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제국과 교국의 경기도 끝났고 하니 이제는 우리가 나설 차례였다.
다만, 바로는 아니었다.
1차전에서 제국 측이 보여준 압도적인 퍼포먼스 때문인지는 몰라도 회장 내의 분위기는 상당히 과열되어 있었고, 그게 혹시라도 사고로 이어질 걸 우려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지가 힘들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진행을 맡은 이가 15분 동안 휴식하겠노라고 선언했으니까.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밖에 나가서 먹을 걸 사오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고, 덕분에 회장을 빠져나가는 이들의 수가 꽤 많았다.
물론, 저들하고는 다르게 우리는 쉴 수가 없었다.
15분간 쉰다는 소리는 이제 15분 뒤면 경기 시작이라는 소리기도 했으니까.
"순서는 기존에 정해두었던대로 가는 거지?"
그 말을 꺼내든 건 다름아닌 디아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의 말대로 진행될 경우 선봉으로 나서는 건 그녀가 될테니까.
그랬다.
우리 측의 작전은 초전박살이었다.
쉽게 말해서 선봉으로 강력한 카드를 내서 그것 하나로 상대 측을 모두 정리한다는 식의 작전이랄까.
그런 작전을 채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우리 측의 전력이 노출되는 걸 최소화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찌감치 결승 자리를 확정지은 제국 측 참가자들에게 혼동을 주기 위함이었다.
우리 측 선봉으로 디아나가 나와서 상대 측 참가자들을 혼자서 죄다 때려잡으면 그걸 보고 제국 측 참가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야 뻔하지. 뭐.'
보나마나 디아나가 우리 측의 최대 전력이라 판단하고 '디아나'를 잡기 위한 엔트리를 짜올 것이다.
속임수라는 걸 눈치챌 가능성?
그딴 게 있을 리 없지.
여기에 최종 승리의 향방이 걸려있는만큼 바이올렛도 가진 바 정보를 양껏 풀었을테니 아마 바이올라나 다른 제국 측 참가자들도 내가 왕년에 한가락 했다는 사실을 듣긴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바이올렛을 거쳐 전해진 것이 그것뿐이겠는가.
당연히 내가 예전만 못한 상태라는 것또한 저쪽의 귀에 들어갔겠지.
그러니 저들이 이게 실은 기만작전이라는 걸 눈치챌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날 팀 내에서 2순위 정도로 보고 있지 않을까. 혹은 그 아래일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만큼 우리가 기존의 계획을 밀고 나간다면 저들은 철저히 '디아나'에게 초점을 맞춘 엔트리를 들고 나올테지.
그리고 그걸 고스란히 맞받아친다는 것까지가 당초 우리가 나름 긴 회의를 통해 세운 계획이었는데..
"계획을 살짝 바꾸죠."
왠지 그게 끌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생각했던 것보다 제국 측에 대해서 많이 파악하질 못한 상태였으니까.
"바꾸자고?"
물론,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기껏 열심히 계획을 세워놨는데 경기 시작을 코앞에 두고 그것을 바꾸겠다고 하니 거부감이 들었던 것일까.
디아나로부터 제법 격렬한 거부의 반응이 튀어나왔다.
반문을 하면서 입맛을 쩝하고 다시는 꼴이 어찌보면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제국 측 참가자들이 압도적으로 상대방을 때려부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몸이 근질근질하기라도 했던 걸까.
저걸 납득시키려면 듣기에 꽤 그럴 듯한 이유가 필요할테지.
참으로 다행히도 이런 상황을 대비해 미리 준비해놓은 게 하나 있긴 했다.
말을 꺼내기 전에 주인공 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처음 보는 것같은 진의 얼굴은 어쩐 일인지 썩 좋지 않았다.
경기가 코앞이라 생각하니 슬슬 긴장감이라는 놈이 그녀의 안에서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 리 없지.'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 걸꺼다.
출전도 안 하는데 긴장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뭣보다 진은 우리의 대화에 딱히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보다는 다른 쪽을 더 신경쓰는 듯한 눈치랄까.
그게 아니고서야 한 명도 아니고 무려 세 명이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자길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으니까.
"진?"
이대로가면 15분밖에 되지 않는 휴식시간이 다 끝날 때까지 계속 저러고 있을 것만 같아서 조심스레 주인공 년의 이름을 불러봤다.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그녀의 고개가 우리 쪽으로 돌아온 건 그 직후였다.
"응?"
다른 사람들한테 반말을 들을 때는 딱히 아무 느낌도 안드는데 유독 이 년을 상대할 때만 낯간지러운 느낌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몇 번을 겪어도 참 적응이 되질 않는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진의 물음에 답했다.
"혹시 선봉 괜찮겠어?"
역시나 우리의 대화를 귀담아듣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면 내가 자길 부른 시점에서 내 용건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을텐데 말이다.
헌데 지금 진의 얼굴에서 그런 기색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설마 이런 용건 때문에 자길 부른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건지 놀란 듯한 기색이 가득할 뿐.
"선봉? 내가?"
하는 말만 들으면 그래도 괜찮겠냐고 묻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기존의 계획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듯한 표정과 무엇때문인지 알 수 없는 당황이 그녀의 얼굴 위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본인은 그걸 나름대로 숨겨보겠다고 숨긴 것 같은데 상황 자체가 워낙 갑작스럽다보니 진이 잽싸게 뒤집어 쓴 가면 위로 그러한 감정들이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다. 물론,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급하게 뒤집어 쓴 가면이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는지 빈틈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메꿔졌다.
'흠..'
당황이라.
무엇으로 인한 당황일까.
그거야 솔직히 뻔했다.
'성녀.'
분명 그것 때문에 당황한 게 틀림없었다.
의문인 점은 대체 왜 성녀를 피하냐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한 번 떠올린 적 있는 의문이었지만 암만 생각해봐도 이거다하고 떠오르는 게 없는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단은 뒷전으로 미뤄놓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응, 가능하겠어?"
이렇게 묻는데 여기서 '힘들겠는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려면 그만한 핑계를 대야하는데 떠오르는 게 없을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진이 보인 반응은 딱 내가 예상한 범위 내였다.
"가능이야 하지만은.. 괜찮을지 모르겠네.."
시킨다면 하겠지만 선봉으로 나가서 활약할 자신은 없다.
진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진의 자신감없는 태도에 이끌린 앨리스가 우리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래, 본인도 자신없다고 하잖아. 그냥 원래 계획대로 가자."
어쩌면 앨리스만큼은 내 편을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반대하는 입장인 건 그녀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내게 원래 계획대로 진행할 것을 종용하면서 그녀가 눈빛을 통해 내게 질문을 던져왔다.
-이제와서 계획을 바꾸려는 이유가 뭐야?
반대하는 입장이라는 걸 밝혔음에도 굳이 이유에 대해 묻는 건 내가 어떤 이유를 대느냐에 따라서 입장을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말해줬다.
굳이 이제와서 계획을 바꾸려하는 이유를 말이다.
"아직 네 정확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
그러니 기존에 세운 계획을 포기하게 되더라도 널 선봉으로 세워서 네 정확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그래야 좀 더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는 게 가능할 것 같다.
대충 그런 뉘앙스의 말을 댔더니 그런 내 말을 들은 앨리스가 잽싸게 노선을 갈아탔다.
그녀가 듣기에 꽤 그럴듯하게 들렸던 모양.
내 말에서 설득력을 느낀 건 앨리스 뿐만이 아니었다.
디아나또한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으음, 확실히 제대로 된 작전을 세우려면 적은 물론 아군의 상황까지 확실하게 파악해둘 필요가 있긴 하지."
내 말이 그 말이었다.
그 왜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제국 측 참가자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지피는 성립이 힘들겠지만 그러니 더더욱 지기라도 이룰 필요성 있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이제 쉬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
그런만큼 더는 설득에 공을 들인 시간도 없었기에 자꾸 뒤로 슬금슬금 빼기만 하면서 타임오버를 노리는 주인공 년을 상대로 회심의 말을 내뱉었다.
"나가서 활약하지 못해도 괜찮아. 대신 네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만 보여주면 돼. 나머지는.."
슬쩍 말꼬리를 늘어뜨리면서 내 옆에 앉아있는 디아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처리하지 못한 건 이 사람이 알아서 처리할테니 안심하고 선봉으로 나서도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내 행동 속에 담긴 뜻을 알아봤는지 디아나가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앨리스야 진작에 돌아섰고, 끝까지 반대 입장에 서 있을 것만 같았던 디아나까지 내 말에 찬동하는 모습을 보이니 졸지에 거절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버렸다.
이 정도면 이쯤에서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일 법도 하건만 역시 주인공이라고 해야할까.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으음.."
그래도 자신이 없다고 어필이라도 하는 것처럼 침음성과 함께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얼굴 위로 내비치는데 무엇을 노리고 있는 지가 눈에 빤히 보였다.
보나마나 아까처럼 타임오버를 노리고 있는 거겠지.
허나 세계는 자신이 사랑해마지않는 주인공인 그녀의 활약상을 원하는 듯 했다.
"계십니까? 아직 출전 순서를 제출하지 않으셔서 왔습니다만.."
이제 몇 분 뒤면 경기 시작인데 아직도 출전 순서를 제출하지 않고 뭐하냐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누군가 우리가 신세를 지고 있는 방의 문을 다급하게 두들겨댔으니까.
참으로 시기적절한 재촉이었고, 덕분에 선봉 자리를 진에게 떠넘길 수 있었다.
잽싸게 선봉 자리에다가 진의 이름을 적어놓고 차봉에다가 디아나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그 둘의 뒤를 앨리스와 내가 이었다.
그렇게 완성한 출전 명단을 들고 곧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남은 시간이라고 해봐야 이제 3분여정도가 고작이니 한시라도 빨리 그것을 진행 측에 전해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새롭게 짠 순서가 확정이 될테고 확정이 되야 주인공 년도 딴 말을 못하지 않겠는가.
"다음에는 적어도 5분 전까지는 제출 부탁드리겠습니다."
"네네, 알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출전 순서를 확정짓고 나서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또각하고 복도를 따라 울려퍼진 구두굽소리가 막 몸을 돌려서 걸음을 내딛으려고 하던 내 몸을 잡아세웠다.
바이올렛의 것을 나눠받아 원래보다 훨씬 더 민감해진 감각이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익숙한 냄새가 코밑을 맴돌았다.
복숭아 같기도 하면서 어딘가 우유냄새 같기도 한 그런 냄새였다.
정확히는 그 두 가지 냄새가 절묘하게 섞여있는 그런 냄새랄까.
내가 기억하는 한 이런 냄새를 풍기는 건 딱 한 명 뿐이었다.
레이시아.
지금 내 뒤에 서서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건 그녀임이 틀림없었다.
그 사실을 확신한 순간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꼭 마치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커다란 북을 두들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떤 단어로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하나로는 부족할 게 틀림없었다.
그만큼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이 내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당혹스러웠다.
그녀가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심한 순간 언젠가는 마주치게 될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다만 그 언젠가라는 게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의 마지막 상황이 좀.. 많이 그랬으니까.
그런 걸 고스란히 목격해버린 내게 다가오려면 레이시아로서도 분명 적잖은 결심이 필요할 터.
그러니 재회의 순간은 나중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벌써..'
마무리 지었다고?
이걸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뭐라고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레이시아의 존재를 감지하고서 나도 모르게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또각하고 예의 그 구두굽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퍼졌다.
아까보다 한층 더 커진 그 소리가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좁혀졌는지를 말해주는 듯 했다.
그렇게 레이시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날 향해 다가왔다.
혹시 후다닥 달려오기라면 내가 도망이라도 가지는 않을지 걱정이라도 됐던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순간..
"그, 이곳은 참가자 분들 외에는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낯선 목소리가 나와 그녀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나와 레이시아의 재회는 불발로 끝이 났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누군가에게 일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