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52)화 (251/366)



〈 25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조금 의외였다.


레이시아가 지금 저 자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랬다.


그녀가 교국 내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디아나의 범상치 않은 반응을 통해 진작에 알아차린지 오래였지만, 설마 이 타이밍에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모습을 드러낸다면 필시 결정적인 상황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 타이밍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레이시아가 대회장 내를 눈으로 한 번  훑었다.


그 와중에 그녀와 눈이 마주친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은 꼭 기분 탓만은 아니었겠지.

아무래도 대비를 좀 해둬야할  같았다.

이렇게 일찍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머지 않아 만나러 가겠다고 내게 신호를 보낸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문제는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할 지인데..


'흠..'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 추측해보면서 한편으로는 한때 우리 측 책임자였던 외무대신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보니까 정년도 얼마 안 남은 것 같던데 말년에 고생 좀  듯 했으니까.


아무튼 그런 식으로 각국에서 찾아온 귀한 손님들에 대한 소개까지 끝나고 나니 진행을 맡은 이의 입에서 무투대회의 대진이 발표되었다.


헌데 팀 하나를 발표할 때마다 거기에 온갖 수식어들을 붙여대는데 그게 그렇게 낯간지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덕분에 팔이 근질근질거리는 걸 느끼고 있자니 드디어 자질구레한 식순들이 모두 끝난 것인지 진행자가 박수 요청과 함께 우리에게 퇴장을 지시했다.

그렇게 다시 복도 안으로 들어오고 나니 안내된 곳은 아까 신세를 졌던 대기공간이 아니라 또 다른 곳이었다. 보아하니 아까 그곳은 임시적으로 마련된 곳이었던 모양.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내용물도 아까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뭣보다..


"이야."

뷰부터가 달랐다.

아까 있었던 곳은 넓기만 하지  흔한 창문같은 것도 하나  달려있고 사방이 벽으로  막혀있어서 굉장히 답답하게 느껴졌었는데 말이다.


새로 안내를 받은 곳은 대회장 쪽이 통유리로다가 탁 트여있었다.

심지어 높이도 일반 관객석보다 높게 위치해 있어서 뷰가 거의 전망대 수준이었다.

덕분에 비로소 실감할  있었다.

교국 측이 교류전의 흥행을 위해 이를 악물었다는 걸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교잘알인 앨리스의 설명에 따르면 지금 대회장으로 쓰이고 있는  곳은 본래 교국이 세워지기 전에 이 땅에 자리잡고 있었던 고대 왕국이 남긴 일종의 유적이라 했으니까.

그걸 얼마 안 되는 준비 기간동안 마치 새로 지은 것마냥 싹 바꿔놓았으니 말 그대로 시간하고 인력을 갈아넣었다는 소리 아닌가?

제국이나 내가 몸 담고 있는 왕국처럼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곳이 그런 일을 벌였다면 솔직히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허나 교국이지 않은가.

 세계에서 크기도 가장 작고, 그만큼 국민 수도 적은 곳이 이런 일을 벌였다 생각하니 감탄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됐다.


내실이 멀쩡한 국가도 한 방에 기울어지게 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대규모 토목사업인데 그런 것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할 정도라면 교국 측에서 교류전에 많은 걸 걸고, 또 기대하고 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성향상 교국 잘 되는 꼴은 절대로 못 보는 사교도 놈들또한 이를 악물 가능성이 크니까.

마음에 걸리는 건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가 대기실이랍시고 쓰고 있는  공간.

 공간의 존재도 마음에 걸렸다.

아까도 말했듯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일반 관객석보다 높게 위치해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있는  아래에 일반관객석이 자리하고 있는 구조였다.

아무래도 각국에서 찾아오는 귀빈들과 참가자들을 위해 일부러 이렇게 지은  같은데..


만에 하나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봐도 뻔했다.

귀빈석 안에 있던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밑에 있던 일반 관객들까지 떼몰살을 당할테지.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불안증이 도진 것일 뿐이고 사교도 놈들의 실제 계획은 바이올라가 무투대회에 참가하는 틈을 노려 그녀를 습격해서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의 목숨을 해하는 것이지만..

그것밖에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단정을 짓자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우리가 들어와있는 공간이 테러를 획책하는 입장에서 너무나도 먹음직스럽게 느껴질 거라는 게 뻔히 보이는데 어찌 그런단 말인가.


이걸 단순히 내 망상이라고 치부하기도 좀 그런 것이 달랑 바이올라 하나만 잡고 끝내기에는 사교도 놈들이 이번 건을 위해 투자한 것이 너무 많았다.


제 3자라 할  있는 나조차도 '고작 이것만 먹고 끝낸다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실제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사교도 놈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누구보다  욕망에 솔직한 것들이 바로 사교도라는 족속들인만큼 당연히 아쉬움을 느낄 것이고 그런만큼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더 먹으려고 하겠지.


그러다가 제 배가 터져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필시 그럴 거다.

여태껏 내가 봐왔던 사교도란 놈들이 죄다 그랬으니까.


불안한 요소는 단순히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교국에서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된 사실 중 하나가 이놈들이 건물에 장난질을 치는 게 거의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는 거였으니까.

그런 쪽의 비리는 그 맹세의식인지 뭔지에 저촉되지 않기라도 하는 건지 제대로 지어진 건물보다 어딘가 부실한 건물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니까.

그 정도면 장난질이 거의 일상레벨이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부랴부랴 지은 이 건물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크다는  아니겠는가.

물론, 자칫 잘못하다가 그게 드러나기라도 하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또 없을테니 생각이 있는 이라면 장난질을 쳐도 평소처럼 치는  아니라 나름대로 자제를 했겠지만..


그렇게 형성된 부실함에 사교도 놈들의 수작질이 가미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와르르 엔딩밖에 그려지질 않았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광경을 상상한 탓일까.

괜히 이곳에 앉아있는게 불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어느 곳에서 놈들이 지켜보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괜히 티를 내서 좋을 게 하등 없었으니까. 막말로 참가자들의 편의를 위해 교국 측에서 대기실마다  명씩 배치해놓은 저 도우미가 사교도 놈들의 끄나풀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예상이 맞다면 놈들이 일을 벌이는 건 상황상 2일째가 될 가능성이 컸다.

헌데 괜히 여기서 뭔가 눈치챈 것처럼 허둥댔다가 놈들이 그걸 감지하고 거사를 앞당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꼬여버릴 터.

그리 되면 바이올렛이나 앨리스가 마련해뒀을지도 모르는 대응책들도 전부 유명무실해져버릴테니 여기서는 가만히 입 꾹 닫고 있는 게 여러모로 최선이었다.

억지로라도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했던  그래서였다.

계속 그것에 대해 생각해봐야 티만 날뿐이니까.


참으로 다행히도 그런 내 상황을 누군가 감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가 퇴장함과 동시에 잠시 자취를 감추었던 진행자가 단상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의외였던  진행자의 몸놀림이 꽤나 잽싸보인다는 점이었다.

여태껏 진행을 맡았던 이들은 전부 다 사제거나 사제 출신이었어서 이번에도 필시 그쪽일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방금 그 몸놀림은 평범한 사제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목이 종목인지라 사제쪽이 아니라 기사단 쪽에서 진행자를 차출해온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분명 대련 중에 사상자가 나오는 걸 막기 위한 조치겠지.

진실이 어찌되건 간에 일단 교류전의 명분 자체는 각국의 친선에 있는만큼 날이 있는 무기의 사용은 규칙으로 금지되었지만 분위기가 과열되다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말이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아까 우리가 줄을 섰던 커다란 연무대 한 가운데 자리를 잡은 진행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무투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연무대와 제법 떨어져있음에도 귀가 징징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진행자의 부름에 맞춰 먼저 모습을 드러낸  나름 홈팀 소속이라 할 수 있는 교국  참가자였다.


물론, 역시나 금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디아나만큼은 못해도 제법 다부져보이는 몸을 한 그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진행자와 살짝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순간, 반대쪽 통로에서 제국  참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바이올라는 아니었다.


통로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여성은 소다맛 젤리를 생각나게 하는 파랗고 투명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제국 측하고 우리 쪽의 작전이 겹친 듯 했으니까.


솔직히 좀, 아니 많이 아쉬웠다.


여기서 바이올라의 실력을 편린으로나마 확인하는게 가능했다면 2차전을 준비할 때 상당히 도움이 되었을테니까.


'뭐,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아쉬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교국 전이야 바이올라가 있는 이상 제국 측이 무난하게 승리를 따낼테니 결국 무투대회 우승을 위한 최대의 장애물은 다름아닌 바이올라가 될텐데 그녀의 실력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면 오픈북까지는 아니더라도 시험 전에 깜지를 들여다보고 시작하는 것 정도는 됐을테니까.


'그래서..'

어디  슬라임녀는 얼마나 치는 지 볼까.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진행자가 대련의 시작을 선언했다.

서로를 향해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보이기 무섭게 셀리누라고 소개된 교국 측 참가자가 흡사 철방망이같은 대련용 검을 꼬나쥐고 상대방을 향해 달려들었다.

초장부터 기세를 잡고 시작할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너무 정직하지 않나?'

안타깝게도 그랬다.


그래서 통할  없다고 생각했는데..


"..응?"


이게 웬걸?


배를 노리고 가한 찌르기가 그대로 먹혀들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먹혀'들었다.


쭉 내지른 대련용 검이 그대로 엘링이라는 소개된 제국  참가자의 배를 뚫고 들어가버렸으니까.

설명만 들으면 굉장히 끔찍한 상황이었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으레 뒤따라야할 비명도, 피같은 것도 터져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표정마저도 굉장히 평온해보였다.


아마 모기가 와서 물어도 저것보다는 덜 평안해보이지 않을까.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젤리같은 몸은 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리적인 공격에 완전히 면역인가?'

설마 그렇지는 않을 거다.


그보다는 남들보다 타격이 덜한 정도겠지.


다만 방금 교국 측 참가자가 그랬던 것처럼 찌르기는 자제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무슨 짓을  건지는 모르겠지만 교국  참가자가 박힌 검을 빼내질 못하고 있었으니까.

"으음.."

나와 비슷한 감상을 느꼈는지 연무대 위의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앨리스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찌르기가 먹히지 않는다는 건 그녀의 무기 중 하나인 비도술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기껏 열심히 비도를 던지면 뭘하겠는가.


분명 저러고 끝나버릴텐데.


그렇다면 베기 또는 패기가 정답이라는 소린데..


"저런 걸로 벨 수는 있을지 모르겠네요."

여전히 제국  참가자의 배에 박혀있는 대련용 검, 아니 쇠몽둥이를 보며 그리 중얼거리고 있자니 디아나의 의견은 또 다른 듯 했다.

"마음만 먹는다면야 못 벨 것도 없지."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느껴지는 걸 보면 뭔가 좋은 상대법이라도 생각난 모양.

그렇다면  슬라임녀는 디아나한테 맡겨두면 되겠지.

그런 식으로 2차전에서 상대하게될 가능성이  제국 측 참가자에 대한 대처법을 마련하고 있는 사이 연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대련의 향방은 점차 슬라임녀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졸지에 무기를 고스란히 헌납하게된 교국 측 참가자가 어어하며 당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동안 슬라임녀가 그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으니까.


'으이구..'

차라리 깔끔하게 무기를 포기하고 박투로 갔다면 상황이 반대가 됐을 수도 있었을텐데.

어버버하다가 쭉 밀려버리는 꼬라지가 졸전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진행자로 차출된 이의 표정도  좋지 않았고.


그런 식으로 시작된 제국 측과 교국의 1차전에서 승리를 가져간 쪽은..


"승자! 제국 측입니다!"


 승리의 우위를 고스란히 살려낸 제국 측이었다.

4대 1.


압도적인 스코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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