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여차하면 눈물이라도 쥐어짤 용의가 내게는 있었다. 뭐, 쥐어짜낸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대로 나와줄지는 솔직히 좀 의문이긴 했지만 아무튼 이 자리를 빨리 탈출하기 위해서 그런 짓까지 할 용의가 있다는 뜻이었다.
헌데 참으로 다행히도 거기까지 가진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살짝 위축된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으로부터 당황이라는 반응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으니까.
그게 살짝 의외기는 했다.
생긴 것만 봐서는 분명 엄청 깐깐하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부관이 귓뜸해주고 간 나와 바이올렛간의 친분이 영향을 끼친 것일까.
뭐, 서두를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내게 있어서 그런 식으로 착각을 해준다면야 나쁠 건 없었기에 나는 굳이 리산나의 오해를 정정해주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것 덕분이었을 것이다.
난 살짝 위축된 듯한 모습만 보였을 뿐인데 자기 혼자서 질문 하나라도 잘못 던지면 엄청나게 큰일이 벌어질 것만같은 분위기를 연출해댄 탓에 민감할 수도 있는 질문 자체가 등장하질 않았으니까.
"그렇군요. 갑자기라.."
"네, 어떻게 된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다들 갑자기 표정이 이상해지더니.."
끝에 갈수록 일부러 목소리를 작게 했더니 리산나가 그 이상은 굳이 말할 필요 없다는 것처럼 손바닥을 세워 내 행동을 제지하고 나섰다.
"알겠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더 조사가 필요할 것 같네요."
"저.. 그럼 이제 끝난 건가요?"
"아, 네. 이만 돌아가보셔도 됩니다. 교류전 준비로 정신없으실텐데 선뜻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만큼이나 정중하기 그지없는 리산나의 배웅을 받으며 잽싸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물론, 날 배웅하는 리산나의 얼굴에게서 미심쩍음같은 찝찝한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짜 속내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것보다는 오늘 이곳에서 알아낸 사실을 한시라도 빨리 앨리스에게 전하는 것이었기에 최대한 걸음을 서둘렀다.
참으로 다행히도 입구에서 보았던 복작복작한 모습과는 다르게 리산나의 방 근처는 오가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이 한적해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이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제발 별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숙소를 향해 돌아가면서 머릿속으로는 앨리스를 걱정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나섰던 걸 떠올려보면 분명 제가 동원할 수 있는 수단과 연줄을 이번 일에 총 동원하겠다는 생각일텐데 자칫 잘못하면 그 수단이나 연줄 사이에 사교도 놈들의 끄나풀이 섞여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놈들이 자신들의 계획이 들켰다는 것에 화들짝 놀라서 자취를 감춘다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헌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이들을 처리해서 입막음을 하는 쪽을 택한다면?
'그래도 눈치가 있는 편이니까 쉽게 당하진 않겠지만..'
고작 그거 하나만 믿고 안심하기에는 앨리스가 지니고 있는 교국 인원들에 관한 믿음이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원래 사기도 생판 모르는 남보다 아는 사람, 그것도 신뢰하는 사람에게 당하는 것이 더 뼈아프고 피해도 큰 법 아니겠는가.
지금 앨리스의 상황이 딱 그짝이었다.
만약 사교도 놈들에게 홀라당 넘어가버린 놈들이 그 점을 이용해 그녀의 뒤를 찌른다면 눈치와는 별개로 어이없게 당해버릴지도 모르지.
이토록 서두르고 있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늦지 않았어야 할텐데..'
걸음을 옮기는 내내 최악의 시나리오라 할 수 있는 것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굳이 들여다보지 않고 억지로 외면했다.
지금 그걸 들여다봐야 걸음만 느려질 뿐이니까.
그렇게 걸음을 재촉해 우리 측 숙소로 들어서자마자 날 반긴 것은 돌아와서 보자는 내 말만을 믿고 오매불망 내가 볼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디아나였다.
"이안!"
반가움과 기대라는 감정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디아나를 상대로 이런 말을 하자니 참으로 미안했지만 당장은 앨리스 쪽이 훨씬 급했다.
막말로 데이트야 나중에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앨리스 쪽은 몇 분의 차이가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 디아나 혹시 앨리스 못 봤어요?"
아니나 다를까 내 입에서 앨리스의 이름이 흘러나오자마자 디아나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허나 그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편인 디아나라도 지금쯤 내 얼굴 위로 듬뿍 묻어나오고 있을 긴급함이라는 감정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녀가 언제 시무룩해하고 있었냐는 듯 내가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을 돌려주었으니까.
"아직 안 돌아왔는데?"
다만 내가 바라던 내용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난감했다.
아직 안 돌아왔다는 건 지금쯤 한창 조사를 위해 여기저기 들쑤시며 다니고 있다는 뜻일텐데 대체 어디를 가야 그런 그녀를 찾을 수 있을지 알질 못했으니까.
'설마..'
내가 그리 되뇌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태껏 억지로 외면해왔던 불길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 머릿속에서 크게 확대되었다.
그게 얼굴 위로 고스란히 묻어나오기라도 했던 것일까.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걱정스러워하는 표정과 함께 그 이유를 묻는 질문이 디아나로부터 날아들었다.
그 질문을 받은 순간 속으로 고민했다.
앨리스하고만 공유하고 있던 사실을 디아나하고도 공유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고민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미 무슨 일이 생겼다는 티는 다 내놓고서 이제와서 아무 일도 아니라며 얼버무려봐야 통할 리가 없으니까.
해서 잠시동안 주변을 살피다가 디아나를 내 방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이미 몇 번씩이나 드나들어 놓고 굳이 이제와서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뭘까.
도저히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얼굴을 발그레하니 붉히고 있는 디아나를 방 안으로 들인 뒤 문을 꼼꼼히 걸어잠궜다.
그리고는 내 방하고 붙어있는 방들의 기척을 살핀 뒤 소파에 앉혀놓은 디아나의 맞은 편으로 가서 앉았다.
"그.. 실은.."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는 게 좋을까.
그 부분만큼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든 간에 디아나는 왜 자기한테는 숨긴 거냐고 섭섭해할게 분명하니까. 그래서 디아나가 받을 충격과 섭섭함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교류전에서 테러를 모의하고 있는 세력이 있어요."
깔끔하게 가기로 했다.
물론,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것은 딱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급박해보이는 내 모습을 보고 뭔가 일이 터지긴 했구나라는 생각 정도는 했지만 설마 그 일이라는 것이 이런 식일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모양인지 디아나의 몸이 날 향해 살짝 상체를 내밀고 있던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뭐?"
딱딱하게 굳어있던 디아나가 간신히 입을 열어 꺼낸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날 향해 반문을 하는 디아나의 얼굴 위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 때문에 딱히 섭섭하다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디아나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아마 내가 디아나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똑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그만큼 그녀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소리였겠지.
그러니 저런 반응이 정상일 거다.
솔직히 갑자기 '머지않아 테러가 벌어질 겁니다.'따위의 말을 듣고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망상증 환자 뿐이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니 내 말을 듣고는 그걸 그대로 믿어주었던 앨리스가 살짝 신기하게 느껴졌다.
뭐, 내 말 곳곳에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섞여있어서 그랬던 거긴 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내게 그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반문을 해대던 디아나의 얼굴이 돌연 진지해진 것은 그 직후였다.
뭔가 짐작가는 게 있는 사람이나 보일 법한 반응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것은 딱 그런 류의 발언이었다.
"그럼 앨리스가 최근 들어서 자주 자리를 비웠던 것도.."
"맞아요. 나름대로 조사를 좀 해보겠다고 하더라구요."
앨리스의 진짜 소속에 관한 것은 나와 그녀만의 비밀이었기에 그 부분만큼은 최대한 숨겼다.
뭐,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숨긴 건 아니었고 잘하면 나중에 요긴하게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숨긴 것이었다.
그렇게 약간의 진실을 누락시킨채 디아나의 발언에 긍정한 뒤, 곧이어 닥쳐올 섭섭함이라는 이름의 폭풍을 견뎌낼 준비를 했다.
따지고보면 그동안 자기만 쏙 빼놓고 단둘이서 쑥덕거린 꼴이나 다름없었기에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랬구나. 어쩐지.."
이제서야 이해가 좀 된다는 것처럼 중얼대며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디아나에게서 섭섭해하는 모습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의외였다.
이건 나라도 섭섭해할만한 문제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정말 괜찮은 건가?
표정만 보면 그런 것 같긴 한데 말이다.
아니면 혹시 티내지 않고 속으로 삭히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점이 걱정이 되서 지나간 일을 들쑤시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까지 감수해가며 디아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 괜찮으세요?"
괜찮은 거냐고.
혹시 섭섭하지 않냐고.
"응?"
그런 뉘앙스로 질문을 던져봤더니 의아해하는 반응이 돌아오더라.
"아니, 그.. 어찌보면 제가 속인 거나 다름없으니까.."
혹시 그 점이 섭섭하게 느껴지지 않냐고 물으니 '아.'하고 탄성 비스무리한 소리를 내며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있던 디아나가 이내 쓰게 웃으며 날 향해 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뭐, 그런 걸로.."
섭섭하겠냐면서 손을 휘휘 저은 디아나가 이내 날 향해 물었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거 아니었냐고.
크게 보면 그 말이 맞긴 했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렇지? 그리고 뭐, 지금이라도 말해줬으니까."
섭섭할 이유 자체가 없다며 디아나가 그 주제를 일단락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는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예쁜 사람일수록 성격도 좋다더니만 지금 디아나의 모습이 딱 그랬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디아나가 토라지면 어떻게 달래줘야할지 고민이 컸는데 말이다.
그런 내 심정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묻어나오기라도 했던 것일까.
"왜? 혹시 걱정했어? 내가 삐지기라도 할까봐?"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디아나가 이내 피식하고 웃으며 그리 물어오길래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했다.
"솔직히 좀.."
"뭐, 다른 문제였다면 확실히 섭섭했겠지만 이건 성격이 좀 다르니까."
저 말이 왠지 경고처럼 들린 건 과연 기분 탓이었을까.
거기에 대고 뭐라 답을 하기가 애매해서 어색하게 웃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게 정말이라면 큰일이네.. 지금이라도 나가서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확실히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봤던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다야 그 편이 차라리 효과적일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해서 앨리스를 찾을 수 있다면 말이다.
'못 찾겠지 아마.'
분명 그럴 거다.
교국이 홈그라운드인 앨리스와는 달리 이쪽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조사하고 있는 사안이 사안이다보니 분명 은밀행동을 취하고 있을텐데 그런 앨리스를 교국의 지리도 잘 모르는 우리가 찾는다고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떠올린 방법이 바이올렛 쪽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동생만큼은 아닌 듯 하지만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하고는 궤를 달리하는 후각을 지닌 그녀이니만큼 적당한 물건만 있다면 냄새를 통해 앨리스의 행방을 추적하는게 가능할테니까.
그런 쓸만한 방법을 떠올려놓고서 곧장 그쪽으로 향하지 않았던 건 어찌되었든 간에 이곳에 들리긴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렛의 후각이 아무리 뛰어나도 실체도 없는 걸 쫓으라 할 수는 없으니 일단 이곳에 들려서 앨리스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없으면 적당한 물건을 챙겨서 그쪽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내 당초의 계획이었고, 앨리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이상 그대로 움직이려 했다.
어찌보면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나 혼자서 유난을 떠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가만히 앉아있다가 비보를 전해듣는 것보다야 차라리 내가 좀 쪽팔리고 끝나는 편이 몇 배는 나을테니까.
그래서 디아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곧장 앨리스의 방이 있는 곳으로 향하니..
"응? 이안?"
눈으로 들어온 건 막 제 방 안으로 들어서려는 앨리스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