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42)화 (241/366)



〈 24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번 일이 이렇게 커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이다.

분명 바이올렛의 입김이 닿은 거겠지.


'그래..'


생각해보면 교국 측이 이번 건을 들출 이유가 하등 없었다. 아무리 공명정대한 진행을 지향한다 하더라도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번 건을 들춰봐야 자신들에게 득이   하등 없을테니까. 오히려 일방적으로 손해만 볼 가능성이 크니 개인이라면 모를까 교국이라는 집단에게 있어 이번 건은 '덮고 지나가야할 일.'이었겠지.

그러다가 생각치도 못하게 제국 측에서 딴지가 들어와서 부랴부랴 조사에 착수하게 된 게 아닐까.


명분이야 뭐, 이번 건을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버릴 경우 자기네 부스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식이면 충분했을 것이고.

'이것 참..'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해야할지 쓸데없이 귀찮게 만들어서 짜증이 난다고 해야할지 솔직히 구분이 잘  갔다.

'그나저나..'

페로몬을 억눌러놨는데 그건 괜찮으려나?

설마 평소와 같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의심하거나 그러는  아니겠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은근히  몸을 만지작대는 바이올렛의 손길에서 그런 기색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잠시동안 나와 친밀해보이는 모습을 연출하던 바이올렛이 이내 뒤로 물러났다.


그러더니..

"조심해야죠. 곧 있으면 교류전인데 쓸데없는 일로 컨디션을 망치면  되잖아요?"

누군가로 하여금 들으란 듯이  컨디션을 걱정해주는 듯한 발언까지 한 마디 더 얹는 것이 아닌가?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으니 나중에 보자며 바이올렛이 자리를 빠져나간 건 그 직후였다.

덕분에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군가로 하여금 들으란 것처럼 내뱉어졌던 말들이 누구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를 말이다.


"그.. 제국의 황녀님하고 친분이 있으신가 봅니다?"


나와 바이올렛이 만들어내는 장면이 꽤 보기 민망했는지 안내역의 얼굴은 그새 빨갛게 변해있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 새끼가 그러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꿀밤을 멕여주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꾹 눌러 참으며 질문을 던져온 이를 향해 애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음, 글쎄요. 친하다면 친한 사이기는 한데.."


그리고는 개인사라서 이 이상은 말해줄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을 얼버무렸다.

신나게 떠들어봐야 내 밑천만 드러나게될 공산이 커서 그리했던 것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먹혀들었다.


대충 둘러대기 위해 내뱉은  말을 대체 어떤 식으로 해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내역이 이해했다는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으니까.

그러더니 생각치도 못했던 만남 때문에 시간이 예정보다 지체된 상태라는 걸 깨달았는지 그가 다시금 날 안내하기 시작했다.


무려 황녀쯤이나 되는 인물과 친분이 있어보이니 자연스레 날 대하는 태도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시키니까 한다는 식이었던 처음과는 다르게 그의 태도는 한결 정중하게 변해있었다. 그야말로 귀하신 분의 안내를 맡은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물론, 사양하지 않았다.

사양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공손하게 변한 남자의 안내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다보니 눈앞으로 나타난 것은 누군가의 집무실이었다.

나보다 한 발 앞서 굳게 닫혀있는 문 앞에 도착한 남자가 그것을 두어번 정도 두들겼다.


그러더니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듯 옆으로 슥 비켜서서 내게 길을 터주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안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말이 없었는데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걸까.


얼른 들어가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보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막상 들어가려고 하니 뭔가 살짝 찝찝해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내 내심을 짐작하기라도  것처럼 굳게 닫혀있던 문 너머에서부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셔도 괜챃습니다."


피로감이 짙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맥아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렇게 굳게 닫혀있는 문을 몸으로 밀며  안으로 들어서니 눈으로 들어온 것은 목소리만큼이나 피곤해보이는 낯짝을 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아, 거기 앉으시면 됩니다."

며칠동안  자면 저런 얼굴이 되는 걸까.


개인적으로 굉장히 궁금했다.


그 정도로 짙은 음영이 그녀의 두 눈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날 맞이하기 위해 앉아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여성이 집무용 책상 앞에 마련되어있던 접객용 테이블을 손으로 가리켰다.

해서 군말않고 그곳으로 가서 앉으니 바로 조금 전까지 제가 손에 들고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들을 탁탁 소리를 내며 가지런히 정리한 여성이 이내  맞은 편으로 와서 자리했다.


"미리 부탁해뒀으니 곧 차를 내올 겁니다."


그렇다는 건 자세한 이야기는 차가 나오고 나서 하자는 거겠지.

알겠다는 뜻으로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 뒤 맞은 편에 자리한 여성의 얼굴을 조심스레 훔쳐봤다.

그러고 있으니 든 생각은  하나였다.


'딱 사감 상이네.'


검은색 뿔테안경만 씌워놓으면 딱 그런 느낌일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깐깐해 보인다고 해야할까. 표정이나 입꼬리 같은 부분에서 꼬장꼬장함이 느껴지는데 덕분에 생각했던 것만큼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몸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피차 닥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나와 그녀 사이로 내려앉게된 어색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문 두들기는 소리였다.

"어, 들어와."


여성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문을 몸으로 밀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날 여기까지 안내했던 이와 똑같이 금발머리를 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갓 내린 탓인지 허연 김을 풀풀 피워올리는 두 개의 찻잔을 넓적한 쟁반으로 받쳐든 채 등장한 그녀가 이내  상사가 앉아있는 방향을 향해 쪼르르 걸음을 옮겼다.


쟁반 위에 올려져있던 찻잔이 테이블 위로 자리를 옮기는 건 금방이었다.

그렇게 상사의 몫과 내 몫의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그대로 뒤로 물러나려던 여성이 자연스럽게 제 상사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슨 내용일지 그리 궁금하지는 않았다.

지금 이 타이밍에 상사에게 전할 말이라고 해봐야 하나 뿐이었으니까.

분명 나와 바이올렛의 친분에 관한 것일테지.

그렇기에 그것보다는 다른 쪽이 더 신경이 쓰였다.

'흐음..'

내 몫으로 배달된 찻잔을 집어들어 입쪽으로 가져가는 척을 하면서 열심히  상사의 귀에 대고 새롭게 알게된 정보를 흘리고 있는 금발머리녀의 얼굴을 눈으로 훑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으니까.


분명 처음보는 얼굴인데 말이다.


왜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까.

'어디서 봤나?'

혹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 측 일행을 호위해주었던 이들 사이에 섞여있던 이들 중 한 명이라도 되는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느껴지는 이 익숙함은 시각적인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금발머리녀의 얼굴이 익숙했던 거라면?

그녀가  안으로 들어선 순간 바로 그런 감각을 느꼈겠지.

헌데 내가 그러한 감각을 느끼기 시작한 건 그녀가 제가 모시는 상사의 귀에 대고 말을 흘리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그렇다는 건 얼굴이 아니라 목소리에서 익숙함을 느꼈다는 뜻일텐데..


'어디서 들었더라..?'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게 신경이 쓰여서 자꾸만 미간이 구겨지려 했다. 그것을 최선을 다해 억누르면서 곰곰히 기억을 되짚어봤다.


입으로는 찻잔 안에 든 것을 후후 불면서 그리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날 의식한 탓인지 아니면 슬슬 말이 끝나가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금발머리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헌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전보다 더 안 들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익숙함이 더 강렬해지는게 아닌가?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었다.


-쿨럭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나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앨리스와 바이올렛이 열심히 찾아헤매고 있을 이가 생각치도 못했던 곳에서 튀어나와버렸으니까.


그랬다.

내게 익숙함이라는 감각을 선물해준 금발머리녀의 정체는 몰래 숨어서 테러를 모의하던 두 명 중 여성 쪽이었다.

'아니..'

분명 검증이니 어쩌니 하면서 교국 측에 범인이 있을 리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 하도 자신만만하게 말을 하길래 꼼짝없이 그런 줄로만 알았었는데 말이다.

'하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여신교의 세가 하도 강해서 사교도 놈들이 테러를 해봐야 짜잘한 수준에서 그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치안담당자의 부관으로 추정되는 이가 끄나풀로써 암약하고 있을 정도라면 그 정도 수준에서 그칠 리 없었다.

일단 일이 터지면 조사가 시작될테고 그리 되면 꼬리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일테니까.

사교도 입장에서는  그대로 자신들이 가용할 수 있는 수단 중에서 최고의 수단을 꺼내든 셈이니 이번 일에 최대한 많은 자원을 때려박으려 들겠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생각치도 못한 상황 탓에 벌렁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자꾸만 금발머리녀 쪽을 향하려고 하는 시선을 최대한 제자리에 붙잡아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착각한  아니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티를 내서 좋을 게 하등 없었으니까.

사실 최선은 여기서  부관의 정체를 까발리고 테러의 음모를 사전에 좌절시키는 것일테지만..

섣불리 시도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확신이 없었으니까.

무슨 일인가하고 부관과 함께 내쪽을 쳐다보고 있는 저 사감 타입의 여자가  부관하고 붙어먹었을지 아니면 이용당하고 있을 뿐일지가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녀의 생김새 때문이었다.

생긴 게 딱봐도 남자하고 연이 없을  같은 상이었으니까. 쉽게 말해 클레어의 못생긴 버전이랄까.


물론, 실제로  정도는 아닐 것이다.

나름대로 높은 직위에 앉아있기도 할뿐더러 거의 살육병기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 누구하고는 달리 이쪽은 그런 소문같은  없을테니까.

그렇지만 비슷한 직위에 앉아있는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분명 모종의 결핍같은 게 있을 것이다.

만약에 사교도 놈들이  점을 시기적절하게 찌르고 들어간 거라면?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만남으로 위장해 자기들과 끈이 닿아있는 남성을 저 여자의 옆에 붙이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거라면 넘어가더라도 이상할 게 없지 않을까.

자꾸만 그런 상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대서 섣불리 행동에 나설 수가 없었다.


만약  상상이 진짜라면 여기서 저 부관의 정체를 까발릴 경우 역으로 곤란해진 건 내가 될테니까.


둘의 실력이 미지수인만큼 더더욱 그랬다.


날 쳐다보고 있는 둘을 상대로 손을 내저으며 사죄 비스무리한 말을 내뱉었던 건 그래서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긴장을 해서.."

얼굴까지 빨갛게 되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겠지만 애석하게도 거기까지는 컨트롤이 불가능했다.


참으로 다행히도 지금 모습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히 있었다.

"자네는 이만 나가보도록."

"아, 네."

내 긴장의 원인을 쪽수 때문이라 판단한 건지 사감녀가 부관인 금발머리녀를 향해 손을 휘휘 흔들며 축객령을 내렸으니까.

그렇게 내 긴장의 원인 중 대충 70%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이가 방을 빠져나가고, 치안담당자와 단둘이 남게 된 나는 다시금 어색한 분위기 속에 놓이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히도 그런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차가 나오면 시작해보자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는지 여성 쪽에서 먼저 그 분위기를 깨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시작은 정중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된 자기소개였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의 신분을 밝힌 여성, 리산나가 전날 있었던 일에 대해 들려줄  있겠냐고 자신에 대해 소개할 때와 비슷한 톤으로 요청을 해왔다.


해서..


"그게 왜 그렇게 된 건지는 저도 잘.."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와 불안해보이는 표정을 쥐어짜내 시치미떼기에 들어갔다.


내가 새롭게 알아낸 사실을 앨리스나 바이올렛에게 전달하기 위해선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날 필요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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