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딱 봐도 화가 많이 난 것 같길래 분명 시작하자마자 우악스럽게 달려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왕국 연합 측에서 선봉으로 내세운 돌덩이녀는 진행자의 우렁차기 그지없는 시작 신호를 듣자마자 진을 향해 달려들기는 커녕 그 자리에서 즉시 자세를 낮추었다. 유도의 기본 자세를 떠올리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어지간한 걸로는 흠집조차 나지 않을 것 같이 생겨먹은 제 거대한 양손을 진을 향해 쭉 내뻗는데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저 돌덩이녀가 사용하는 수법을 말이다.
'체술 쪽.'
그것도 잡기 위주의 체술로 보였다.
그 말은 즉..
저 손에 잡히게 될 경우 좋은 꼴 보기는 힘들 거란 뜻이고.
아마 옷깃만 잡혀도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지 않을까.
그 꼴을 보지 않으려면 저 년에게 간격을 허락치 않아야곘지.
최선은 역시 뭐니뭐니해도 저 돌덩이녀의 간격에 들어가지 않고 이쪽의 간격만을 유지하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두들겨패는 거겠지만..
솔직히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 년과 저 돌덩이녀의 진짜 실력에 대해 아는 게 하등 없으니까.
겉으로만 보면 더럽게 느릴 것 같은 외모와 덩치를 하고 있는 돌덩이녀지만 혹시 또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저런 몸을 하고서 고양이마냥 잽싸게 움직일 수도 있는 거니까.
정말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리치싸움에서 진이 우위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맨손으로 경기에 나선 저쪽하고는 달리 진은 평소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길이의 대련용 철검을 손에 들고 경기에 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리치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저 말도 안 되는 덩치만큼이나 길다란 돌덩이녀의 팔 때문이었다.
'무슨 고릴라냐고.'
그 사실을 돌덩이녀 본인도 아주 잘 알고 있는지 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거리를 좁히는 돌덩이녀의 얼굴 위에는 경계심은 있을지언정 두려움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돌덩이녀에 비해 우리의 주인공은 어땠는고 하면..
여전히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아직도?'
그렇다보니 그런 생각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었다.
설마 경기를 포기하기라도 한 걸까.
가능성이 충분해서 문제였다.
안 그래도 등 떠밀리듯 선봉 자리에 앉게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열받을텐데 그렇게 선봉으로 나가고 보니 이건 뭐, 사람은 커녕 생물체가 맞긴 할지 의문이 들 정도로 괴랄한 것이 상대랍시고 튀어나온 셈이니까.
원래 쓰던 것하고 비교하면 조잡하기 짝이 없는 대련용 철검으로 저 두터워보이는 돌덩이를 뚫어내고 제대로 된 데미지를 입힐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승산 자체에 회의감이 생기기라도 했다면..
속으로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제서야 눈으로 들어온 것은 조금은 희한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꼭 감긴 채로 이렇다할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눈쪽하고는 달리 진의 입은 굉장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건 그 움직임이 너무나도 작았기 때문이었다.
그 왜 뭔가를 작게 웅얼거릴 때나 나오는 특유의 달싹거림 있지 않은가.
지금 진의 입은 그런 식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뭘 저렇게 바쁘게 읊조리나 싶었으니까.
'꼭 기도하는 것 같네.'
손만 모으면 딱 그짝이었다.
허나 그럴 리는 없겠지.
진이 그 정도로 신앙에 진심인 타입이었다면 신의 대리자나 다름없는 성녀를 기를 쓰고 피해다닐 이유가 없으니까.
거기에 성녀의 반응도 마음에 걸렸고.
성녀에 대해 떠올리니 지금은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져서 아까 그녀가 앉아있었던 곳을 향해 슬쩍 시선을 던져봤다.
헌데 이게 왠걸?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성녀의 자리였던 그곳은 이용하는 이 하나없이 텅 비어있었다.
그랬다.
성녀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자리'만' 비어있었다.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바이올렛이나 어느새 그곳으로 복귀한 레이시아, 그리고 개막식 때 봤던 불꽃녀는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다만 돌아가는 분위기가 굉장히 묘했다.
레이시아야 나와 그런 일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바이올렛이나 불꽃녀도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대련에 영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대신 그녀들은 주인없이 방치된 성녀의 자리를 연신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 자리의 주인이 급히 이곳을 빠져나간 게 무진장 신경쓰인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다시금 무대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도 나름대로 시간이 꽤 지났다고 생각했건만 무대 위의 상황은 아까 확인했을 때하고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예의 그 기묘하기 짝이 없는 대치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니, 아까하고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진이 몇 분째 제자리에서 눈을 꼭 감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으니 처음에는 그런 그녀를 경계하던 돌덩이녀도 슬슬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는지 아까보다 더 적극적으로 거리를 좁히고 있었으니까.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자갈로 덮여있는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말려올라간 것이 진의 어줍잖은 수작질에 속아넘어가 시간을 몇 분씩이나 낭비한 걸 두고 상당히 열받아하는 모양새였다.
그런 식으로 뿔이 난 상대방이 아까보다 한층 빠른 속도로 성큼성큼 접근해오고 있건만 진은 여전히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포기한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 있겠어요?"
디아나가 조심스레 내비친 우려에 일단 답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나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우두커니 서 있는 진의 모습에서 또다른 위화감을 발견하게된 건 그 와중이었다.
'잠깐만..'
뭔가..
뭔가가 이상했다.
무엇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딱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위화감이라는 놈이 다리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느낌만큼은 굉장히 선명했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이런 느낌이 드는 이유가 뭘까.
그걸 알아내지 못한다면 지금의 위화감또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눈을 가늘게 뜬채 내게 이러한 위화감을 선물해준 장본인의 모습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찬찬히 훑었다.
진의 손이 대련용 철검, 아니 사실상 철몽둥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을 있는 힘껏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눈으로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흠?'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그냥 지나쳤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두 번째로 확인했을 때였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철몽둥이를 손에 쥐고 있는 진의 모습이 기이할 정도로 익숙해보인다는 것을.
어찌나 익숙해보이는지 그런 류의 물건을 평생에 걸쳐 사용해온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진이 주로 사용하는 건 주인공의 왕도라 할 수 있는 '검'이니까.
놈이 기사부로 전과를 신청할 때 적어서 낸 신청서에도 그리 적혀있을 정도니 오죽할까.
심지어 이제는 파편으로밖에 남아있지 않은 '이안'의 과거 기억 속에도 꼬맹이 시절의 진이 검을 수련해보겠답시고 나뭇가지 같은 걸 들고 낑낑대는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런데 저건 대체 뭘까.
지금 진의 손에 들려있는 건 말이 검이지 사실상 몽둥이, 정확히는 둔기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이질감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혹시 자세만 우연찮게 얻어걸린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건 곧 확인할 수 있었다.
쿵-!
"흐아압-!"
더는 지금처럼 간만 보고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건지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며 천천히 거리를 좁히던 돌덩이녀가 묵직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땅을 박찼다.
온몸이 자갈로 덮여있는데다가 덩치까지 큰 년이 그러니 무슨 낙석이라도 떨어지는 것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만큼 압도적인 광경이었건만 정작 그것의 목표가 된 이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그래서 더 기이하게 느껴졌다.
한쪽의 기세는 상대방을 찢어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사납기 그지없는데 다른 쪽의 기세는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으니 꼭 마치 둘이 별개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허나 둘은 분명 같은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렇다보니 둘의 거리는 계속해서 좁혀졌다.
그리고 마침내 돌덩이녀의 손이 진의 어깨와 닿은 순간, 돌덩이녀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승리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대로 진을 무대 밖으로 집어던져 장외패로 만들어버릴 생각이었던 걸까.
"흡!"
이를 악문 듯한 기합성과 함께 돌덩이녀의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저주에라도 걸린 것처럼 경기가 시작되고 나서 줄곧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진이 처음으로 움직임을 보인 것은.
탁-
누구하고는 다르게 귀를 찢는 듯한 요란한 소리같은 건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진의 몸을 박살내기라도 할 것처럼 살벌하기 그지없는 기세를 흩뿌리며 진을 향해 날아들던 돌덩이 두 개가 그대로 그녀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으니까.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였고, 일찌감치 승리를 확신한 것에 대한 대가는 제법 컸다.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기 위한 진의 움직임은 간단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결과마저 그렇지는 않았으니까.
쾅-!
이번에야말로 뭔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돌덩이녀가 황급히 몸을 뒤로 물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크읍.."
어깨를 맞은 걸까.
자갈로 뒤덮인 얼굴이 언제 미소를 짓고 있었냐는 듯 고통으로 일그러져있었다.
그뿐만이랴.
지혈이라도 하는 것처럼 돌덩이녀의 손으로 덮인 어깨 부근에서 돌가루가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손 옆으로 보이는 곳에도 실금이 쫙쫙 가 있었고 말이다.
한 대 두들겨 맞은 걸로 이 정도의 데미지를 입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나 보다.
돌덩이녀의 얼굴은 찡그려진채 펴질 줄을 몰랐다.
그 상태로 재개된 대련에서 진은 많은 이들의 예상하고는 다르게 상대와 호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진의 첫 공격이 제대로 먹혀든 덕이 컸다.
생각했던 것보다 데미지가 컸던 모양인지 그때부터 돌덩이녀의 움직임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변했으니까.
특히나 진에게 얻어맞은 어깨 쪽이 그러했다.
어깨 쪽이 불편한 모양인지 그쪽 팔을 휘두르려다가도 이따금씩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멈칫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그리고 진은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상대방의 약점을 악랄할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오죽하면 쟤가 저런 면모가 있었나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흥미로운 점은 진이 그런 식으로 제 우위를 십분 활용하는 식의 싸움을 이어나갈수록 놈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함의 크기또한 덩달아 커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다만 아까 그녀에게서 느꼈던 익숙함과는 그 종류가 살짝 달랐다.
'분명..'
저런 식의 싸움 방식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내가 저걸 어디서 봤더라..
혹시 조금 더 자세히 눈에 담으면 생각이 날까 싶어서 즉시 눈을 가늘게 떠봤지만 안타깝게도 '이거다!'하고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에 비해 익숙한 느낌은 진과 돌덩이녀의 대련이 지속될수록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답답했다.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싸움방식인데 그걸 어디서 봤는지가 당췌 떠오르질 않았으니까.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느낌이라도 들었다면 이 정도로까지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헌데 그런 것도 없었다.
생각나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이 그냥 머릿속이 뿌옇기만 했다.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다라는 느낌이구나.
솔직히 이전까지는 누가 그런 말을 하면 그게 말이 되나 싶었었는데 말이다.
오늘 몸소 겪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그 정도로 머릿속이 허연 안개들로 꽉꽉 들어찬 느낌이었다.
그래서 의아했다.
이 정도로 생각이 안 날 수가 있나 싶었으니까.
이래서야 꼭 마치 누군가 내 머리에 대고 수작질이라도 부려놓은 것 같지 않은가.
'그럴만한 틈이 있었나?'
그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찝찝한 느낌에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쿠웅-!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소리가 대기실을 덮쳐왔다.
어찌나 강렬한지 제법 단단해보이는 유리로 되어있는 관람용 창이 웅웅 소리를 내며 진동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소리의 진원지 한복판에는 제대로 한 방 얻어맞고 떡실신해버린 돌덩이녀와..
'어우..'
메이져리거 뺨치는 멋들어진 스윙 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진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