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뭔가를 기다릴 때는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 도래하기 마련이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그랬다.
마침내 그 순간이 도래해버리고 만 것이다.
많은 이들이 교류전의 꽃이라 여기며 기다려마지 않았던 무투대회의 날이 말이다.
사실 참가팀이 달랑 네 팀밖에 없는 시점에서 이걸 과연 대회라 부르는 게 맞을까 싶긴 했다. 참가팀이 네 팀이라는 소리는 꼴등을 해도 4등이라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다보니 친선전이라는 말이 훨씬 더 잘 어울렸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대회라 부르는 것은 여기에 많은 것, 특히나 각국의 자존심이 걸려있기 때문일테지.
고작 몇 번의 결투를 가지고 각국이 지닌 무력을 평가하는 건 무리가 있지만 여기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일 경우 상대방한테 '너네 싸움 개못하잖아.'라는 말을 듣게 되는 건 거의 필연적인 일일테니까.
다들 당연히 이를 악물 수밖에 없을 터.
허나 교류전에 참가한 이들만큼은 이를 악문 이유가 좀 달랐다. 제국 측 참가자들과 우리 측 참가자들은 특히 더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무투대회는 그 순서가 폐막식 바로 앞에 배치되어 있을 정도로 주최 측인 교국 측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목이었고, 그렇다보니 다른 종목들보다 배정된 점수가 컸다.
간단히 말해 지금은 살짝 뒤쳐지고 있는 상태라해도 거기서 최종 승리를 따내기만 하면 그 차이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점수가 그 한 종목에 걸려있다고 해야할까.
그런만큼 현재 선두로 앞서 나가고 있는 제국 측은 무투대회에서 최종 승리를 따내 지금의 격차를 완전히 굳히고 싶어했고, 그에 비해 몇몇 종목에서 패배를 맛봄으로써 상대적으로 살짝 뒤쳐져있는 우리 측은 무투대회에서의 승리를 통해 역전을 노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 사실을 일반 관람객들또한 알고 있다보니 분위기가 달아오르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앨리스의 말에 따르면 교국 측에서도 그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진작에 단속에 들어갔다고는 하는데..
'단속이 될 리가 없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교국의 뒷골목 같은 곳에서는 교류전의 향방을 놓고 거대한 도박판같은 게 열리고 있지 않을까.
필시 그럴 거다.
'그나저나..'
앨리스가 조사해보겠다고 한 건 어떻게 되었을까.
최근 들어 가장 궁금한 것은 다름아닌 그것이었다. 내 말이 믿기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한 번 조사를 해보겠다고 분명히 말했으니 분명 뭔가를 하긴 했을텐데 말이다.
왜 소식이 없는 걸까.
'아직 결과가 안 나왔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바이올라로부터 돌려받은 후 줄곧 옷장 안에 방치되어 있던 기사용 정복을 꺼내입었다.
지난 번에 앓고 난 이후로 몸이 커져버린 탓인지 꽤 오랜만에 입는 그것은 살짝 끼는 듯한 느낌을 선물해주었다.
특히나 팔뚝 부분같은 게 그랬다.
그동안 열심히 교류전을 준비한 것이 완전히 허사는 아니었는지 아무래도 그새 근육이 살짝 붙은 모양.
뭐, 그것도 움직이는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어서 그냥 이대로 입고 가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오늘을 위해 지정된 복장을 갖춰입은 뒤, 원래 몸일때 입고 다녔던 것또한 챙겼다.
교류전을 준비하며 나누었던 대화들과 세웠던 계획들이 제대로 먹혀들기만 한다면 오늘 내 차례는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내 차례가 오지 않도록 앞쪽에서 다 끝내놓기로 결정이 난 상태고, 그를 위해 오늘만큼은 디아나가 선봉에 서기로 했으니까.
그럼에도 굳이 원래 몸으로 돌아갔을 때 입을 옷을 챙긴 건 혹시 또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으니 말이다.
왕국 연합 측에서 상정 외의 강자가 튀어나와 1차전이 디아나 선에서 끝이 나지 않고 내 차례가 올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는가?
물론, 그리되면 고작 옷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원래 몸으로 돌아갔을 때 입을 옷을 챙기면 뭘하겠는가.
전과는 다르게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단이 지금 내 손에 없는 것을.
그렇기에 다음으로 들려야할 곳은 카트린느가 숙소 내에 임시로 차려놓은 공방이었다.
참으로 다행히도 어제 중화제 개발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곳에 들렸을 때 내일 아침이면 될 거라 했으니까.
지금 찾아가면 아마 수령할 수 있겠지.
해서 곧장 그곳으로 향하니 그런 날 반겨준 것은 다 죽어가는 낯짝을 하고 있는 카트린느였다.
"왔.. 왔어..?"
제조용 책상 위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한채 날 반겨주는 카트린느 덕분에 알게되었다. 다크서클이라는 게 눈 밑을 벗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정도로 카트린느의 얼굴은 시커맸다. 그래서 흡사 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는 듯 했다.
"..못 잤어요?"
걱정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는 모습이어서 그 점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랬더니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것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을 표하고 싶었던 건지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는데 그게 꼭 병든 닭을 보는 듯 했으니까.
"..괜찮은 거 맞죠?"
"으응.. 이것만 끝내고 잘거야.."
그러니 빨리 치워버리고 쉬러 가겠다는 것처럼 카트린느가 몸을 기대고 있던 테이블 밑에서부터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렇게 그녀의 손에 잡혀 테이블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약을 보관할 때 쓰는 가방이었다.
무슨 가죽으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커멓고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것이 상당히 비싸보이는 그것을 카트린느가 내앞까지 쭉 떠밀었다.
그에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들어보니 자그마한 크기와는 다르게 제법 묵직한 무게감이 손바닥 안으로 착 감겨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안에 뭘 얼마나 쑤셔넣었길래 이 작은 가방이 이렇게 묵직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 부분을 궁금해하고 있자니 카트린느가 날 향해 말했다.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한 번 열어보라고.
제법 자신만만한 어조로 건네진 그 권유를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해서 곧바로 단단히 봉해져있는 가방의 입구 부분을 풀어헤치니 눈으로 들어온 것은 내심 예상하고 있었던 것하고는 살짝 다른 풍경이었다.
안에 넣어둔 약이 서로 부딪혀서 깨지는 경우를 우려한 것인지 가방 안에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칸막이같은게 자리하고 있었다.
'어쩐지 보기보다 무겁더라니..'
그리고 그 칸막이 안에는 총 네 개의 약병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내가 부탁했던 건 두 병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두 배가 된 걸까.
대충 그런 의문을 눈동자 속에 담아서 카트린느 쪽을 쳐다보니 흡사 좀비나 낼법한 소리를 내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해대던 그녀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카트린느의 시선은 꼭 '왜?'라고 묻는 듯했다.
해서 안에 들어있는 병 중에 하나를 꺼내들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아니, 부탁했던 것보다 두 개나 많아서요."
"아."
헌데 카트린느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했다.
처음에는 깜빡 잊고 있었던 걸 막 떠올린 것같은 반응을 보이더니만 이내 슬쩍 내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으니까. 뭔가 떳떳치 못한 구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누나?"
기껏 힘들게 완성해놓고서 대체 왜 저러나 싶어서 물으니 슬금슬금 내 시선을 피하던 카트린느가 결국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그런 그녀의 발언을 대충이나마 요약해보자면..
나는 최대한 기한에 맞춰서 완성을 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미친듯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내가 부탁한 것에만 온전히 시간을 쏟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먼저 부탁받은만큼 최대한 공을 들여 완성을 하긴 했지만 시간이 부족한 탓에 오랜 시간이 들어가는 공정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포기했던 공정이 바로 중화제에 들어가는 약초들의 독기를 빼내는 작업이었다.
대충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까 누나말은.."
어쩐지 시선을 피하더라니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구만.
카트린느의 말대로라면 이건 말이 중화제지 사실상 중화제 성분이 첨가된 독에 가까웠다.
그런 걸 먹으라고 건네줬단 말이지..
최근 들어 최면놀이에 어울려주지 않았더니 그새 억하심정이라도 쌓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슬쩍 카트린느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니 그런 내 시선을 받은 카트린느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하, 한 병 정도는 괜찮아. 몸에 크게 영향이 가지 않을 정도로 조절했으니까. 해독제도 같이 넣었고."
"해독제요? 그럼 이게.."
어쩐지 부탁했던 것보다 두 병이 많더라니 아무래도 두 개씩 두 세트였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카트린느가 내가 꺼내든 또다른 병을 확인하고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가 착각한 부분을 손수 정정해주었다.
"정확히는 빨간 쪽이 중화제고 파란 쪽이 해독제야."
그리 말한 카트린느가 이내 정확한 복용 방법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만 알아듣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슬슬 한계인건지 말이 길어질수록 목소리가 잠기운에 젖어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으니까.
덕분에 끝에 가서는 숫제 웅얼대는 듯한 목소리가 되어버렸고 말이다.
"명심.. 하으음.. 절대로 연달아 마시며는.."
"네네, 알겠어요. 중화제를 연달아서 마시면 안된다는 거죠?"
"웅.."
정말로 솔직히 말하자면 좀 신기했다.
내가 밥 먹다가 자는 사람은 본 적 있어도 뭔가 말 하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리는 사람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대체 몇 시간이나 안 자고 깨어있었길래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골아떨어질 수 있는 걸까.
아까 엎드려있던 테이블에 앉아서 고개를 꾸벅꾸벅하는 것이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대로 쿵하고 머리라도 박을 기세라서 일단 급한대로 머리를 손으로 받쳐주었다.
헌데 카트린느 입장에서는 그게 꽤 편했던 모양이다.
어딘가 불편하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찌푸려져있던 카트린느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하게 변했으니까.
그뿐만이랴.
바로 조금 전까지 꾸벅꾸벅 조는 수준이었던 카트린느가 금세 코를 도롱도롱 골아대기 시작했다.
'아이구야..'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또 편안해보여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해둘 수는 없었다.
베개 역할쯤이야 상황만 허락해준다면 하루 종일도 해줄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소화해야하는 일정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게다가 피로 때문에 몸 여기저기가 결릴 게 분명한 사람을 이대로 불편한 자세로 자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카트린느가 깨지 않도록 유의하며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카트린느의 옆으로 돌아가서 그녀가 내게 몸을 기대도록 했다.
잠에 완전히 빠져버린 카트린느는 그런 내 성의를 무시하지 않았다.
제법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게감이 몸을 꾸욱하고 압박해옴과 동시에 얇은 천으로 감싸인 말캉말캉한 것이 그대로 얼굴을 꾹 눌러왔다.
그 사치스러운 감촉을 만끽하면서 카트린느의 옆구리를 양팔로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그대로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 상태로 침실까지 부축한 다음에 그대로 침대 위에 눕힐 생각으로 그리했던 것이었는데..
살짝 의외였던 점은 그 일이 생각했던만큼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몸이 몸인지라 내심 꼴사납게 낑낑댈 각오까지 했었는데 말이다.
그만큼 카트린느의 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렇게 카트린느의 몸을 내 몸을 이용해서 받쳐든 뒤 공방 옆에 딸려있는 휴게실 쪽으로 향했다.
공방만큼이나 임시적으로 꾸려진 곳이었지만 그래도 안에 있을 건 다 있었다.
그런만큼 당연히 침대도 있었고.
꽤 깨끗해보이는 그곳에 카트린느의 몸을 떠밀어서 뉘였다.
방 안의 공기가 살짝 싸늘한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만큼 이불이 두꺼우니까 괜찮을 거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휴게실 안에 구비되어 있는 담요를 이용해 대자로 널브러진 카트린느의 몸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휴게실을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으응.. 이안.."
뒷쪽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길래 걸음을 내딛다 말고 그대로 멈칫하니..
"다치면 안돼.."
웅얼웅얼대는 목소리로 된 잠꼬대가 이어졌다.
카트린느의 꿈속에서는 이미 무투대회가 시작된 것일까.
아무래도 그런가 보다.
저토록 긴장감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분명 그런 거겠지.
왠지 모르게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그대로 그곳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