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레이시아 시점****
상상이라는 건 이루말할 수 없이 지독하다.
어쩔 때는 모든 것이 상상하는 그대로 이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긍정적인 장면들만 보여주다가 거기에 혹해서 넘어갈만 하면 지금껏 보여주었던 것들하고는 사뭇 다른, 어찌보면 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보란듯이 내세워 사람을 진창 속에 쳐박아버리곤 하니까.
더 고약한 점은 그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음에도 그것의 속삭임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기댈 수 있을만한 구석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이안과 그런 식으로 헤어지고 나서 자신또한 그러했다.
현실이 한겨울의 공기마냥 싸늘해서 사실상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그곳에 던져진 자신은 그것을 견디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게 거짓된 온기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 거짓됨에 취해버리면 나중에 그만한 대가를 치루게 된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자신에게만 일방적으로 형편좋은 망상에 취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싸늘하기 그지없는 현실을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대로 얼어붙어버릴게 뻔했으니까.
이안과 함께 떠나갔던 디아나로부터 한통의 연락이 도착했던 건 그런 식으로 언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지 알 수 없는 거짓된 온기에 기대 하루하루 근근히 연명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교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교류전에 참가하는 이들이 혹시라도 불합리한 일을 겪는 일이 없도록 딸려보낸 외무대신이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가 낱낱히 적혀있는, 보내기까지 꽤 많은 고민을 한 듯한 그 편지를 받아든 순간 으레 뒤따라야할 분노보다 앞섰던 것은 스스로조차 역겹게 느껴질 정도의 '환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동원되어야만 하는 상황을 이안이 달갑게 여길리 없었다.
헌데 그 타이밍에 자신이 등장해서 그 달갑지 않은 상황을 보란듯이 해결해주고, 겸사겸사 그를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원흉을 단죄한다면?
일전의 그 일로 인해 어쩌면 바닥까지 떨어졌을지도 모르는 자신을 향한 이안의 호감이 조금이나마 되살아나지 않을까.
평소였다면 이만한 상황을 놓고 그런 생각따위나 하고 있다는 사실에 헛웃음부터 지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기댈 거라고 해봐야 돌아와서 이야기하자는 이안의 마지막 한 마디가 전부인 상황에서 이건 새롭게 등장한 가능성이었으니까.
아니, 사실상 유일한 가능성이라 봐도 무방했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는, 이안의 제공해준 가능성이 꼭 긍정적인 결말로 끝나리라는 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문제는 기껏 가능성이라 부를 수 있을만한 것이 생겼건만 그걸 이용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이미 한 번 반대라는 벽에 부딪힌 전적이 있으니까.
자신이 직접 교류전에 참가키로 한 이들을 이끌겠다고 하니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면서 다들 기를 쓰고 반대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이들이 이제와서 입장을 바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만한 명분이 없다면 필시 그럴테지.
그렇기에 가장 시급하게 마련할 필요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반대를 입에 담았던 이들이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찬성 쪽으로 갈아타게 만들 계기 말이다.
뭐가 있을까.
편지를 받고 나서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접근 방법을 살짝 바꿔보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존의 방법으로는 답이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리하여 새롭게 주목한 점은 다름아닌 교류전의 책임자로써 가 있는 외무대신의 존재였다.
괜히 외무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게 아님을 증명하듯 외무대신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함에 있어 유들유들한 편이라 쉬이 적을 만들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적은 꽤 많았다.
정치판에서 구른 세월이 워낙 길다보니 사실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본인이 적을 만들지 않으려 해도 일단 몸담고 있으면 본인의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이 적이 생기는 곳이 바로 정치판이라는 이름의 진흙탕이니까.
그 점을 이용한다면 어떨까.
적이 적지 않은 편인 외무대신의 상황을 이용해서 일단 그를 실각시킨다면?
자연스럽게 교류전의 책임자 자리는 공석이 될 거다.
그리되면 분명 그걸 메꿔야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올텐데..
'다들 나서려고 하지 않겠지.'
열에 아홉 내지 여덟 정도의 확률로 그리 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들 알고 있을테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교류전의 책임자라는 자리는 '독'이든 잔으로 변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걸 말이다.
애초에 처음 책임자를 정할 때도 다들 입으로는 왕국이 이길 거라고 떠들어대면서도 어떻게든 그 자리에 앉는 걸 피하기 위해 기를 써대지 않았던가.
외무대신이 그 자리에 앉게된 건 외무대신이라는 직함 탓도 있지만, 사실 그 탓이 컸다.
그 누구도 선뜻 책임자 자리에 앉으려고 하질 않으니 정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그녀가 어찌보면 이것도 외교활동의 일환이니 그에 걸맞는 능력을 지닌 외무대신이 가야하지 않겠냐는 이유로 반쯤 강제로 그 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피했었던 자리를 다들 이제와서 앉으려고 할까?
그간 전해진 소식을 통해 제국 측에서 정말 이를 악 물고 교류전을 준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버린 지금 상황에서?
'그럴 리 없지.'
그 자리에 앉을만한 위치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지금 제가 거머쥐고 있는 권력을 유지하는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니까.
헌데 누리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욕만 먹게될, 아니 어쩌면 패배의 책임까지 지게될지 모르는 곳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간다?
오로지 자기보전밖에 모르는 권력이라는 마약에 취해버린 것들이 그럴 리 없었다.
그러니 필시 서로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는 훈훈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 펼쳐질텐데..
그 틈을 찌르고 들어간다면 어떨까.
그래도 과연 반대를 외칠까?
찬성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앉는 게 자기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외무대신의 실각이 결정되자 딱 예상했던 그대로의 난장판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듣자하니 군부대신께서 책임자 자리에 앉지 못한 걸 상당히 아쉬워하셨다던데 이번 기회에 그 아쉬움을 체워봄이 어떠신지.."
"그것 참 구미가 당기는 소리긴 합니다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최근들어 남쪽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합동훈련을 준비하고 있어서 말이지요. 뛰어난 젊은 이들을 이끌고 왕국의 국위를 선양하는 것도 충분히 영광된 일이겠지만 그래도 제 본분부터 다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남부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말이야 들어본 적도 있고, 그와 관련해서 보고를 받은 적도 있지만 합동훈련에 대해서는 들은 것도 보고받은 것도 없었다.
헌데 저렇게 자연스럽게 '훈련이 잡혀있어서 말이지요. 허허허허.'하고 웃어대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면 보고를 받은 적이 있는데 혹시 내가 다른 생각을 한답시고 듣지 못했던 건 아닐지 순간적으로 혼동이 올 지경이었다.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자리를 양보하려고 애를 쓰는 훈훈하기 짝이 없는 현장을 보고 있자니 문득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실제로 접하고 보니 개판도 이런 개판이 또 없었으니까.
자신이 이 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고성은 물론 인신공격까지 오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회의의 분위기는 훈훈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기에 신물이 났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쓰라릴 정도로 신물이 목구멍을 타고 확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지금 중요한 건 저 자기보전밖에 모르는 작자들을 그들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자리에서 치워버리는 게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으니까.
상대방에게 험한 말좀 들었다고 그새 얼굴이 살짝 빨갛게 변해버린 이들 사이로 헛기침을 하며 끼어든 건 그래서였다.
"그래서 다들 바쁘시다 이 말씀이시군요."
"흠흠, 아무래도 기존에 잡힌 일정이라는 게 있다보니.."
"남쪽의 상황만 괜찮았어도.."
다들 뚫린 입이랍시고 잘도 이런 저런 변명거리들을 내놓았지만 그걸 끝까지 들어줘야할 의무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말 그대로 되도 않는 변명거리들 뿐이었으니까.
"그러면 대체 누구를 보내야할까요?"
물론 돌아오는 대답같은 건 없었다.
그저 고요하기만 할뿐.
어찌나 고요한지 이러다가 눈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건 아닐지 걱정마저 될 정도였다.
"어쩔 수 없네요."
그렇게 눈을 데록데록 굴리는 이들을 쭉 훑어보다가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가 가죠."
"하, 하지만 왕녀님..!"
역시나 으레 예상했던 저항이 뒤따랐다.
물론, 그 저항을 분쇄하는 건 전과는 다르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니면 혹시 다른 추천할만한 인물이라도 있나요? 혹은 본인이 나서겠다거나.."
딱 그 한 마디로 충분했으니까.
나를 대신할만한 이가 나온다면 얼마든지 지금의 결정을 접고 물러나주겠다.
라고 말을 하니 대신들을 대표해 나섰던 이가 깨깽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속이 후련했다.
저들이 저토록 기를 쓰며 반대하는 이유야 뻔했으니까.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야 사실 표면적인 것일 뿐이고 그냥 자기들 일이 느는 게 싫은 거다.
'역겨운 작자들.'
그리 읊조리며 속으로는 비소를, 겉으로는 미소를 지은 채 그대로 회의를 마무리했다.
대신들을 찍어누르는데 성공한 이상 남은 관문은 이제 하나 뿐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부분만큼은 어찌될지 아무리 자신이라도 예상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가능성이 낮지만은 않다고 봤다.
대신들을 찍어누르는데 성공한 이상 그걸 빌미로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다는 점을 피력한다면 아무리 어머니라도 결국 승인하실 수밖에 없을테니까.
그래도 나름대로 난항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마지막 관문에 임했는데..
"뭐, 그래. 왕위에 오르기 전에 한 번쯤 외국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생각외로 쉽게 승인이 떨어졌다.
그래서 좀 얼떨떨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이렇게 쉽게 허락이 떨어질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그뿐만이랴.
다치지 말고 돌아오라며 왕실이 지닌 무력의 한축인 근위대를 내어주기까지 했다.
디아나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을 이와 합류하여 교국으로 떠나게 되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렇게 교국으로 떠나게 되니 다시금 상상이라는 것이 머릿속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은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그날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으니 그때 받았던 충격이 조금이나마 희석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날 이해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왕도를 떠나고 나서 처음 며칠동안은 그러한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기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그대로만 된다면 정말 소원이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상황이 뒤바뀐 건 교국에 입국하고 나서부터였다.
언제 가슴을 부풀어오르게 했냐는 듯 잔혹하기 짝이 없는 광경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어 재생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광경 속에서 이안은 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이쪽을 경멸하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실제가 아닌 상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그토록 가슴을 후벼팔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껏 교국까지 와놓고선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건 그 탓이 컸다.
만에 하나 상상에 불과한 그것이 현실이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물론,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숨어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야 달라지는 게 없을테니까.
해서 준비를 했다.
결정적인 상황을 기다린다는 핑계를 대가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하고서 네 앞에 섰건만..
너와 얼굴을 맞댄 순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준비들은 모두 불필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당황한 듯 멈칫하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는 널 잡지 못했던 건 그래서였다.
그동안 해왔던 준비들이 모두 헛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꼭 마치 그날밤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알몸으로 내동댕이쳐진 것만 같은 기분.
그 기분을 느끼며 조심스레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망설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