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44)화 (243/366)



〈 24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졸지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혼자서 난리를 피운 꼴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앨리스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눈으로 들어온 것은 엉거주춤하게  오른팔을 다른 팔을 이용해 누르고 있는 앨리스의 모습이었다.

딱봐도 새어나오는 뭔가를 막기 위한 포즈라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설마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쳤어요?"

그랬더니 앨리스가 민망해하는 듯한 표정과 함께 엉덩이를 엉거주춤하게 뒤로 뺐다.

"아, 아니?"


누가봐도 다친 게 분명한 포즈를 해놓고서는 저렇게 어색한 잡아떼기라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려했다.

한편으로는 다쳤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는 앨리스의 행동이 이해가 잘  되기도 했다.

대체 뭐가 그리 민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쳤으면 당연히 그 사실을 오픈하고 치료를 받아야하는 것 아닌가?


대충 그리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몸을 뒤로 빼다 말고 벽에 가로막혀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앨리스를 뚫어져라 바라봤더니 그런  눈빛이 주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결국 숨기려 했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그냥 약간 긁힌 거야. 이 정도는 딱히 다친 것도.."

지금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걸까.

앨리스가 변명이랍시고 내뱉은 말을 듣고  생각은  그거 하나였다.


동시에 뒷골이 살살 당겨오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팔쪽이 하도 시선을 잡아끌어서 바로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이제보니 앨리스의 몰골이 전체적으로 상당히 엉망이었으니까.

어느 정도냐면 어디 뭐 환풍구 같은데라도 들어갔다 나왔나 싶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먼지나 검댕같은 것들이 앨리스의 몸 곳곳에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아니, 대체  하고 다녔길래.."


상태가 저래서야 팔쪽의 상처가 세균에 감염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기에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일단은 손수건이 있으니 팔쪽이라도 닦아주기 위해서 그리했던 것이었는데..

"자, 잠깐만!"


앨리스가 멀쩡하지 않은 팔을 다급하게 내뻗어 그런 내 움직임을 막아세웠다.

혹시 또 뭐 상처를 숨기기라도 했던 것일까.


하는 짓을 보니 의심이 안 들래야 안  수가 없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더니 앨리스가 멋쩍어하는 표정을 한채 내 접근을 가로막았던 까닭에 대해 밝혔다.

"아니, 그.. 냄새가  것 같아서."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말을 들은 순간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다시 한 번 헛웃음이라는 것이 튀어나오려 했다.

지금 그딴  대체 뭐가 중요하다고..

적어도  생각은 그랬는데 앨리스의 생각은 다른 듯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접근을 허용치 않겠다는 참으로 쓸데없는 결의를 그녀의 얼굴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보니 내쪽에서 먼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언제까지고 이 문제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게  것만 같았으니까.


손으로 누를  있을 정도의 상처라면 그리 큰 상처는 아닐 것이다. 애초에 큰 상처였다면 손으로 누르고 있는 부분은 물론이거니와 소매 전체가 시뻘겋게 변해서 핏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겠지.


그렇지만 작은 상처라도 저렇게 비위생적인 상태에서 방치되었을 경우 심각한 문제로 발전될 가능성이 컸다.


기가 참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물러나는 쪽을 택했던 건 그래서였다.


어디  번 해보고 싶은대로 해보라는 뜻으로 뒤로 두어발자국 정도 물러나주니 흘깃흘깃 내 눈치를 살피던 앨리스가 바로 조금 전까지 제가 열려고 했던 곳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금방 씻고 나올테니까 기다려줄래?"

그러더니 그 안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아닌가.

누가 첩보원 출신 아니랄까봐 참으로 기민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이었다.


'씻어도 되는 건가?'


열리기 무섭게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버린 문을 바라보며 그래도 괜찮을까하고 걱정을 하던 것도 잠시 생각치도 못했던 상황 탓에 졸지에 방치되다시피 한 디아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앨리스가 씻고 나오는 동안 둘이서 상처에 바를 약이라도 챙겨올 생각으로 그리했던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앨리스를 보며 어이없다는 감정을 느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증거로 앨리스가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는 디아나의 얼굴 위에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맺혀있었으니까.

허세라도 부리고 싶은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것도 적당히 좀 해야지라고 혀라도 차는 듯한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표정을 하고 있던 디아나가 이내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왜?"


"아, 이 틈에 약이라도 챙겨올까 싶어서요."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는 디아나를 상대로 용건을 밝혔더니 의외로 그녀가 자기가 다녀오겠다면서 선뜻 나섰다.

이건 그동안 한소리 좀 따끔하게 해주라는 뜻인 걸까.


왠지 그런 것만 같아서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디아나가 총총걸음으로 약을 가지러 떠나고, 졸지에 홀로 남겨진 나는 앨리스의 방 앞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덕분에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앨리스에게는 나름대로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걸.

그게 아니고서야 문을 걸어잠군다는 간단하면서도 얼마 걸리지도 않는 행동을 깜빡할 이유가 없으니까.


덕분에 내 앞길을 가로막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앨리스의 방 안으로 들어선 날 반겨준 건 촤악하고 물이 끼얹어지는 소리였다.


소리는 방 마다 하나씩 딸려있는 욕실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보아하니 한창 몸을 씻고 있는 모양.

욕실 앞에 놓여져있는 것이 검댕이 덕지덕지 묻은 옷이 전부인 걸 보면 아무래도 갈아입을 옷은 물론 물기를 닦을 천도 제대로 챙겨가지 않은 듯 했다.


해서 씻고 있는 동안 그거나 챙겨주자는 생각으로 물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는 욕실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물론, 안에 있는 앨리스에게 동의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나와 그녀 사이라도 허락도 없이 상대방의 짐을 뒤지는  실례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안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가 없을 정도로 손에 힘을 실어서 그것을 두어번 정도 두들기니..


"이, 이안?"


 타이밍에 방 안으로 쳐들어올 사람이라고 해봐야 나밖에 없다고 생각한 건지 안쪽에서부터 당혹스러워하는 듯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런 그녀를 상대로 물었다.


갈아입을 옷하고 몸 닦는  쓸 천을 가져다줄테니 그것들은 어디있냐고.

"어.. 둘다 옷장 서랍 안에 있긴 한데.."


"문앞에다가 가져다 놓을테니까 빨리 씻고 나와요."

"아, 아냐 가지고 들어왔어."


문앞에 놓여있지 않길래 꼼짝없이 챙기지 않은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씻으러 들어갈  같이 가지고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말은 딱 하나 뿐이었다.


"그래요? 그럼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어, 응.."

은근슬쩍 빨리 씻고 나오라고 압박을 넣으니 그런 내 태도에서 무언가 불길한 예감같은 거라도 받았는지 앨리스가 맥아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답을 했다.

그녀에게 말했던대로 방  가운데에 놓인 접객용 테이블에 앉아 앨리스가 욕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딱히 심심하지는 않았다.


방음이 형편없는 건 교국 건물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도 되는 건지 욕실하고 거리가 상당함에도 그 안에서 울려퍼지는 소리가 내게까지 고스란히 들려왔으니까.


이를테면 거품을 잔뜩 묻힌 천으로 몸을 닦으면서 나는 슥삭슥삭하는 소리같은 것이 그랬다.

살짝이지만 야릇하게 느껴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저 정도로 무리없이 손을 움직여대는 걸 보면 상처도 그 정도라는 뜻일테니까.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이익-하고 낡을대로 낡은 문이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에 그것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다름아닌 앨리스의 차림새 때문이었다.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들어갔다길래 그런갑다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급했던 나머지 집히는대로 들고 갔었나 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욕실에서 걸어나오는 앨리스의 차림새는 단촐하기 그지없었다.

어찌나 단촐한지 몸에 걸친 거라고는 그녀의 사이즈에 비해 살짝 큰 편인 흰색 블라우스가 전부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설마 의도한 건가 싶었지만 그렇지는 않은 듯 했다.


의도한 거였다면 저토록 얼굴을 붉히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흡사 불 앞에라도 앉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앨리스의 얼굴은 빨갛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상태로 그녀가 날 상대로 변명아닌 변명을 내뱉었다.

"그, 급해가지고.."


암요. 그러셨겠죠.


어차피 제 방이니만큼 일단 대충 몸에 걸칠만한 것만 고른다음에 씻고 나와서 고를 생각 아니었을까.

말 그대로 촉촉하게 젖은 채 민망해서 죽으려고 하는 앨리스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오랜만에 한국산 카사노바 놈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혼해서 평생 같이 살 거라면 모를까 사귈거라면 성격 이런 건 볼 필요 없고 모름지기 예쁘고 잘생긴  최고라는 말이었는데..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공감이 되지는 않았던 그 말의 진짜 뜻을 오늘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치트키긴 하네..'


평소보다 더 색기가 흘러넘치는 앨리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짝 화가 났던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 완벽하게 진정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대신 아까하고는 살짝 다른 느낌으로 심장이 쿵쿵하고 뛰어대기 시작했다.

 샤워를 끝마친 탓에 촉촉하게 젖어있는 모습과 자칫 잘못하면 안쪽이 그대로 비춰보일 것만 같은 얇은 셔츠 한 장.

따로 떼어놔도 치트키나 다름없는 것들이 합쳐지니 파괴력이 어마어마했다.


덕분에 화를 낼래야  수가 없었다.


억지로 억지로 분노를 쥐어짜내려고만 하면 앨리스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와서 자꾸만 입가가 흐물흐물하게 풀어져버렸으니까.


그래서 그냥 화내는 걸 포기했다.


그리고는 앨리스를 향해서 손짓을 했다.


"이리 와봐요."

"으, 응?"


"그럼, 머리 계속 그 상태로 내버려두려고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쳐대던 앨리스를  앞으로 불러들이는데에는 그 말이면 충분했다.

다만 소파가 작은 탓에 거기에 같이 앉을 수는 없어서 대신 테이블 위에 앉도록 했다.


덕분에 셔츠 소매로 가려져 확인할  없었던 상처의 정체도 확인할 수 있었다.

'베인 건 아닌  같고..'

살짝 까진 듯한 느낌의 상처가 앨리스의 오른쪽 팔뚝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서 넘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아무튼 걱정했던 것만큼 크기가 크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하니 내 앞에 앉아 내쪽을 흘깃흘깃 돌아보며 내 눈치를 보기 바쁘던 앨리스의 기세가 단번에 살아났다.

"그치? 별거 아니라니까."


"그래도 숨긴  숨긴거죠."

다른 것보다 그 부분이 가장 섭섭했다고 말하니 오늘따라 촉촉해보이는 앨리스의 입술 사이에서 '윽..'하고 정곡을 찔린 듯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주제로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봐야 제게 좋을 게 하등 없을 거라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던 모양이다.

앨리스가 황급히 화제전환을 시도했다.

"아, 맞다. 그런데 어쩐 일이야?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면피하고자하는 의도가 또렷하다 못해 아주 선명하게 보였지만 일단은 모르는 척 어울려주기로 했다.


어찌되었든 간에 말을 하긴 해야했으니까.


물론,  전에 먼저 확인해야할 것이 있었다.

해서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때 내가 그것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하길 은근히 꺼렸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쉽게 접근할만한 문제는 아닌  했으니까.


"그 왜 저번에 있잖아요."

"저번에?"

생략된 부분이 많은 탓에 당장 짐작가는 게 없었던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길래 조금 더 힌트를 주었다.

"아버지 교단인지 뭔지하는 놈들에 대해 말해줬을 때요."


"아, 그때? 그때가 왜?"

"교국 측에는 놈들이 잠입해있을 수가 없다고 했었죠?"

그런 식으로 단정지을 수 있었던 이유가 대체 뭐냐.

딱 그리 물은 순간,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괜찮았던 앨리스의 표정이 어색하게 변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근거가 뭐길래 저렇게 표정관리조차  하나 싶었으니까.


"어, 으음.."

이번만큼은 저번처럼 흐지부지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표정과 눈빛을 통해 내비치니 앨리스가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그 상태로 누가 들어도 난감해하고 있다는  알 수 있을 듯한 음성을 흘려가며 끙끙대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어 내뱉은 말은..


"그.. 꼭 들어야겠어?"


바로 그것이었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말에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