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날 처음 발견한 순간 디아나가 내비친 반응은 누가봐도 놀란 사람의 그것이었다.
정확히는 몰래 엄한 짓을 하다가 딱 걸린 반응이라고 해야할까.
"이, 이안?"
그래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날 발견하고는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것들과 직면한 순간 깨달았다.
여기서 내가 뭐하다 왔냐고 묻는다고 한들 디아나가 사실대로 대답해줄리 없다는 걸 말이다.
허나 그 깨달음과 호기심은 분명히 별개의 것이어서 궁금한 건 여전했다.
지금이야 나와 딱 마주쳐버린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긴 했지만, 나로서는 디아나가 방금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던 이유가 도저히 짐작이 가질 않았으니까.
내 예상대로 레이시아가 디아나가 몰래 보낸 편지에 응한 거라면 살짝 껄끄럽긴 할 지언정 그 이상으로 든든한 아군이 생긴 셈인데..
'뭐지?'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왜 잔소리를 고봉밥으로 먹은 듯한 표정이었던 걸까.
속으로 그런 의문을 표하며 막 마주쳤을 때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당황이라는 이름의 늪속에 퐁당 빠져있는 디아나를 상대로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물론, 뭐하다가 지금 들어온 거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디아나의 어깨가 살짝이지만 움찔거리는 모습을 말이다.
허나 그게 전부였다.
설마 내가 잠도 안 자고 자길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겠지만 내게서 이런 류의 질문을 받을지 모른다는 사실 정도는 예상했던 것일까.
언제 동요했었냐는 것처럼 순식간에 침착함을 되찾은 디아나가 미리 준비한 듯한 변명거리를 입밖으로 내뱉었다.
톡하고 그녀의 손가락이 그녀의 허리춤에 매인 검을 건드렸다.
"교류전에서 쓸 예비분을 구한다고 말이다."
"예비분이요?"
"응, 원래는 본국에서 교류전 전까지 보내주기로 했었는데.."
그쪽에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교류전 날까지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래서 혹시 몰라 임시방편으로나마 쓸만해보이는 걸 찾아다닌다고 지금까지 돌아다녔다.
라는 것이 디아나가 내놓은 대답이었다.
그것을 듣고 어떻게 받아치는 게 좋을까 아주 잠깐동안 고민하다가 그냥 어울려주기로 했다.
"아, 그럼 혹시 그 쪽지가.."
그런데 디아나는 내가 자신이 받았던 쪽지에 대한 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 위로 당황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 상태로 어쩔 줄 몰라하던 것도 잠시, 이내 그녀가 내 말에 대고 시원하게 긍정을 표했다.
"그, 그래!"
급하게 내뱉는다고 목소리가 살짝 흔들린게 흠이긴 했지만.
그래서 물었다.
"그래서 찾던 건 찾으셨구요?"
정말로 걱정하는 것처럼 눈썹까지 가운데로 모으며 그리 물은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내가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주는데 거기에 대고 몇 번이고 거짓을 말하려니 슬슬 양심이라는 것이 아파오기 시작했는지 순간적으로 눈 부근을 파르르 떤 디아나가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려버렸으니까.
내 시선을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안타깝게도 손에 맞는 게 딱히 없어서."
그리고 그게 그녀가 간신히 입밖으로 밀어낸 말이었다.
"큰일이네요. 그럼 예비분 없이 교류전에 임해야 된다는 소린데.."
"예비는 어디까지나 예비일 뿐이니까. 가진 것만으로 버티다보면 그때는 본국에서 보낸 게 도착해있.. 을 거다."
양심이 주는 압박이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어지기라도 하는 것인지 간신히 끝맺어진 디아나의 발언에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이내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안심이 좀 된다는 듯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우며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급하게 뛰쳐나가셨다길래 전 또 무슨 사고라도 터진 줄 알고.."
내가 이 아침까지 잠도 안 자고 기다렸던 건 어디까지나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점을 은근슬쩍 어필해주니 디아나의 입꼬리가 순간 위로 확 치솟았다가 살짝 밑으로 내려와서 파르르 떨리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내가 잠까지 포기할 정도로 자길 걱정해줬다는 사실이 기쁘긴 한데 그런 날 상대로 거짓말이나 하고 있으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
"아무튼 큰 일 없다는 건 확인했으니.."
그런 디아나를 상대로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그대로 그녀로부터 몸을 돌렸다.
별 일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니 이만 들어가서 못 잔 잠이나 자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딱 두어 걸음 정도를 내딛었을 때였다.
"그.. 이안..!"
뒷쪽에서부터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거짓말만 들려주고 보내자니 뭔가 좀 아닌 것 같았던 걸까.
날 부르는 디아나의 목소리에는 나름대로 급박함이라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네?"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 그냥 그녀가 부르기에 반응한 것처럼 그녀를 향해 슬쩍 몸을 틀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기대도 안 했던 진실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 아니다.. 푹 쉬어라."
애석하게도 거기까지 도달하기에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 살짝 부족했던 모양이다.
날 바라보며 뭔가를 말할 듯 말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것도 잠시, 디아나가 그런 식으로 말을 얼버무려버렸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좀 아쉽긴 했다.
디아나가 날 부른 순간 거의 다 됐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허나 그 점을 티내지 않고 그녀가 서 고개를 돌린 상태에서 그대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물론, 미소를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디아나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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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나가 몰래 초대한 손님까지 그야말로 비중있는 배역을 가진 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기 때문일까.
그때부터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꼭 마치 전개 단계를 지나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극처럼 살짝 지지부진한 느낌을 주던 교류전이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태까지 느릿하게 움직였던 건 다 이때를 위해서라고 주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각 분야의 시합이 하루에도 몇 번씩 치뤄졌다.
댄스 경연부터 시작해서 퀴즈쇼 비스무리한 것까지.
왠지 모르게 어디서 본 듯한 형태의 경쟁들이 주를 이었고, 그래서 이게 대체 뭔가 싶었는데 오락거리라 부를만한 것이 극히 적은 이 세계 사람들에게는 그런 류의 경쟁들이 꽤 볼만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뭔가 시합이 치뤄진다고만 하면 거기에 사람이 미어터지는데 덕분에 살짝 걱정이 될 정도였다.
교류전의 꽃이라고 하면 역시나 기사 부문 참가자들이 행하는 결투일텐데 들러리격인 종목에도 이 정도로 사람이 몰리면 그것이 치뤄지는 날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려들지 감히 상상조차 되질 않았으니까.
동시에 교류전의 흥행을 위해 교국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또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몰려든 이들 중에 타국에서 온 듯한 이들의 비율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어찌된 일일지야 굳이 안 봐도 뻔했다.
보나마나 세계 각지에 깔아놓은 사제들을 통해 홍보를 때린 거겠지.
우리 나라에서 재밌는 거 하니까 궁금한 놈들은 구경하러 오라는 식으로 말이다.
덕분에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광장에다가 차려놓은 부스의 매출또한 날이 갈수록 늘고 있었다.
축제 특유의 들뜬 분위기에 취한 이들이 부스에 들려 돈을 뿌리고 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으니까.
그리하여 지금까지 각국에서 기록한 성적을 종합해보면 놀랍게도 우리 왕국과 제국이 호각을 이루는 형세였다. 그 밑을 왕국 연합하고 교국 측이 받치고 있었고 말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종목에 참가를 표명한 왕국하고 제국과는 달리 교국과 왕국 연합 측은 그렇지가 않았으니까.
왕국 연합 측은 급하게 준비해서 온답시고 어쩔 수 없었고, 교국 측은 혹시 모를 뒷말이 나올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선택을 한 듯 했다.
처음 클레어를 통해 그 사실을 접하게 되었을 때는 솔직히 좀 의외라고 생각했다.
제국 측 부스에서 기록한 성적과 우리 측 부스의 성적이 생각했던 것보다 크게 차이가 나질 않았으니까.
분명 첫날의 스노우볼이 쉬지 않고 굴러가 시간이 지날수록 차이가 확 벌어질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건 아마 나와 관련된 난동사건 때문에 교국 측에서 남성을 동원한 호객행위를 금지시킨 것도 있겠지만..
"흉터제거제는 대체 언제 들어오는 거에욧!!"
"여기 미백제도 다 떨어졌는데요?"
상대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사기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괴랄하기 짝이 없는 카트린느의 솜씨가 듬뿍 담긴 약들이 본격적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것이 컸다.
덕분에 두 품목은 그야말로 부스에 내놓는 족족 팔려나갔다.
아마 거기서 그쳤다면 지금 정도로 차이를 좁히는 건 힘들었을 것이다.
부스 한 곳이 아무리 선방을 해봐야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아마 정확히 그 시점이었을 것이다.
카트린느가 몸 담고 있는 부스를 주제로 삼은 소문들이 암암리에 돌기 시작한 것은.
물론, 우리에게 해가 되는 소문은 아니었다.
주로 어느 왕실, 어느 지체높은 귀족이 거기서 파는 것과 똑같은 걸 사용한다는 식의 소문이었으니까.
누가 퍼뜨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퍼지기 시작한 그 소문의 효과는 확실했다.
덕분에 카트린느가 힘을 빌려주고 있는 부스는 교류전을 구경하러 온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 번은 들려야하는 명소 비스부리한 취급을 받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영향이 옆부스로까지 번져나가면서 다른 부스들의 매상이 덩달아 뛰기 시작한 것이 아마 지금의 결과를 불러들인 것이겠지.
그렇기에 굳이 확인하지 않고도 확신할 수 있었다.
소문과 관련해서 손을 쓴 이의 정체를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웠으니까.
흥미로운 점은 소문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레이시아는 종종 카트린느의 힘을 빌리곤 했으니까.
그랬다.
나는 해당 소문을 퍼뜨린 주범으로 레이시아를 의심하고 있었다.
다만 이 와중에 의문인 점이 딱 하나 있다면 기껏 도착해놓고서 왜 모습을 드러내질 않냐는 것이었다.
'짐작가는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아마 마음에 걸렸던 게 아닐까?
시간이 꽤 지났다고 하지만 레이시아의 머릿속에는 내가 자길 피해 도망치던 광경이 고스란히 남아있을테니 말이다.
그런 거라면 레이시아가 섣불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내가 그녀였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행동했을테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평생 숨기고 살아가야할 치부를 들켜버린 꼴이니 말이다.
혹시 내가 자기를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지는 않을지.
그리고 실제로 그리되면 얼마나 아플지 감히 상상이 되질 않아서 두려웠던 게 아닐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언제까지고 피할 수만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마 레이시아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타이밍은 아마도..
결투가 벌어지는 날이겠지.
그녀가 보기에 그만큼 극적인 타이밍도 또 없을테니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타국인 교국에서 이 정도로 신속하게 공작을 펼칠 정도라면?
분명 손발이 되어줄만한 이들을 데려왔다는 뜻일 거다.
누굴까.
누굴 데려온 걸까.
혹시, 디아나가 그런 표정을 하고 돌아온 것과 그 누군지 모를 이들 사이에 관련이 있는 걸까.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 누군지 모를 이들의 존재가 기꺼웠다.
어찌보면 그들하고 한 편이라고 할 수 있는 나조차도 그들의 정체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상황인데 사교도 놈들은 어떻겠는가?
그래도 신분이 신분이다보니 입국 사실을 완전히 비밀로 할 수는 없어서 윤곽 정도는 드러났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놈들 입장에서는 더 신경쓰이지 않을까?
드러난 것보다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아보이기도 할 뿐더러 크게 보면 적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늘어난 꼴이니 말이다.
그러니 아마 지금쯤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점검한답시고 바쁘지 않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바라보고 있던 곳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확 불어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24시간 돌아가는 제약기계가 되어버린 카트린느를 돕기 위해 그녀가 숙소 안에다가 차려놓은 간이공방으로 향했다.
레이시아와 얼굴을 맞대게 될 날을 고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