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이리보면 사람 심리라는 게 참 고약하면서도 우습다.
앨리스가 숨기려고 하는 부분이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저리도 이야기를 꺼내길 주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떻게든 꼭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걸 보면 말이다.
"네, 꽤 중요한 문제라서요."
호기심 혹은 흥미, 그 따위 것들을 이유로 내세워봐야 앨리스가 세우고 있는 가드를 뚫어낼 수 있을 리 만무했기에 최대한 진지해보이는 표정과 목소리를 쥐어짜내 그녀의 물음에 답을 했다.
정확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끄응하고 곤란하다는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음성이 앨리스의 입술 틈 사이에서 새어나오더니 동시에 그녀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 반응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뭘까.
뭘 숨기고 있길래 저런 반응인 걸까.
어느새 배 안쪽에 뿌리를 내린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그런 생각을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라나는게 느껴져서 그것이 얼굴까지 올라오지 못하도록 조심스레 억눌렀다. 지금 그런 걸 티내봐야 하등 도움이 될 게 없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표정을 정돈한 뒤 입 꾹 닫고 얌전히 기다렸다.
앨리스가 속으로 결정을 내리기만을 말이다.
대충 한 5분 정도 지났겠다 싶었을 때였다. 내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열심히 웅얼대던 앨리스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한숨 소리를 들은 순간 직감했다.
앨리스의 마음 속에서 결정이 내려졌다는 걸.
그래서 어느 쪽일까.
끝까지 숨길 생각인 걸까.
아니면 오픈?
그 궁금증은 금방 해결할 수 있었다.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오물대던 앨리스가 썩 내켜하지 않는 목소리로 자기가 숨기려고 했던 것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으니까.
"그.. 사정이 있어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하지만 교국에서는 일정 주기마다 특별한 의식을 하거든."
특별한 의식이라니.
단어 선정이 참 기깔나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호기심이 사그라들기는 커녕 몇 배는 더 커졌으니까.
다만 그걸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 특별한 의식이라는 게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앨리스가 그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버렸으니까.
그렇다고 그게 뭐냐고 묻기도 좀 그랬다.
앨리스의 표정을 보면 딱 여기까지가 마지노선인 듯 했으니까. 이 이상 밀고 들어가려 한다면?
기껏 열린 저 입이 다시 닫혀버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그냥 닥치고 있었다.
"그게 그러니까 음.. 기사 서약 비슷한 의식이라고 생각하면 돼."
기사 서약이라고 함은 그 번지르르한 말들을 맹세하듯 늘어놓는 행사를 말하는 것이겠지.
덕분에 앨리스가 말하는 특별한 의식이라는 게 대충 어떤 식일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기도 했다.
기사 서약이 왕과 국가에 충성을 다하겠노라고 맹세하는 의식이라면 아마 앨리스가 언급한 특별한 의식이라는 건 신앞에서 헌신을 다하겠노라고 맹세하는 식이 아닐까.
까짓거 번지르르한 말 몇 마디 읊조리기만 하면 될 뿐인 의식이 뭐가 그렇게까지 구속력이 있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세계가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특히나 이곳처럼 신이라는 존재가 실재하며 예언까지 한 소절 내려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세계라면?
신 앞에서 한 맹세는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족쇄가 된다.
그리고 그걸 어기게 되면 아마도..
"감히 신앞에서 한 맹세를 저버린 이에게는 죄인의 낙인이 찍히거든."
아니나 다를까 속으로 그런 추측을 하기 무섭게 앨리스가 손가락으로 제 이마를 톡톡 두들기며 짤막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다는 건 그 맹세인지 뭔지를 어기게 되면 그곳에 뭔가가 새겨진다는 뜻이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굳이 이 타이밍에 그곳을 보란듯이 두들겨댈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기에 떠올려봤다.
불려간 자리에서 봤던 치안책임자와 그 부관의 모습을 말이다.
그 잠깐 사이에 누군가가 내 기억을 제멋대로 주물러놓지 않았다면 둘의 이마는 잡티 하나도 없이 깨끗했다.
그렇다면 내가 착각한 것일까.
비슷한 목소리를 가지고 그 때 들은 목소리라고 멋대로 단정지어버린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면 착각을 할 여지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으니까.
목소리도 바로 옆에서 말한 걸 들은 게 아니라 환풍구를 통해 흘러들어온 걸 들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중간중간이 뚝뚝 끊어져있기까지 했으니 어느 정도 비슷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때 들은 목소리라고 착각을 해버렸을지도 모르지.
긴지 아닌지를 따져보면 그 가능성도 분명 적지 않을테지만..
'왠지 아닐 것 같단 말이지..'
대체 왜 모시는 건지 모르겠는 괴악한 신부터 시작해서 흉악하기 짝이 없는 외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놈들까지 그야말로 온갖 종류의 사교도 놈들을 전부 상대해본 내 감이 말하고 있었다.
교국 내에 사교도 놈들의 끄나풀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문제는 그 특별한 의식인지 뭔지에 대한 앨리스의 믿음이 저렇게 확고한 이상 내가 새로이 알게된 사실에 대해 말한들 쉬이 믿어줄리 없다는 점인데..
"근데 그건 왜?"
타이밍이 어쩜 이리도 공교로운지 속으로 그런 걱정을 하기 무섭게 앨리스로부터 질문이 날아들었다.
대충 그런 건 왜 물어봤냐는 뉘앙스의 질문이었다.
그걸 들은 순간 속으로 고민했다.
원래 계획은 앨리스에게 내가 알아낸 사실들을 공유하는 것이었지만 그러자니 그녀를 설득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 같았으니까.
물론, 그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앨리스가 위험에 빠지는 것보다야 좀 귀찮고 끝나는 것이 훨씬 나았으니까.
"그.. 아무래도 여자 쪽을 찾아낸 것 같아서요."
말을 하기로 결정을 내린 이상 말을 빙빙 돌릴 이유가 없었기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뭐? 어떻게?"
역시나 앨리스의 반응은 격렬하기 그지없었다.
동시에 얼굴로 날아와 꽂히는 시선이 제법 따끔했다.
나한테는 살짝 까진 걸로 뭐라고 하더니 몰래 위험한 짓을 하고 다닌 거냐고 책망이라도 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길래 황급히 손을 내저어 부정했다.
"어떻게고 자시고 우연찮게 알아낸 거라 저도 솔직히 좀 얼떨떨해요. 그때 들었던 것하고 목소리가 똑같아서 알아차린 거라.."
"그래서 누군데? 어떻게 생긴 년이야? 이름은?"
"어, 그게.."
뭐라고 말을 한다.
안 그래도 그 부분이 고민이었는데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들이 가뜩이나 어지러운 머릿속을 제멋대로 어지럽혔다.
"그, 혹시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 중에 굉장히 깐깐하게 생긴 사람 알아요?"
"깐깐하게 생긴 사람?"
"네, 대충 이런 눈매인데.."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잡아당겨서 살짝 째진 눈을 표현하니 '으음..'하는 소리를 내며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앨리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아. 근데 그 아줌마가 왜?"
아줌마라니.
어쩐지 친근함이 느껴지는 호칭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빼박인 부관 쪽하고는 다르게 그 사감녀 쪽은 아직 혐의가 확실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 분한테 부관 한 명 있죠? 그 왜 금발에다가.."
생각해보니 교국은 온통 금발머리들 뿐이라서 그 설명은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해서 꿩대신 닭이라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봤던 부관의 키를 묘사했다.
"키는 대충 이 정도였거든요?"
나름대로 설명에 공을 들여봤는데 애석하게도 그리 효과는 없는 듯 했다.
앨리스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해보였으니까.
"그 아줌마한테 부관이 있었던가..? 아무튼 그 사람이 왜?"
그 질문에는 굳이 답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답을 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이만하면 사실상 다 온 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앨리스는 금방 내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에 대해 알아차렸다.
"그럴.. 리가.."
멀쩡하던 표정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가장 먼저 튀어나온 건 역시나 예상대로 믿기 힘들다는 반응이었다.
그렇기에 딱히 섭섭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저게 당연한 반응이니까.
내 말을 듣고 곧이곧대로 믿는 쪽이 오히려 이상한 것일테고 말이다.
'아마 지금쯤..'
머릿속이 상당히 혼란스러울 거다.
그동안 굳게 믿고 있었던 '상식'과 나에 대한 믿음이 상대방을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서로 들이받고 있을테니까.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앨리스의 혼란을 가중시키기만 할 게 뻔했기에 입을 꾹 닫은 채로 그녀가 진정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약 가지러 간다더니만 왜 이리 안 와?'
디아나는 대체 언제 돌아올까하고 말이다.
그러고 있으니 앞쪽에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소리에 맞춰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보아하니 얼추 생각 정리가 끝난 듯 했으니까.
"그 말.."
그렇게 고개를 들어올린 순간 앨리스와 눈이 딱 마주쳤고, 그 순간 그녀가 내게 물었다.
확실하냐고.
"글쎄요. 혹시 모르죠. 제가 비슷한 목소리를 가지고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끙.."
"그렇지만 조사해봐서 나쁠 건 없지 않을까요? 조사해보고 만약에 아니면 다행이지만.."
굳이 뒷말은 하지 않았다.
금발머리 부관이 배신자가 맞다면 얼마나 치명적으로 작용하게 될지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 사람이 바로 앨리스였으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앨리스의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그려지고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궁금해졌다.
소속이 소속인지라 교국의 이모저모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을 그녀가 생각하는 '최악'은 어떤 모습일 것인가.
당장이라도 그것에 대해 묻고 싶어서 입술이 근질근질 거렸지만 꾹 눌러 참았다.
아마 그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방문에 대고 노크를 했고, 앨리스 쪽을 힐끔 쳐다본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건 그 때문이었다.
딱봐도 손님을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어보이진 않았으니까.
그러니 나라도 나서야하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누굴까.
디아나일 가능성은 적었다.
애초에 디아나였다면 노크를 하는 대신 곧장 안으로 밀고 들어왔을테니까.
그럼 진짜 손님이라는 뜻인데..
앨리스를 찾아올만한 사람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까칠하기가 고양이와 같아서 은근히 어울리는 사람이 적은 것이 바로 앨리스니까.
그나마 그녀와 처음 마주쳤었던 골목길에서 함께 있었던 이들하고는 좀 어울리는 듯 했지만 그녀들은 애초에 교류전을 위해 꾸려진 일행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찾아온 걸까.
그런 식으로 누군지 모를 방문자의 정체에 대해 추측하면서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문을 조심스레 밀어젖혔다.
그러자 눈으로 들어온 건..
"그, 이거.. 이곳에 전해달라고.."
나름대로 낯이 익은 얼굴의 여성이었다.
처음에는 어디서 본 건가 싶었는데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보니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디아나를 대신해 약과 붕대를 들고 온 이가 카트린느의 옆에서 조수같은 역할을 하던 이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디아나가 들고왔어야 할 것을 그녀가 들고 왔다는 건..
'무슨 일 생겼나?'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컸지만, 그것에 대해 묻기는 좀 그랬다.
물어본다고 해서 제대로된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그래도 확인 정도는 해볼만하다고 생각해서 여성이 내미는 꾸러미를 넘겨받으며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 혹시 전해달라고 한 사람은.."
어디갔냐는 뉘앙스를 담아 살짝 말끝을 흐리니 내게 꾸러미를 넘기고 자유의 몸이 된 여성이 보란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몸짓이었다.
"글쎄요. 저도 잘.."
"그런가요."
그 말을 듣고 역시는 역시라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여성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것처럼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단서가 될만한 말을 덧붙였다.
"어디 갔는지는 모르겠고, 무슨 쪽지 같은 걸 넘겨받아서 확인하더니 그대로 황급히 빠져나가던데요."
"쪽지요?"
"네."
무슨 쪽지였는지는.. 당연히 모르겠지.
거기까지 알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겠지만 지금까지 얻은 것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디아나의 행방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슨 일이 터졌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해졌으니까.
'어딜 다녀왔는지는..'
돌아오거든 물어보면 되겠지.
"아무튼 감사합니다."
"네네."
그렇게 디아나를 대신해서 수고를 해준 이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는 걸로 감사를 표한 뒤 앨리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