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40)화 (239/366)



〈 24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제서야 생각해낼  있었다.

내가 오늘 아침에 페로몬 억제제를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렇다할 사고가 없었던 건 제국 측 부스에서 술을 시음할 때를 제외하면  공간에 오래 머물러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음용으로 차려놓은 부스에 있을 때도 테이블 간의 거리가 상당해서 나와 같이 앉아있었던 이들이라면 모를까 다른 테이블에게까지 영향이 끼치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쩐지..'

 앞에서는 늘 의젓한 모습만 보이려 하는 바이올라가 답지 않게 땡깡을 부린다 했더니만 그게 꼭 술에 취해서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술뿐만이 아니라 페로몬까지 잔뜩 들이켜버린 바람에 분명 스스로를 통제할  없었던 것이겠지.

한편으로는 클레어가  지경이 될 때까지 연달아 술을 들이켰던 진짜 이유도 뒤늦게 알아차릴  있었다.

내 딴에는 분명 바이올라하고 알콩달콩한 장면을 찍어내는 내 모습을 보고 부러움에 속이 타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알고보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런저런 욕망으로 바짝바짝 마르는 목을 축이기 위해서였을 줄이야.


그러면서 결국에는 치밀어오르는 욕망을 억누르는데 성공한 것을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미련하다고 해야할지 솔직히 알 수 없었다.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 뒤늦은 깨달음일 뿐이었다.

상황이 이미 개판이 나버렸는데 그러고 나서야 개판이 되어버린 이유를 깨달아봐야 아무 의미도 없었으니까.


'미치겠네..'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아주 살짝 겁이 났다.


어쩔 수 없었다.

대충 열 명쯤 되는 여성들이 하나같이 초점없는 눈동자를 한채 무슨 좀비뗴마냥 달려든다고 생각해봐라.

겁이 나나  나나.

지금 당장이야 주위에 있는 이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을 견제한답시고 묘한 대치상황이 이뤄지고 있었지만 솔직히  상황이 지속되봐야 얼마나 지속되겠는가.

당장 먼저 나서는 이가 없어서 그렇지 참다참다 못한 누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들 그 사람을 따라 우르르 움직일테지.


분명 그럴 거다.

군중심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애초에 횡단보도에서도 누군가 한 명이 먼저 건너기 시작하면 다들 신호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우르르 따라나서지 않던가.


결국 시작이 문제지 일이 터지는  시간 문제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것이었다.


딱봐도 열 명은 넘어보이는데다가 손에 딱히 뭔가 쥐어져있는 것도 아닌만큼 일단 혼자서 저걸 돌파하는  사실상 무리였다.


그러니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텐데 지금 상황에서 내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상대라고 해봐야   명 뿐인데..

'둘 다 상태가..'


 그랬다.


'쟨 대체 저기서 뭐하는 거야..'

다른 이들처럼 페로몬에 취해버린 카트린느는 어느새 다른 여성들 곁에 합류해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름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걸 꾹 눌러 참으면서 클레어의 손이라도 빌리기 위해 그녀 쪽을 돌아보았지만 별로 성과는 없었다.

한  제대로 느끼고 나니 취기로부터 오는 노곤노곤함이 한층 더 강렬해졌는지 그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으니까.

'이걸 어쩐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사이에도 날 둘러싼 여성들의 장벽은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해서 정 안되면 진짜 때려패서라도 탈출해야겠다고 결의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안? 거기 있어?"

"이안! 거기 있으면 대답해다오!"


장벽 너머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개였다.


이 타이밍에 앨리스하고 디아나라니.


설마 둘다 날 찾아오다가 중간에 딱 마주쳐서 서로 합류하게 된 것일까.


그딴 건 나중에 천천히 알아봐도 상관없는 것이었기에 다 집어치우고 둘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입을 열었다.


"도와주세요!"


  말을 내뱉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장벽 너머에서부터 누군가 끄응하고 힘을 쓰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밀지마!!"

"밀지 말라고!!"


날 둘러싸고 있던 장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날 둘러싸고 있던 이들 사이로 팔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손 곳곳에 박힌 굳은살과 생채기 정도될까 싶은 크기의 흉터들을 제외하면  관리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새하얗고 가녀려보이는 팔이었다.

"어어어어?"


겉으로 볼 때는 힘아리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이 생긴 그 팔 위로 근육이  도드라지더니 벽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들려온 것은 앨리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외침이었다.

"좋아요. 그대로 딱 잡고 있어요."


그 말 뒤로 따라붙은 건 가볍게 땅을 박차는 소리였다.

거의 동시에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해서 곧장 고개를 들어올려 햇빛을 가린 것의 정체를 확인해보니 눈으로 들어온 건 디아나가 옆으로 밀어낸 이들  한 명의 어깨를 꽉 틀어쥔 채 물구나무라도 서듯 거꾸로 서있는 앨리스의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기예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은 움직임을 선보이며 벽을 뛰어넘는데 성공한 앨리스가 그대로 테이블 위에 착지했다.


착지 장소가 장소인지라 착지하는 순간 자세가 살짝 흔들렸다는 것만 제외하면 첩보원이라는 그녀의 정체에 아주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내 옆에 도달하는데 성공한 그녀가 곧장  향해 손을 내밀어왔다.


"이안! 잡아!"

잡으라고 외치길래 잡았더니 몸이 그쪽으로 쑤욱하고 딸려들어갔다.

그렇게 내가 앨리스의 옆에 자리하는 사이 디아나는 여성들로 이루어진 벽을 좌우로 갈라내며 그 사이로 진입하고 있었다.

없는 힘 있는 힘 다 쥐어짜내며 기껏 진입에 성공했더니만 이미 앨리스가 한 발 먼저  옆자리를 차지한 상황,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챙긴다고 하더니만 현재 디아나의 상황이 딱 그러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던 걸까.


여태껏 보여주었던 괴력에 가까운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새 자리를 메꾸기 위해 밀고 들어온 이들에게 밀린 디아나의 몸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런 식으로 이리저리 채이던 것도 잠시, 내 정조를 위해서라도 밀고 들어오는 이들부터 막고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지 다시금 기운을 차린 디아나가 이를 악물었다.


그와 동시에 펼쳐진 광경은 솔직히 말해 좀 놀라웠다.

대충 여섯 명 정도 되는 여성들을 상대로 디아나가 버티는 광경을  수 있었으니까.

'아니, 뭔 놈의 힘이..'


저게 그 극한의 위기상황에서만 발휘된다던 어머니의 빠와라는 걸까.

"빨리..! 가..!"

다만 저 상태를 오랫동안 지속하는 건 아무리 그녀라도 무리인 모양이다.

제법 비장한 어조로 나와 앨리스 쪽을 돌아보며 그리 외쳐대는데 앨리스는 딱히 사양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럼 갈까?"


오히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제 옆구리 쪽으로 끌어당긴  보며 그리 말하는데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굉장히 궁금해졌다.

어떻게 탈출할 생각인 걸까.


내가 옆구리에 끼어있는 이상 아까와 같은 곡예를 펼치긴 힘들텐데 말이다.


그리 생각하고 있자니 앨리스가 대뜸 제 품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제법 우악스러운 손길을 버티지 못하고 좌우로 벌어진 셔츠깃 사이로 얼핏 보인 새하얀 속살을 눈으로 쫓고 있자니 그런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것처럼 앨리스가 내쪽을 돌아보며 싱긋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입모양만으로..

-입하고 코 막아, 눈도 감고.


그리 말하는 게 아닌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를 생각이길래 저런 걸 주문하는 걸까. 거기까진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저걸 거절하면 신상에 좋지는 않을  같아서 잽싸게 손을 들어올려 그녀가 지시한 것들을 수행했다.


그렇게 사방이 시커멓게 변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펑하고 풍선 터지는 소리 비슷한 것이 유일하게 자유로운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더니 누군가 거칠게 기침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야! 너..! 미쳤..?! 나까지..!"


개중에는 디아나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도 섞여있었다. 구체적으로 뭐라고 말했는지까지는 기침소리에 묻혀서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속으로 그런 의구심을 피어올리고 있자니 몸이 아까처럼 어딘가를 향해 홱하고 딸려가기 시작했다.  뒤로 이어진 건 딱딱한 벽이랑 부딪히기라도  것같은 충격이었다.

"윽..!"

"괜찮아?"


세게 부딪힌  아니었지만 아픈  아픈 거여서 침음성을 흘리고 있자니  다독이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뭉클한 감각이 얼굴을 폭 감싸안았다.


"이제  떠도 돼."


이내 귓가로 울려퍼진  말에 눈 감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꿋꿋하게 감고 있었던 눈을 슬쩍 떠보니 가장 먼저 눈으로 들어온 건 제 품 안에 갇힌 날 내려다보며 싱긋 웃고 있는 앨리스의 얼굴이었다.

한 발 늦게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부스의 천장으로 추정되는 흰색의 천이 눈으로 들어왔다.

그걸 보며 생각했다.

대체 어디까지 굴러온 걸까하고.

아무튼 눈뜨는  허락받았으니 코하고 입쪽도 괜찮을  같아서 있는 힘을 다해 그곳을 틀어막고 있었던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봤다.


뭐랑 부딪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부딪힐 때 잘못 부딪히기라도 한 건지 코쪽에서 얼얼함이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괜찮을지 어떨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손을 떼어냈던 것인데..


주륵-


코쪽에서 뭔가가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 났다.


동시에 내 얼굴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던 두 개의 언덕이 빨갛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어? 코피 난다."

태연하게 저런 소리나 하고 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허하고 웃고 있자니 내게 양해를 구한 앨리스가 조심스레  코를 틀어쥐었다.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코맹맹이 소리를 내야만 했다.

다행히 상대방이 제법 눈치가 있는 앨리스다보니 의미를 전달하는데는 무리가 없긴 했지만.


"그래서 어떻게  건데요?"


"어떻게 된 거냐고?"

"에"

"그야 도망쳤지."

내가 묻는 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을텐데 말이다.


시치미를 떼겠다는 걸까. 아무래도 그럴 생각인 것 같아서 물끄러미 앨리스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으니 그녀가 거기에 대고 시선을 맞춰왔다.


"꼭 알아야 겠어?"

그러면서 왠지 모르게 위험해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이길래 거기서 포기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 아수라장 속에서 탈출했다는 거지 탈출하는데 쓰인 방법같은 것이 아니니까.

해서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니 여전히  코를 틀어쥐고 있던 앨리스가 눈꼬리를 살짝 접어보이며  생각했다고 말하는 듯한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언제까지고 어딘지도 모를 부스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기에 앨리스에게 부탁해 그녀와 함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을 것이다.


대체 얼마나 험하게 구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몸 곳곳에 묻어있는 흙먼지들을 보며 괜히 코피가 터진게 아니구나하고 생각하고 있자니 나나 앨리스보다 더 험한 몰골을 한 디아나가 벽 역할을 하고 있던 커다란 천을 걷어올리며 우리가 숨어있는 곳 안으로 들어왔다.

"이안? 괜찮..?"

아마도 코 부근이 피로 범벅이 되어있을 가능성이 높은 내 모습을 보고 디아나가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런 그녀보다 더 당황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다름아닌 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천막 안으로 들어온 건 디아나'뿐'이었으니까.

"스승님이랑 카트린느 누나는..?"


대체 어디다가 버려두고 온 거냐고 물으니 내 질문을 받은 디아나의 입이 o자로 벌어졌다. 눈쪽의 상황도 대충 비슷했다.

그렇게 동그랗게 벌어진 연분홍빛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건..

"아.."

탄식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꼭 마치 내 질문을 듣고 나서야  사람의 존재를 떠올리기라도  것처럼 말이다.

결국 디아나는 기껏 그 아수라장을 탈출한 것이 무색하게도 다시금 그 현장으로 몸을 던져야만 했다.


재밌는 점은 그렇게 디아나의 손에 이끌려 현장을 탈출하는데 성공한 둘의 몰골이 말 그대로 천지차이였다는 점이었다.

카트린느가 디아나가 막 모습을 드러넀을 때보다 더 심한 몰골을 하고 있는 반면에 클레어는 그런 현장에 있었던 것치고는 굉장히 멀쩡했으니까.

그뿐만이랴 디아나가 당혹스러워할 정도로 기세 좋게 졸고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

덕분에 디아나만 고생이었다.


꾸벅꾸벅 조느라 바쁜 제 스승을 온몸을 이용해 부축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때아닌 소란은 일단락되는  했다.

다행히 다들 심하게 맛탱이가  건 아니었는지 내가 현장에서 사라지니 소란을 피우던 이들도 금세 얌전해졌으니까.

덕분에 무안해진 이들이 나름대로 보상을 하겠답시고 우리측 부스로 들어가 이런저런 물건들을 사제낀 덕분에 생각치도 못했던 매출도 올릴 수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유야무야 마무리되는 것 같았던 사건이 재점화된 것은 그 소란에 관해서 교국 측에서 우리 쪽으로 문의를 해오면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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