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어느 분야가 됐든 간에 전문가라 부를 수 있을만한 경지에 오른 이들은 그 나름의 카리스마가 있는 법.
그리고 그건 카트린느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자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것이 튀어나오니 그녀는 오늘 하루동안 보여주었던 어설픈 모습들은 전부 집어치우고 지적인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카트린느가 끼어드니 내게 손을 맡기고 있던 여성의 얼굴 위로 살짝이지만 긴장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트린느는 차분한 모습으로 제 할 일을 이어나갔다.
"많이 따끔거리시나요?"
"네? 아, 네.."
"그게 왜 그런 거냐면.."
할 일이라고 해봐야 왜 그런 느낌이 드는 지 그 까닭을 설명하는 것뿐이긴 했지만 말이다.
다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카트린느의 설명에는 귀 담아듣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묘한 마력이 있어서 카트린느를 향해 은근히 경계심을 내비치던 여성이 그 안으로 빠져드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덕분에 약효가 나타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수월하게 벌 수 있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약효가 녹아났을 거라 판단한 것일까. 나를 대신해 여성을 상대하던 카트린느가 순간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왔다.
그것을 포착한 즉시 클레어로부터 물을 건네받아 여성의 손에 묻혀놓았던 흉터제거용 크림들을 씻어냈다.
'그대로 내버려둬도 상관없긴 하지만..'
크림이 남아있으면 그 효과를 제대로 확인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해서 그리했던 것인데 손을 허옇게 덧칠하고 있던 크림이 씻겨내려가며 드러난 풍경은 내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분명 크림으로 덧칠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베여서 생긴 흉터에다가 화상 자국들로 빼곡해서 보기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손이 한결 깨끗하게 변해있었으니까.
아무리 카트린느가 만들어낸 것이라 해도 그토록 단시간 내에 흉터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건 무리였는지 여전히 흉터가 남아있긴 했지만 그 색이 많이 옅어져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거기에 흉터가 있는지 알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이야.."
덕분에 모처럼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으니 그런 내 반응에 내심 초조해졌던 것인지 여성이 손을 꼼지락대기 시작했다.
자기도 제대로 확인하고 싶은데 내게 손이 잡혀있는데다가 시야는 카트린느에게 차단되어버린 탓에 그러질 못해서 내심 초조했던 모양.
조심스레 움켜쥐고 있던 손을 즉시 놓아주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그러자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여성의 손이 시야에서 쏘옥하고 빠져나갔다.
과연 본인의 반응은 어떨지가 궁금해서 즉시 그녀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눈으로 들어온 것은 정적이지만 굉장히 격렬한 반응이었다.
너무 놀라면 소리조차 제대로 안 나온다던데 내 눈에 비친 여성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설마 그토록 단시간내에 이 정도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모양인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여성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입도 떡하니 벌어져있었고 말이다.
"이, 이게 대체.."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리 중얼대는 여성의 목소리에 답을 한 건 다름아닌 카트린느였다.
"어때요? 제법 괜찮죠?"
제법 괜찮죠라니.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까.
놀랍게도 그런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성을 향해 말을 거는 카트린느의 얼굴에서 가식같은 건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더 쓴웃음이 나왔다.
정식으로 상업화가 안 되서 그렇지 일단 시장에 출시되기만 하면 그동안 팔리던 흉터제거제들의 씨를 말려버리기에 충분한 걸 가지고 제법 괜찮지 않냐니.
저게 바로 있는 놈이 더하다는 걸까.
카트린느의 발언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일순간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있던 여성의 얼굴 위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도 잠시, 이럴 때가 아님을 깨달았는지 '핫..!'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떤 여성이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그, 그 흉터제거제 주세요!"
품 속에서 제법 묵직해보이는 주머니 하나를 꺼내 시연용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게 아닌가?
마음이 어찌나 급했던 건지 쿵소리와 함께 시연용으로 가져다놓은 테이블이 이리저리 흔들릴 정도였다.
덕분에 이쪽을 향해 쏠린 시선의 숫자가 전보다 한층 더 늘어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자길 향해 쏟아지는 시선보다는 말 그대로 기적이나 다름없는 현상을 맛보게 해준 흉터제거제를 확보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한 것일까.
제법 뜨끈하게 뎁혀진 시선이 나와 카트린느를 향해 번갈아 쏟아졌다.
그것도 잠시, 우리가 답이 없으니 불안한 예감같은 거라도 받았던 모양이다.
"그.. 혹시 이 정도로는 부족한 건가요? 그러면.."
여성이 테이블 위로 내려놓은 주머니의 입구를 슬며시 벌려보이며 그리 물어왔다. 여기서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하면 급전이라도 땡겨서 부족분을 메꾸기라도 할 기세였다.
참으로 다행히도 주머니 안에 든 걸 얼추 견적을 내보니 부족하진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사고도 남을 정도?
불안해하는 여성을 상대로 그 점을 일러주니 그럼 됐다는 식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가 이내 내 손위에다가 주머니를 통째로 올려놓았다.
그러더니..
"그럼, 그걸로 살 수 있는만큼 다 주세요."
그리 말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은 그 어떤 칭찬보다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마침 돈이 딱 맞게 떨어져서 3개를 받아든 여성이 희희낙락한 얼굴을 한채 자리를 떠나가고 난 후부터 이쪽을 힐끔거리던 이들이 테이블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으니까.
그들 중 대다수가 몸 곳곳에 흉터를 간직하고 있었다.
덕분에 카트린느가 많고 많은 것들 중에서 왜 하필 흉터제거제를 골랐는지또한 알 수 있었다.
여성들이 바깥생활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 세계의 특성상 여성이라면 크고 작은 흉터 하나 정도는 달고 사는 듯 했으니까.
다만 시연대상이 자잘한 흉터들이었던 탓에 비교적 커다란 흉터를 지닌 이들은 제거제가 자신에게도 효과가 있을 지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긴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클레어를 내 앞으로 불러들였다.
원래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법이니까.
"으응? 여기 앉으라고..?"
술에 취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한결 고분고분하게 변한 클레어가 군말없이 내가 가리킨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순간 그녀를 상대로 요구했다.
혹시 신경쓰이는 흉터가 있으면 좀 보여줄 수 있겠냐고.
"흉터어~?"
그런 건 대체 왜 보여달라고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클레어가 얌전히 제 무릎 위에다가 올려놓고 있던 손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매라도 걷어올리려는 것일까.
내가 내심 예상했던 건 그런 풍경이었는데 클레어는 그런 내 상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것을 가뿐히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클레어에게 부탁을 해놓고 그 새 말을 걸어온 손님을 상대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톡-
꼭 마치 단추가 풀어질 때나 날법한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에 뭔 소린가 싶어 그것이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니 눈으로 들어온 건 아무렇지도 않게 제 상의의 가슴팍을 열어젖히고 있는 클레어의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주위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다짜고짜 상체노출이라니.
당황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머리가 굳어버린다고 했던가.
지금 내가 딱 그랬다.
대체 속옷은 또 어디다가 팔아먹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단추로 고정되어 있던 부분이 벌어지며 디아나의 것과 비견될만한 두 개의 언덕이 보란듯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억눌려 있다가 튀어나온 탓인지는 몰라도 살짝 그을린 자국이 있는 그것이 위아래로 요동치는 모습이 자꾸만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생각치도 못한 방법으로 접하게 된 클레어의 가슴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구처럼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레이시아만큼이나 노출에 관대한 존재가 바로 클레어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애초에 수련을 할 때조차 귀찮다면서 몸에 뭔가를 안 걸치는 걸 선호하는 것이 바로 클레어 아니던가?
게다가 기사부에서 훈련을 할 때를 떠올려보면..
'그냥 휙휙 벗어던지는 사람이 많긴 했지..'
정조관념이 뒤바뀐 탓인지는 몰라도 그랬다.
그 점을 고려하면 방금 클레어가 한 행동은 여성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상식 선의 행동일수도 있.. 기는 개뿔.
클레어가 가슴을 깐 순간 주변에 있던 이들이 살짝 당혹스러워하는 듯한 반응을 내비췄던 걸 보면 그 정도까지는 아닌 듯 했다.
'하긴..'
운동할 때 까는 것하고 그렇지 않을 때 까는 건 느낌 자체가 다르니까.
하물며 여긴 약간 공공장소같은 느낌도 있지 않은가.
"자, 여기 흉터."
자기 때문에 주변의 분위기가 어색하게 변해버렸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손을 들어올린 클레어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한채 제 가슴께를 가리켰다.
하필이면 또 거기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살결을 따라 미끄러지는 클레어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눈으로 쫓다보니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의 상체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길다란 형태의 흉터를 말이다.
꽤 오래되어 보이는 흉터였다.
기사로 갓 서임되었을 때 입은 흉터라도 되는 걸까.
궁금했지만 어쩌다가 그만한 상처를 입게 되었는지 묻지는 않았다.
묻기 좀 그랬으니까.
저 정도로 크게 흉터가 남을 정도면 당시에는 굉장히 심각한 상처였다는 뜻일텐데 그것에 대해 섣불리 질문을 던졌다간 좋지 않은 기억을 헤집는 꼴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내 속을 알 리 없는 클레어는 그저 네가 보여달라고 한 것이 여기 있으니 잘 보라는 것처럼 상체를 꼿꼿하게 펴고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기분이 한층 더 묘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자세가 자세인지라 가슴이 한층 더 부각되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그래서 침묵하고 있었더니..
"아."
클레어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서야 좀 민망한 상황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일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내심 희망을 품은 찰나 클레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그것을 그대로 짓밟았다.
"혹시 발라주려고~?"
역시 제대로 취한 모양이다.
맨 정신이었다면 내 눈치를 보느라 저따위 발언은 하지도 못했을테니까.
'원래는 그럴 생각이긴 했지만..'
내가 원했던 건 팔같은 곳에 난 흉터에 대고 제거제를 바르는 풍경이었지 이런 식으로 공개플레이를 원했던 게 아니었다.
그래서 바로 부정하려고 했는데..
"거, 잘 됐네. 저 정도 크기의 흉터에도 효과가 있으면 어지간한 것에는 다 효과가 있다는 뜻 아니겠어?"
어째 주위의 분위기가 요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거기에 대고 동조를 해대기 시작한 탓이었다.
처음 그런 제안을 했던 이의 말마따나 순수하게 제거제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저런 말들을 해대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동조를 하는 이들 하나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은근히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곤 했으니까.
그냥 내가 곤란해하는 꼴이 보고 싶어서 다들 이러는 것이겠지.
어지간하면 거기에 어울려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자니 클레어의 상체를 길게 가로지르고 있는 흉터의 존재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은근히 여성스러워 보이고 싶어하는 이가 바로 클레어 아니던가?
그런만큼 평소에 딱히 내색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분명 저 흉터의 존재가 못내 신경쓰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 요구를 듣고 그것을 드러냈다는 건 그녀가 술에 취한 상태임을 고려하더라도 나름대로 적지 않은 결심을 하고 벌인 일일 가능성이 크겠지.
'아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혀서 생각해두었던 말을 쉬이 입밖으로 꺼내들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내 손에 들고 있던 통 속으로 손을 밀어넣은 건 언제까지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까짓거..'
봉사 좀 한다고 생각하지 뭐.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면서 크림이 듬뿍 묻은 손을 조심스레 클레어의 상체를 향해 가져갔다.
주변에서부터 쏟아지는 기대감 가득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