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괜찮아?"
갑작스럽게 들려온 그 질문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던 것은 복도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레이시아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서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네..? 뭐가요?"
물론, 그걸 고스란히 티내긴 좀 그랬기에 일단은 잡아뗐다.
그랬더니 돌아온 건 내심 예상하고 있었던 것하고는 살짝 다른 내용의 말이었다.
"아니, 표정이 안 좋길래. 걱정되서 그러나 싶어서."
그리 말한 디아나가 턱짓으로 슬쩍 가리킨 방향에는 곧 시작될 2차전이 펼쳐질 무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덕분에 깨달았다.
디아나가 말한 게 레이시아가 아니라 진을 말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일단 필요하다는 이유로 선봉으로 내세우기는 했는데 그러고 나서 내가 죽상을 하고 있으니 진을 걱정해서 그런 거라 생각한 것일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거기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죽상이라는 죽상은 다 지어놓고 이제와서 진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설명하기도 좀 그랬으니까.
"네, 뭐.."
정말로 솔직히 말하자면 진을 걱정하는 것만큼 의미없는 짓이 또 없다는 게 내 진실된 입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 아닌가?
세계가 갑자기 진으로부터 몸을 돌리기라도 하지 않는 한 그년이 이런 곳에서 고꾸러질 가능성따위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애초에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도 뒤지기는 커녕 기연을 쳐먹고 성장하는 존재들이 바로 주인공이라는 년놈들 아니던가?
'아, 이건 뒈졌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태연자약하게 더 강해진 모습으로 나타나던 놈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내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던 디아나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잘 하겠지. 저번에 보니까 꽤 하던데?"
"그런가요.."
그런 식으로 디아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진을 따라 잠시 대기실을 빠져나갔던 앨리스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쉬는 시간을 맞이하야 텅 비어있던 무대 위로 진행자을 맡은 이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도 바로 그때였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무투대회가 재개되었음을 알린 그녀가 이내 손을 뻗어 무대와 연결되어 있는 오른쪽 게이트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등장 순서는 왕국 연합 측이 먼저인 모양.
"저 멀리 사막의 대지에서 온.."
대충 그런 수식어로 시작된 설명과 함께 게이트 안쪽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건 게이트 천장에 닿을락 말락할 정도로 거대한 키를 가진 거한이었다.
'그러니까..'
여자 맞지?
맞긴 할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개할 때 굳이 그녀라는 단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으니까.
물론, 저걸 디아나나 앨리스와 여성이라는 이름의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을런지는 분명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을 정도로 게이트 안쪽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이의 외양은 이질적이었다.
여성치고는 어마어마하게 큰 덩치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또한 이질적인 느낌에 한손을 보태고 있긴 하지만 키 큰 여성이야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거니까.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름아닌 그녀의 피부를 빼곡하게 덮고 있는, 퍽 단단해보이는 자갈들이었다.
'생물체가 맞긴 하나?'
솔직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왕국 연합 측 부스에 들린 적이 있다보니 그들의 외양이 상당히 특이하다는 사실 정도야 이미 인지하고 있었지만 저건 특이하다는 말로 포장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벗어난 무언가였으니까.
애초에 내가 그쪽 부스에서 봤었던 이들 중 바위인간이라 부를만한 이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조금 특이한 피부색을 가진 인간의 몸 곳곳에 자잘자잘한 자갈들이 붙어있는 식이었다.
저런 식으로 피부라고 부를만한 곳은 한 군데도 없이 온통 자갈로만 덮여있는 식은 분명히 아니었다.
'혹시..'
그쪽은 혼혈이고 이쪽이야말로 본류인 걸까.
그런 거라면야 저렇게 특정적인 외모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했다.
애초에 왕국 연합 측 대표랍시고 연설을 펼치던 여성또한 전신이 불로 되어있지 않았던가.
그것의 돌 버전이라고 보면 되겠지.
'그나저나..'
보면 볼수록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외모였다.
"허.."
"저게 뭔.."
왕국 연합 측에서 내세운 선봉에게서 그러한 느낌을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양옆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왕국 연합 측에서 정말로 지기 싫었나 보네요."
"그래, 그런 모양이야."
그래도 그렇지 저건 좀 그렇지 않나?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교류전 자체가 기본적으로는 국가간의 친선을 위한 행사라는 성격이 강하다보니 곁가지로 껴있는 무투대회도 여타 평범한 무투대회들과는 그 성격이 좀 달랐다.
특히 복장같은 부분이 그랬다.
보통 무투대회라 불리울만한 대회들을 보면 사용가능한 무기에 제한을 두는 경우는 있어도 방어구에는 딱히 제한을 두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놈의 교국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쪽에도 제한을 두었다.
그리고 그 제한 내에서 참가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 바로 기사용 정복이었고.
주로 순찰을 돌 거나 행사같은 게 있을 때 주로 입는 그 옷 말이다.
그래도 나름 기사들이 입는 옷이라고 치명적인 급소같은 곳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있어 평범한 옷에 비하면 방호력이 상당한 수준이긴 하지만..
'갑옷하고 비교하면 뭐..'
천쪼가리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애초에 둘은 만들어진 목적 자체가 다르니까.
그런 걸 입고 대련에 임하는만큼 날이 없는 대련용 검을 들고 대련을 한다해도 한 대라도 맞게 되면 데미지가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팔같은 곳에 재대로 맞으면 그대로 팔뼈가 두동강나도 이상하지 않겠지.
이게 결코 과장이 아닌 게 실제로 앞서 펼쳐진 1차전에서 그런 식으로 실려나갔던 이도 몇 있었다.
다들 교국 측의 치료를 받고 지금은 괜찮아진듯 하지만.
아무튼 그 특이하기 짝이 없는 몸을 가진 슬라임녀를 제외하면 다들 그 정도로 형편없는 방어력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게 지금까지의 상황이었는데 저건 뭐..
사실상 지 혼자 갑옷을 껴입고 나타난 꼴이 아닌가.
당연히 보는 입장에서 기가 찰 수밖에.
더 웃긴 건 그런 식으로 돌로 이루어진 몸 위에다가 기사용 정복을 보란듯이 걸쳐놓았다는 점이었다.
'거참..'
더럽고 치사하긴 한데 애초에 저렇게 생겨먹은 것이니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헛웃음을 지어야할지 화를 내야할지조차 헷갈려서 그저 쓰게만 웃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1차전에서 제법 공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진행자 양반도 왕국 연합 측 선봉의 모습을 보고 우리와 비슷한 감상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녀가 이내 왼쪽 게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다음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왕국 연합 측 선봉에 대해 소개할 때보다 한층 더 힘이 들어간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대회장 안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한 순간, 무대 쪽에서 시선을 떼어내 대회장을 따라 둥그렇게 늘어서있는 귀빈석 쪽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는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이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초점을 맞춘답시고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조차 감수해가며 그리한 이유는 간단했다.
꼭 확인해봐야할 게 있었으니까.
'어디보자..'
여신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성녀님께서는 어디에서 무투대회를 지켜보고 계시려나..
대회장 내에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전이야 필요한 것만 딱 하고 나서 그대로 자리를 빠져나갔던 그녀지만 이번만큼은 다를테니까.
그도 그럴 것이 교류전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이자 폐막식을 제외하면 사실상 마지막 행사라 할 수 있는 무투대회 아니던가.
비록 교국 측이 1차전에서 제국한테 떡이 될 정도로 발려버리긴 했지만.. 아니, 어쩌면 그 때문에 더더욱 자리를 뜨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교국 측이 발려버리자마자 자리를 뜨는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그것만큼 민망한 꼴이 또 없을테니까.
그러니 분명 이 안에 남아있을 거라고 자부하면서 귀빈석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었다.
그러고 있으니 생각치도 못하게 바이올라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이제 우리쪽 경기이니만큼 그녀도 우리 쪽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일까.
마침 그녀를 포함한 제국 측 참가자들이 대기실로 쓰고 있는 곳이 우리 쪽 대기실의 정 반대편에 위치해 있어서 찾기 쉬웠던 모양이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바이올렛의 모습도 찾아봤지만 찾을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참가자 외의 출입이 허가되지 않은 건 그쪽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
시선이 정확하게 딱 마주친 상황에서 그걸 못 본 척 무시하는 것도 좀 그랬기에 바이올라를 향해 살짝 눈짓으로 아는 척을 해보았다.
거리가 상당한만큼 어쩌면 전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남들보다 압도적인 감각을 지닌 바이올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나 보다.
희미하게 보이는 그녀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져나가더니 멀리서도 또렷한 존재감을 지닌 그녀의 은빛 꼬리가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반갑다는 듯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손을 크게 흔들어보이는데..
덕분에 그녀 옆에 앉아있던 이들의 시선까지 내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까지 받아줘야할 의무는 없었기에 무대 쪽을 바라보는 척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려 성녀 수색을 재개했다.
그런 식으로 바지런히 눈동자를 굴리고 있으니 왼쪽 게이트서부터 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가 다른 귀빈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있던 성녀를 발견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렇게 성녀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대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성녀만 등장했다 하면 기를 쓰고 자리를 피하던 진의 행동을 생각하면 성녀 쪽에서 진의 모습을 확인하게 될 경우 분명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왼쪽 게이트 안쪽에서부터 진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옆에 앉아있는 바이올렛 쪽을 바라보며 그녀와 무언가 대화를 주고받고 있던 성녀의 고개가 대회장 쪽을 향해 홱 돌아갔으니까.
오직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감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뿐만이랴?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다만 확인할 수 있었던 건 딱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오늘도 천같은 것으로 몸은 물론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는 탓에 표정을 확인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다만 딱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꽤나 놀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석상이라도 된 것마냥 진을 바라보며 굳어버릴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 그녀보다 더 놀란 이들이 있다면 그건 다름아닌 성녀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태껏 잔잔하기 그지없는 모습만 보여왔던 성녀가 갑작스럽게 돌발행동을 보인 셈이니까.
허나 성녀는 다른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건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곳에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보였다.
그만큼 성녀는 제 모든 신경을 오롯이 진에게 투사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내심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격한 반응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주인공에게 무엇이 있기에 성녀씩이나 되는 인물이 저런 반응을 보이나 싶었으니까.
그에 비해 진의 반응은 어땠는고 하면..
어느새 무대 위로 올라간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꼭 마치 제게로 날아와 꽂히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대련을 할 상대가 버젓이 앞에 자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 했다는 점이다.
자길 앞에 두고 눈을 꼭 감아버린 진의 행동을 일종의 도발로 받아들였던 것일까.
온몸이 자갈로 이루어진 왕국 연합 측 선봉이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씩씩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입을 열어 진을 향해 무어라고 씨부려대는데..
코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진은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진을 향해 소리를 치던 왕국 연합 측 참가자가 한층 더 골이 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여러모로 심상찮은 분위기 속에서..
"그럼, 모두의 함성과 함께 2차전 첫 경기를 시이이이이자아아아아악하겠습니다아아아아!!"
양측에서 선봉으로 내세운 이들의 대결이 막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