을 기반으로 한 재생능력을 믿고 싸우는 식이긴 했는데 머리만 날아가지 않으면 어떤 상처든 원래되로 회복된다는 걸 확인한 후로는 일단 몸부터 들이밀고 보더라. 너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말이다.
방금 진이 사용한 방식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다는 건 혹시..
'전생에 성기사였나?'
아니면 사제?
아니지 여성이니까 사제보다는..
딱 거기까지였다.
한참동안 이어졌던 생각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윽..!"
갑작스레 들이닥친 통증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파편같은 것이 머릿속을 제멋대로 헤집어대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통증이 어찌나 강렬한지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득해지며 정신이 제멋대로 점멸했다.
동시에 이쪽의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이 몸이 제멋대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덕분에 깨달았다.
지금의 이 통증은 누군가 내게 전하는 경고라는 것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내게 통증이라는 것의 입을 빌려 경고를 하고 있었다.
이 이상은 허락할 생각이 없으니 이쯤에서 끝내라고 말이다.
"하."
이리 된 이상 더는 제 존재를 숨길 생각 따위는 없다는 듯 아주 또렷하게 제 존재감을 발하는 경고성 통증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금도 여전히 머리를 쿡쿡 찔러대고 있는 이 통증 덕분에 확실해졌으니까.
누군가 내게 수작질을 부려놨다는 사실이 말이다.
누굴까.
누가 이딴 귀여운 장난질을 쳐둔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가장 먼저 머릿속으로 떠오른 건 다름아닌 카트린느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특별히 의심스럽다거나 그래서가 아니었다.
내게 무언가 수작질을 부릴 거라면 카트린느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보다 더 좋은 곳이 또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아마 그쪽은 정답이 아닐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카트린느는 그런 쪽의 거짓말은 지지리도 못하는 편이니까.
만에 하나 그녀가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무언가 수작질을 부렸다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티가 났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그 사실을 눈치채고 아예 입에 대질 않았겠지.
그러니 카트린느는 범인이 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굴까.
궁금한 건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대체 언제 이딴 짓을 벌여둔 걸까.
그럴만한 틈이 있기는 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는데..'
혹시 내가 잠들어있는 사이에?
그랬다면 그 시점에서 눈치까고서 눈을 번쩍 떴겠지.
그러니 잠든 틈은 범행 시간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일까.
언제 이렇게 재밌는 장난을 쳐둔 걸까.
뿌득뿌득 이를 갈면서 천천히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떠오른 건..
'설마..'
다른 것들하고 비교하면 그나마 가능성이 커보이는 순간의 기억이었다.
그러니까 왜 앨리스의 손에 잡혀서 생각치도 못한 도피행을 찍었을 때 있지 않은가.
그때 어떻게든 꼬여버린 상황을 수습해보겠답시고 다들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자해공갈을 시전하고 그대로 까무룩 기절했던 적이 있는데 만약 그 잠깐의 공백을 놓치지 않고 그때 수작질을 부려놓은 거라면?
가능성이야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용의선상에 들어갈만한 이들은 죄다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때는 꼼짝없이 놈인줄로만 알았던 진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다는 건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에 범인이 있다는 소린데..
일단은 디아나는 제외했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에게 금제를 가하는 건 나름대로 전문적인 영역에 속하니까.
검밖에 모르는 그녀가 이런 수법을 알고 있을 리 없겠지.
디아나하고는 조금 다른 이유로 앨리스와 레이시아또한 용의선상에서 제외했다.
만약 둘 중 한 명이 그 자리에서 무언가 수작질을 벌이려 했다면 다른 쪽이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 리 없으니까.
그렇기에 둘은 범인이 되기 힘들었다.
넷 중에서 셋이 나가리가 되었으니 남은 건 하나 뿐인 상황.
그것과 방금 전 진이 보여주었던 사제, 혹은 성기사들이나 사용할법한 전투 방식을 조합해보았다.
'전생에 사제였다?'
그랬더니 나온 결론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금제를 가하는 건 사제들이 범죄자를 다룰 때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 다다르기 무섭게 아까 전부터 이쯤에서 생각을 멈추라고 경고를 전해오던 머리의 통증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아까까지는 그래도 찌르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숫제 머리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건 뭐..'
정답이라고 대놓고 속삭여주는 거나 다름없는 꼴이었으니까.
덕분에 진의 전생에 대한 힌트를 하나 더 확보할 수 있었다.
'성기사는 아니었나 보네.'
범죄자들 상대하는 게 일상인 성기사 출신이었다면 금제에 이런 식으로 구멍이 숭숭 뚫려있을 리 없으니까.
성기사가 아니라는 건 사제, 혹은 수녀 출신이라는 소리겠지.
그것도 꽤 고위직일 가능성이 컸다.
금제같은 건 어느 종교에서든 고위에 속하는 수법이니까.
평사제나 일반수녀 출신이 그런 걸 알고 있을 리는 없을 터.
고위직 출신임에도 저렇게 메이스류를 다루는 게 익숙하다?
그렇다는 건 그 세계또한 정상은 아니었다는 소리일 거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내가 전회차에 겪었던 세계마냥 멸망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리고 있는 상태 아니었을까.
"아오.."
머리가 아팠다.
더는 생각을 이어나가기 힘들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