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41)화 (240/366)



〈 24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교국 측의 요청은 굉장히 정중하고 온건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니들 빨리 와서 조사에 응해!'라기 보다는 '조사에 응해주시겠습니까?'라는 느낌에 가까웠다고 해야할까.

그렇다보니 거기에 대고 거절을 말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나름 우리 측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이들 사이에 클레어가 버젓이 끼어있음에도 그랬다.

그 난리가 일어났을때 혼자서만 태평하게 존 죄가 있다보니 그녀는 나름대로 우리가 왜 그런 요구를 들어줘야 하냐는 식의 의견을 강력하게 내세웠지만 애석하게도 쪽수에서 밀려버렸다.

결국 나름 긴 시간동안 이어진 긴급회의는 교국 측의 요청에 협조하는 쪽으로 일단락이 나버렸다.

그렇다보니 교국 측이 마련한 자리에 누가 출석할지를 정해야만 했다.

물론, 거기서도 먼저 선뜻 나선 건 다름아닌 클레어였다.

이런 걸 가지고 업보라고 하긴 그렇지만 그래도 찔리는 점이 없잖아 있다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모양.


정말로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가겠다면서 고집을 피우는 클레어를 보며 좀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레어는 그 난리가 벌어지는 내내 꾸벅꾸벅 졸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당시 현장에 어땠는지 어쩌다가 그 난리가 벌어진 건지 알 리 없었다.

'알려줄 수야 있지만..'

직접 경험한 것에서 우러나오는 것하고 남한테 들어서 기억한 것에서 우러나오는 건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거대한 규모의 행사에서 치안을 책임질 정도면 교국 측에서도 꽤나 유능한 인사라는 뜻일텐데 그만한 이가 과연 그것 하나 구분하지 못할까?

누군가 내게 의견을 묻는다면 내 의견은 당연히 부정적이었다.


그 정도로 능력이 없을  같진 않았으니까.


문제는 그런 식으로 어설픔이 까발려질 경우 일이 꼬여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었다.


내가 그쪽의 인간이라 해도 당연히 이쪽을 의심하고 볼테니까.


지금이야 참고인 신분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피의자 신분이  수도 있다는 소리다.


아주 잠깐 그 광경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니 그것만으로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그 꼴을 실제로 보지 않으려면 이번 기회에 이 일을 최대한 깔끔하게 마무리지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클레어보다는 내가 직접 나서는 쪽이 더 끌렸다.

일단 내가 나선다면 상대 측에서도 강압적으로 나오기 힘들테니 말이다. 무려 남성에다가 참가자이기도 하니 당연히 그리 될 수밖에 없겠지.

'아, 진짜 그냥 대충 넘어가면  것을..'

기적적으로 다친 사람도 없을 뿐더러 이쪽의 피해라고 해봐야 상품 몇 개가 못 쓰게 된 것이 전부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깊게 파고들어갈 이유가 있나?

벌써부터 귀찮음이 스멀스멀 몰려와서 그리 푸념하긴 했지만 교국 측이 왜 이렇게 깐깐하게 나서는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깐깐하게 나설 수밖에 없었을 거다.

무려 자신들이 치안 및 전반적인 관리를 맡기로 한 행사에서 자기네 국민에 다른 나라의 부스를 습격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교국 측이 이토록 깐깐하게 짚고 넘어가려 하는데에는 습격당할 뻔 한 쪽에 내가 끼어있었다는 점도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사건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서 자기네 국민이 남성인 날 덮치기 위해 그런 일을 벌였다고 해석할  있는 여지도 있으니까.


그런만큼 교국 측으로써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을 거다.


이번 사건의 책임소재가 어느 쪽에 있는지 어느 쪽의 과실이 더 큰지 확실하게 해놔야 나중에  건을 가지고 한 소리 듣는 일이 없을테니까.


'교국 측 의도가 그렇다면..'

거기에 적당히 어울려주면서 겁에 질린 듯한 모습도 보여주고 정 안 되면 억지눈물이라도 좀 짜주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사실 우리 측이 원인제공자였다는 생각은 감히 꿈에서라도 하지 못할테니 말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그게 최선인 것만 같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당장 조사에 응하러 달려갈 것만 같은 클레어와 다른 이들을 상대로 그 점을 나름 공을 들여 설명하니 다들 떨떠름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들이 듣기에도 나름 일리가 있게 들렸던 모양.


그래서 결국 내가 교국 측의 조사에 응하기로 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보다 빠른 처리를 원하고 있었던  교국 측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내가 대표로 조사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히자마자 그야말로 순식간에 자리가 마련되었다.

"괜찮겠어?"

"그냥 묻는 말에만 적당히 대답해주면 되는 건데요."


그러니 어려울 것도 없다는 식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디아나를 안심시킨 뒤 참으로 오랜만에 예의 그 환들이 담겨있는 병을 집어들었다.


페로몬이라는 게 정도가 과하면 저번과 같은 일을 초래하기 마련이지만 그 정도만 아니면 쓰기에 따라 굉장히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고 몸 상태가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카트린느의 말이 마음에 걸려서 그동안은 복용을 자제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오늘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왜 그러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마련된 자리에 페로몬을 풀풀 풍기면서 나타난다?


그러면 교국 측에서 조사를 맡은 이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겉으로 티를 낼지 안 낼지는 모르겠지만 속으로는 분명 '아, 이 놈이 문제였구나..'할테지.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길 원하는 나로서는 상황이 그렇게 되는 것만큼은 막아야했기에 오늘만큼은 페로몬을 억눌러놓을 필요가 있었다.


'제대로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혹시 몰라 예전처럼  안에 대고 털어넣듯 꿀꺽 삼키지 않고 입 안으로 밀어넣은 것을 최대한 잘게 씹었다.


환 형태였을 때도 혀에 닿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쓴 맛을 선물해주었던 것을 잘게 씹으니 흡사 엄청나게 쓴 가루약에다가 혀를 쳐박은 듯한 감각이 혀를 타고 엄습해왔다.


어찌나 쓴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며 눈물이 찔끔하고 새어나올 정도였다.


"디아나,  물 좀.."

"아, 여기."


당장 씻어내지 않으면 그 맛이 언제까지고 혀 끝에 남아있을 것만 같아서 재빨리 물을 부탁했다.


그렇게 건네받은 걸로 열심히  안을 헹궈준뒤 혹시라도 안쪽에 약으로부터 비롯된 불쾌한 냄새가 남아있을 것을 대비하여 이빨을 닦는  물론, 좋은 향을 풍기는 과일향의 사탕을 입 안에 넣고 열심히 굴렸다.


그런 식으로 나름 꼼꼼하게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하고 나서야 교국 측에서 마련한 자리로 출발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괜찮다는 내 말에도 안심이 되질 않았던 모양인지 오늘 유일하게 시간이 남는 디아나가 자기가 동행하겠다며 따라나서려 했지만 완곡하게 거절했다.


디아나가 따라나서게 되면 기존에 생각해두었던 작전의 효과가 약해질 가능성이 컸으니까.


따라나서려고 했던 것이  나를 걱정해서만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우리 측 숙소를 떠나기 직전까지 디아나가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하고 있길래 혹시라도 일찍 끝나면 둘이서 교류전 부스를 돌아다니자는 말로 그녀를 달랬다.

덕분에 표정이 한결 밝아진 디아나를 뒤로 한채 교국 측에서 언질을 준 장소를 향해 출발했다.


교국에서 지낸지도  되긴 했지만 그동안 돌아다닌 곳이라고 해봐야 한정된 장소들 뿐이었기에 '어디어디로 오십쇼.'라고 말한들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교국 측에서 특별히 안내자를 파견해주었다.

"아, 오셨군요."

이쪽이 남성이라는 점을 배려한 것인지 교국 측에서 배정해준 안내자는 나와 같은 남성이었다.

약속장소인 분수대에 걸터앉아있다가 날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를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니 이내 눈앞으로 나타난 것은 뭐하는 곳인지 몰라도 정신없이 바빠보이는 곳이었다.

그 정도로 수많은 이들이 눈앞의 건물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혹시 뭐, 교류전 운영본부같은 곳이라도 되는 걸까.

 뚫려있는 입구로 사람들이 줄지어 드나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개미들이 개미굴 입구를 향해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정도로 바쁘면 그 정도 사건은 그냥 흐지부지 넘어갈 것이지 뭣하러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서..

속으로 그리 툴툴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잘 따라오던 내가 갑자기 움직이질 않으니 안내역을 맡은 남성이 의아해하는 표정과 함께 방금 전에 자기가 걸음을 내딛으려 했던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니 옆문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어울릴 것같은 자그마한 문 하나가 나를 반겨주었다.

그곳을 통해 건물 안으로 진입하고 나서도 계속 걸어야만 했다.


대체 얼마나 더 걸어야하는 걸까.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카트린느의 말마따나 몸 상태가 달라져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건물 안으로 진입하고 나서부터 배가 슬슬 땡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마렵다는 뜻은 아니었고, 그 왜 근육이 욱씬욱씬 거리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표정을 편히하고 있을 수가 없었는데..


"이안?"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바로 그때였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순간적으로 철렁하긴 했지만 그 기색을 얼굴 위에서 빠르게 지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가장 먼저 눈으로 들어온 건 탐스럽기 그지없는 은빛의 꼬리였다.

그것이 누군가의 등뒤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나에 대한 반가움을 표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랬다.


뜻밖의 장소에서 맞딱뜨리게 된 이는 다름아닌 바이올렛이었다.

의외였던 점은 날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서 나와 같은 놀라움이라는 감정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꼭 마치 내가 이 시간에 여기에 올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같은 반응이길래 속으로 설마했는데..

"아, 조사 받으러 온 건가요?"


설마는  역시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그저 궁금할 뿐.


그 소식은 또 어떻게 전해들은 걸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어떻게 답을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고 있자니 바이올렛이 걱정이라는 감정을 얼굴 위에 한가득 띄워올린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교국 측에서 붙여준 이가 눈치좋게 옆으로 비켜선 타이밍에 맞춰서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리는 게 아닌가?


"괜찮아요? 듣자하니.. 험한 일을 당할 뻔 했다던데."

과연, 페로몬의 존재에 대해서 알 리 없는 이들에게는 이번 일이 그런 식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교국 측 조사원을 상대할 때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만 같아 그 사실을 머릿속에 새기면서 입을 열려 했다. 그 타이밍에 맞춰서 바이올렛이  마디를 더 얹지만 않았다면 필시 그랬겠지.

"어쩜 얼굴이.."

창백하다며 다시  번 걱정을 내비친 바이올렛이 내 어깨 위에 올리고 있던 손을 요리조리 움직여가며 내 몸을 더듬어대기 시작했다.

몸이라고 해도 끽해봐야 팔이나 어깨같은 곳이 고작이라서 겉으로만 보면 내 안위를 확인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이긴 했지만, 그 손놀림에서 사심같은 게 느껴졌던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음,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네요."


그런 식으로 한참동안이나 내 팔을 조물딱대던 바이올렛이 이내 참으로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게서 손을 떼어냈다.


그러더니..


"혹시라도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연락줘요. 기다리고 있을테니."

내  옆으로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그리 말하는  아닌가.

그래서 물어봤다.


"뭐하시는 겁니까?"

지금 이게 뭐하는 수작이냐고.

나름 불퉁한 표정을 지은 채 그리 물었더니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게 참으로 가관이었다.


"뭐하기는요. 표시를 남겨놓는 중인데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대답을 하는 태도 자체가 지극히도 당연한 행동을 했을 뿐인데 뭐 그런  묻느냐는 식이라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나하고는 다르게 바이올렛의 태도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어느새 다시금 내 어깨 위로 올라온 바이올렛의 두 손이  어깨를 감싸쥔채 그곳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그녀가  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붙인 채 속삭였다.


"나는 남이  것을 건드리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요. 흔적을 남기는 건 더더욱 그렇고."


소름이 끼쳤다.

일부러 힘주어 내뱉은 것이 한 자  자 귀에 때려박힐 때마다 오싹오싹한 감각이 등을 타고 올라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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