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쓸만한 말은 아니긴 했지만, 내가 볼 때 그것보다 작금의 상황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말이 또 없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상황이 딱 그랬으니까.
지금까지 총 열 개의 문제가 진행자의 입을 빌려 출제된 가운데, 각 팀에서 맞춘 문제의 수를 헤아려보자면 우리 측이 네 문제 제국 측이 여섯 문제로 나머지 두 곳을 쏙 빼놓고 둘이서 박빙의 대결을 벌이는 듯한 형세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맞춘 문제 수만 봤을 때의 이야기고 점수로 보면..
"어.. 1위는 100점을 기록하고 있는 왕국 연합팀과 교국 팀입니다."
현실은 그랬다.
참고로 100점이라는 점수는 시작하자마자 주어지는, 말 그대로 기본 점수였다.
이러니 헛웃음이 안 나오고 배기겠는가?
열심히 문제를 맞춘 쪽은 따로 있는데 정작 아무 것도 안하고 멀뚱멀뚱 구경만 한 이들이 1위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두 팀이 진짜로 가만히 있었다는 건 아니다.
두 팀도 문제를 맞춰보려고 열심히 손을 들긴 했다.
우리 측이나 제국 쪽 참가자들의 기세가 하도 살벌해서 손을 들어올리려고 할 때마다 번번히 밀려버려서 그렇지.
아마 왕국 연합측 참가자들이나 교국 측 참가자들도 지금쯤 상당히 얼떨떨하지 않을까?
자기들은 딱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양옆에서 신나게 삽을 퍼댄 덕분에 정신 차리고 보니까 1위 자리에 올라가 있었을테니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니네가 1위라는 진행자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두 팀에 속한 참가자들은 기뻐하기 보다는 '이게 맞나?'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3위는 85점을 기록하고 있는 제국입니다."
그래도 우리보다 두 문제나 더 맞춘 제국 측의 상황은 그나마 좀 나았다.
한 문제당 10점 아니면 15점이니 지금까지처럼 삽을 푸지 않고 한 문제 정도만 제대로 맞춰도 본전 혹은 본전에 가까운 점수로 회귀할 수 있을테니까.
그에 비해 우리 쪽 상황은 어떤고 하면..
"몇 점이었죠?"
"..65점."
디아나는 또 그걸 하나하나 일일히 세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조차도 점수가 기본에서 마이너스가 된 시점에서 세길 포기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팔걸이를 움켜쥐고 있는 디아나의 손등이 허옇게 변해있었다.
여기서 이겨줘야 무투대회때 마음이 한결 가벼울텐데 나라를 대표하라고 내보낸 놈들이 제대로 하기는 커녕 긴장에 쩔어서 삽만 퍼대고 있으니 기가 막히다 못해 분노가 치밀었던 모양.
-콰직
여기서 조금만 더 자극하면 지금 앉아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뜯어서 그대로 무대를 향해 던지기라도 할 기세라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 이것만 끝나면 첫 경기인데 괜히 여기서 난동을 부렸다가 시작도 하기 전에 패널티부터 먹고 들어가는 꼴만큼은 피해야하지 않겠는가.
"참으세요."
디아나의 손등을 가볍게 두들기며 그녀를 다독였던 건 그래서였다.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화를 내고 있는 건 디아나 뿐만이 아니긴 했다.
왼편을 차지하고 있는 앨리스도, 내 바로 앞에 앉아있는 클레어도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다만 디아나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감정의 비율이 다르다는 것 정도?
디아나가 빡침 60퍼센트에 분노 20퍼센트, 그리고 황당함 20퍼센트라면 클레어나 앨리스쪽은 분노보다는 황당함의 비율이 훨씬 컸으니까.
다들 그렇다보니 졸지에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디아나라는 폭탄의 손아귀 안에서 팔걸이의 목숨을 사수하면서 동시에 클레어나 앨리스가 디아나처럼 변하지 않도록 관리를 해야 했으니까.
그러다보니 제국 측의 반응은 또 어떨지 궁금해져서 제국 측 귀빈석이 자리하고 있는 곳을 향해 슬쩍 시선을 던져봤다.
그러자 눈으로 들어온 건 우리 쪽하고 크게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아무래도 우리 쪽보다는 그쪽이 조금 더 여유가 있어보이긴 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승리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 우리 쪽하고는 다르게 이미 일찌감치 차이를 벌려둔 제국 측은 승리를 차지하는게 우리 쪽만 아니면 그 외에 누가 이기든 딱히 상관없을테니까. 설령 자신들이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긴 해도 작금의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는 건 그들또한 매한가지였던 걸까.
멀리서 확인한 바이올라의 얼굴 위에는 기가 차다는 표정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언니인 바이올렛은 어땠는가 하면..
'웃어?'
단상 위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놀랍게도 말이다.
다만 웃고 있는 것은 입매 뿐이었다.
그외에 다른 것들, 이를테면 눈같은 것들은 서늘하기 그지없어서 도저히 미소가 미소로 보이질 않았다.
아마 사신이 짓는 미소가 대충 저렇지 않을까.
제 3자인 내가 보기에도 그 정도로 불길하게 느껴지는데 그것의 타겟이 된 이들에게는 어땠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호선을 그리고 있는 바이올렛의 입매가 단두대의 날이랑 겹쳐져 보이지 않았을까.
이걸 결코 과장이라 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이 처한 상황이 그랬다.
나라에서는 국위선양 좀 해보라고 특별히 뽑아서 지원도 해주고 그랬을텐데 국위선양은 커녕 제국이라는 이름에 대고 똥칠을 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아마 이번 종목이 이대로 끝을 맺게 된다면 제국 쪽에서 참가자랍시고 출전한 저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목이 날아가지 않을까.
나조차도 할 수 있는 생각을 나보다 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이들이 못할 리 없었다.
적당한 수준의 위협은 몸을 굳게 만들어 방해만 될 뿐이지만 목숨의 위협은 때로 자신도 모르던 잠재력을 이끌어내곤 하는 법.
그래서 그런 지는 몰라도 바이올렛의 얼굴 위로 그런 미소가 자리하고 나서부터 제국 측에서 나온 이들이 조금씩 빠릿빠릿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어떤 식으로든 끝장이라 생각하니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던 모양인데..
'쟤들은 왜..'
아직도 저러고 있는 걸까.
대체 왜?
압박감이 부족했나?
이쪽도 급한대로 클레어한테 저 둘한테 제대로 안 하면 죽여버리겠다는 느낌으로다가 살기라도 쏴보라고 해야하나?
지금까지의 헛발질은 어디까지나 앞으로 치고나가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노라고 주장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 번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때부터 앞으로 쭉쭉 치고나가는 제국 측 듀오와는 다르게 우리 쪽은 여전히 삽질에 열심히였다.
아니, 삽질을 할거면 상대 팀한테 힌트라도 주지 말던가.
한끝 차이로 틀려서 점수는 점수대로 깎이고 정답은 정답대로 헌납하는 건 대체 무슨 플레이인걸까.
둘이서 하는 짓을 보고 있자니 그야말로 가관이 따로 없어서 조금씩 어깨하고 목이 땡겨오기 시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흡사 귀신이라도 씐 듯한 그 느낌에 어디 한 번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자는 심정으로 허허로이 웃고 있자니..
"잠시 5분간 쉬었다 가도록 하겠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진행자가 휴식을 선언했다.
그래봐야 5분뿐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에 참가자들이 무대를 내려가기 시작한 순간, 덩달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디아나였다.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한 마디 할까? 정신 좀 차리라고?"
나도 맘같아서는 그러고 싶었지만 씩씩대며 분개하고 있는 디아나의 손을 잡아끌어 다시 자리에 앉혔다.
들여보내줄지도 미지수였을 뿐더러 지금 디아나를 저쪽으로 보내면 한 마디만 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그 둘을 흠씬 두들겨팰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뭣보다..
"이미 늦었어요."
그 이유가 가장 컸다.
내 계산이 틀리지 않았다면 현 상황에서 우리 쪽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남은 문제를 싹다 가져오는 것 뿐이었으니까. 그것도 그냥 가져오는 게 아니라 단 한 번도 삐끗하지 말아야 했다.
한 번이라도 삐끗한다면 남은 문제를 다 맞추더라도 10점 내지 15점 차이로 제국 측에 1위 자리를 헌납하게 될테니까.
뭐, 제국 측이 아까 그랬던 것처럼 삽을 좀 퍼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안 그럴 것 같은데..'
우리 쪽이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헤으응대고 있는 반면에 저쪽은 긴장감도 떨쳐냈을 뿐더러 자신감까지 갖춘 상태였으니 말이다.
아니, 그런 걸 떠나서 여태껏 삽만 펐던 이들이 갑자기 돌변해서 단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남은 문제를 모두 때려맞춘다는게 가능키나 하겠는가?
라고 생각해서 반쯤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정답! 팔레모르 항!"
"네! 팔레모르 항! 정답입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짧다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길다고 할 수 있는 휴식시간이 끝나고 다시금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낸 둘은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급똥이라도 마려운 사람마냥 허둥지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어딘가 초연한 듯 하면서도 자신감을 얻은 듯한 모습이 되었다고 해야할까.
꼭 마치 존경해마지 않는 누군가에게 진한 격려의 한 마디라도 들은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진작에 뒈져버린 기대감이라는 놈이 되살아나는 일은 없었다.
이제와서 되살아나기에는 삽을 너무 많이 펐으니까.
대회가 재개되자 단숨에 한 문제를 맞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거기서 가능성같은 걸 느끼기에는 차이가 너무 컸다.
그럼에도 살짝 놀랐던 건 휴식을 취하러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쫄딱 젖은 생쥐마냥 초라하기 그지없었던 두 여성의 태세가 불과 5분만에 확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대체 휴게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둘의 기세가 저렇게 확 달라진 걸까.
설마 그새 누가 찾아가서 한 소리라도 했나?
아니면 여기까지 온 이상 더 떨어질 곳도 없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놓기라도 한 건가?
둘 중에 어느 쪽이 진실일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새 현격한 수준으로 벌어져버린 차이를 메꾸는 건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이대로 개망신만 당하고 끝나는 건 면할 듯 했으니까.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까짓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은근히 차이가 컸다.
모든 경쟁에는 기세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이대로 개망신만 당하고 끝나버리면 침체된 분위기가 무투대회에도 고스란히 전염될텐데 응원하러 온 이들이 하나같이 축 쳐져있으면 응원받는 입장에서도 쳐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1등까지는 힘들더라도 마이너스가 된 부분 정도는 메꾸고, 겸사겸사 꼴등만 피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관람을 이어나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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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벨리알 곶!"
"네, 정답입니다!"
'어..?'
"정답! 여신력 326년!"
"저, 정답입니다!"
'어어..?'
"정답!"
"정ㄷ..!"
"정..!"
어째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쉬는 시간동안 어디가서 문제리스트라도 훔쳐보고 온 건지 진행자의 입에서 문제가 출제되는 족족 둘의 입에서 정답이 튀어나왔으니까.
그게 두 번이 되고, 세 번이되고, 다섯 번이 되니 졸지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꼴이 되어버린 건 제국 측 참가자들이었다.
처음 몇 번만 하더라도 그들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렇다보니 얼핏보면 가소로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니들이 암만 발버둥을 쳐댄들 이제와서 결과를 뒤집는 건 절대로 무리라고 으스대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렇다보니 그들의 전략또한 자연스럽게 바뀌게 되었는데 그렇게 바뀐 전략이 무리해서 점수를 따내려하지 않고 지금껏 쌓아올린 점수를 지키는 것이었다.
괜히 무리를 했다가 오답을 말해서 점수를 깎아먹기라도 하면 상대방한테 좋은 일만 하게 되는 셈이니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리 쪽 참가자들의 상태가 갑자기 약이라도 쳐먹은 것마냥 확 바뀌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소리다.
'이게 무슨..'
이걸 역전 각을 본다고?
지금까지 출제된 문제는 다합해서 총 27문제.
진행자의 말에 따르면 총 30문제가 출제될 예정이라 했으니 남은 건 3문제뿐이었다.
그리고 파죽지세의 기세로 마이너스를 탈출해 2등까지 올라온 우리 측과 진작에 1등 자리를 공고히 한 제국 측과의 점수 차이는 20점이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이나 다름없는 상황.
덕분에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남은 세 문제 중 하나가 진행자의 입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