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야말로 생각치도 못한 타이밍에 바이올렛이 튀어나와 바이올라의 뒷덜미를 움켜쥔 덕분에 별다른 저항없이 제국 측 영역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물론 말만큼 쉽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설마 자신을 버리고 냅다 튀어버릴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건지 바이올라로부터 믿었던 동료로부터 배신당하기라도 한 것같은 눈빛이 날아와 꽂혔으니까.
나도 살짝 취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눈빛이 유난히도 사무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양심의 가책이라 부를만한 것이 심장어림을 콕콕 찔러대는데..
자꾸만 바이올라 쪽을 돌아보게 되었다.
뭐, 그것과는 별개로 걸음은 착실히 우리 쪽 부스를 향해 내딛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왜 언니가 맡겨놓은 일을 안 하고 땡땡이를 치려든단 말인가.
일부터 먼저 끝냈다면 다 끝냈다는 식으로 저항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느새 작게 보일 정도로 멀어진 바이올라는 여전히 언니의 손아귀 안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꼬잡꼼이 어떤 건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해야할까. 어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뭐 거길 잡혀서 꼼짝 못하는 건 사실이니..
그런 생각을 하며 자그맣게 보이는 바이올라의 모습에 시선을 두고 있자니 따라붙는 걸 포기한 건지 그녀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우리 측 부스가 준비되어 있는 곳으로 입성하게 되었는데..
'으음..'
눈앞으로 들이닥친 광경은 상상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 새 나름대로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제국 측은 물론 왕국 연합 측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으니까.
하긴 손님들 입장에서도 난감했을 것이다. 타국에서 왔다고 하니 관심이 가기는 하는데 부스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하나같이 이런 일이 어색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을테니까.
어찌어찌 용기를 내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저 어색함이 전염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왕국 연합측 부스가 야시장의 느낌을, 제국 측 부스가 대기업이 작정하고 꾸린 거대 프랜차이즈같은 느낌을 풍겼다면 우리 측 부스는 뭐랄까.. 기껏 개업했는데 장사가 잘 안 되서 사장이고 알바고 의자에 앉아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가게들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을 받은 게 과연 나뿐만일까.
그럴 리 없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다들 힐끔거리기만 할뿐 정작 안으로 들어가서 물건을 팔아준다거나 그러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는 건?
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부터 어떻게 해야 역전을 노려볼 수 있을 거라는 뜻이겠지.
'그 전에 우선..'
카트린느부터 찾아야겠지.
어디 있으려나.
그리 중얼거리면서 길을 따라 늘어선 부스를 눈으로 쭉 훑고 있으니 생각치도 못했던 곳에서 카트린느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카트린느는 부스 안이 아닌 길에 나와서 서 있었다.
길 한 가운데에 오도카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처음에는 참다참다 못해서 부스를 뛰쳐나온 건줄로만 알았다.
기본적으로 느슨한 구석이 많은 카트린느지만 딱 하나 느슨하지 않은 구석이 있다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뭔가를 만들어낼 때니까.
그런만큼 스스로가 만들어낸 물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이 카트린느였고 그런 그녀에게 있어 자기가 만들어낸 물건들이 제국 측에서 내놓은 것과 비교하면 별볼일 없는 물건 취급을 당하는 듯한 이런 상황은 참기 힘들었을 수도 있었을테니까.
그 인식을 뒤집기 위해서라도 몸소 뛰쳐나온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모습을 관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부스를 나온 게 그녀의 자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신분에서 밀린 건가..?'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근처를 오가던 이가 그녀의 복장을 보고 말을 걸 때마다 저렇게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일 이유가 없으니까.
막상 등 떠밀려서 나오긴 했는데 이런 걸 해본 적이 없다보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난감해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것이 말을 걸어온 이를 상대하는 카트린느의 얼굴 위에 묻어있었다.
난감함으로 물든 카트린느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누가 그녀를 부스 밖으로 내몬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안목없는 인간이다 싶었으니까. 조금이라도 보는 눈이 있었다면 카트린느가 전형적인 히키코모리형 공돌이라는 것쯤은 알아볼 수 있었을테니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 누군지 모를 이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당장이야 뒤를 봐줄 이가 없어서 순순히 밀려나는 쪽을 택했을테지만 저래뵈도 카트린느는 레이시아의 총애를 받는 몸이니까. 그런 이를 신분을 빌미로 압박해서 곤경에 처하게 한다?
카트린느가 그 사실을 마음 속에 담아뒀다가 레이시아와 합류했을 때 그 사실을 속살거리기라도 한다면..
벌어질 일이야 뻔했다.
그래도 교류전에 참가할 정도라면 나름대로 실력이 있다는 뜻이겠지만 카트린느와 비견될 정도는 아닐테니까. 레이시아 입장에서는 대체할 수 없는 인재가 카트린느였고 그런만큼 그녀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사람 한 명 손목 비트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릴테지.
그 점을 고려하면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했지만, 저렇게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앙큼한 짓도 했던 카트린느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니까.
해서 술기운에 취해 얌전하게 변한 카트린느를 이끌고 호객현장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곳으로 향했다.
카트린느는 당장 눈앞으로 들이닥친 이를 상대한다고 내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녀의 바로 뒤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도 그랬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깜짝 놀래켜 줄 겸 백의로 뒤덮인 그녀의 등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그랬더니..
"자, 잠시만요. 우선 이 분부터 안내해드리고.."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건 내심 예상했던 것하고는 한 백만광년쯤 동 떨어져있는 반응이었다.
놀란 나머지 제 자리에서 펄쩍 튀어오르는 반응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놀라는 모습을 기대했었는데 말이다.
'이건 뭐..'
재미가 없었다.
여전히 눈앞에 자리하고 있던 그녀의 등을 다시 한 번 찔렀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이쪽을 좀 돌아봐달라는 의미로 그리했던 것인데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게 가관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대체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런 반응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게 되는 걸까.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시달렸으리라는 게 예상이 되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한숨을 포옥하고 내쉬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누나."
참으로 다행히도 이번만큼은 효과가 있었다. 손님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이를 상대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내 목소리를 구별해낼만큼의 정신머리는 남아있었던 모양인지 입을 열자마자 카트린느의 고개가 내쪽으로 홱 돌아왔으니까.
"어? 어?"
찾아갈 거라고 미리 말을 해뒀음에도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걸 보면 생각치도 못한 타이밍에 내가 등장한 탓에 놀란 모양.
그것도 잠시, 일단 상대하고 있던 사람부터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지 카트린느가 내게 양해를 구하고는 다시금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웃긴 건 카트린느에게 말을 걸고 있던 여성의 반응이었다.
어찌보면 무시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인만큼 기분 나빠할 법도 한데 그녀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같은 표정을 한채 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바빴다.
"그.. 저기.."
"네? 아, 네!"
덕분에 난감한 상황을 겪는 일 없이 무사히 손님 상대를 끝낸 카트린느가 이내 내쪽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그렇게 카트린느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자마자 그녀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잘 되가요?"
별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고, 카트린느 입장에서도 충분히 막막하게 느껴질 작금의 상황을 그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서 물었던 것이었는데..
"음, 뭐.. 그럭저럭?"
내심 예상하고 있었던 것하고는 다른 답변이 답이랍시고 돌아왔다.
나는 분명 앓는 소리를 하거나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는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겉으로 보이는 것하고는 다르게 성과가 좋은 걸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점수를 산정함에 있어 매출이 끼치는 영향이 지대한만큼 다른 곳에 비해 손님 수가 적더라도 알짜배기라 부를 수 있을만한 이를 확보한다면 인원 수의 차이를 메꾸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테니까.
'큰 손이라도 왔다갔나?'
그 큰 손이 카트린느가 생산해낸 물건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를 시전한 거라면?
라고 생각을 하자니 아까 멀리 떨어져서 관찰할 때 봤던 것들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방금의 발언하고 행동이 허세라는 뜻이겠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도 모자랄 판국에 허세라니 참으로 비상식적인 행동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카트린느의 행동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일이 잘 안 풀려서 앓는 소리를 하자니 여성으로서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질 않았을테니까.
어찌보면 징징대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만큼 차라리 허세를 부리는 편이 낫다고 본 것이겠지.
평소였다면 그런 그녀의 허세에 적당히 어울려줬겠지만 이번만큼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찌보면 향후 내 거취가 달려있는 문제기도 했으니까. 조금이라도 포인트를 벌어둘 수 있을 때 벌어둬야만 했다.
"그래요? 제가 볼 때는 그렇지 않은 것 같던데."
해서 곧바로 그 점을 찌르고 들어가니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던 카트린느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던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팩트로 때리려던 걸 멈추고 그녀를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당근과 채찍이라는 말이 괜히 진리가 아님을 증명하듯 한 번 팩트로 때린 다음에 때린 곳을 살살 어루만져주는 방법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언제 꾹 다물어져 있었냐는 듯 카트린느의 입이 벌어지며 그 안에서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왔으니까. 그러니까 장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잘 안 된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어쩌다가 이렇게 길바닥으로 내몰리게 되었는지까지가 말이다.
그 내용은 내가 내심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한숨이 나왔다.
장사가 생각만큼 안 되면 끼리끼리 뭉치기라도 하던가 즈그들은 참가자라고 조력자 역할로 동원된 카트린느를 몰아세우는 건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혹시 이런 식으로 행동한 다음에 나중에 장사가 안 된 핑계로 카트린느의 이름을 대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정말로 그럴 생각인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내쪽에서 먼저 말리고 싶었다.
분명 큰 코 다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테니 말이다.
아무튼 사정도 대충 이해했고 하니..
"누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카트린느를 향해 물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냐고.
만약 그녀가 그 년놈들에게 빅엿을 선사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마침 내 뒤에는 클레어라는 상당히 쓸만한 뒷배가 있었으니까.
해서 어디 한 번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보라는 식으로 말을 했는데.. 의외로 카트린느가 먼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는 것처럼.
그러더니 그녀가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내게 부탁을 해왔다.
"그.. 이안 너만 괜찮다면 손님 모으는 걸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건 익숙하지가 않아서.."
이리 될 줄 알았다면 연구실에만 쳐박혀있지 말고 좀 돌아다니기라도 할 걸 그랬다면서 시무룩한 표정과 함께 쓴웃음을 지어보이는 카트린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씩 웃었다.
"고작 그거 가지고 되겠어요?"
"..응?"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해야죠."
이미 차이가 상당히 벌어져버린 상황 아니겠는가.
그걸 따라잡기 위해선 그만큼 과감한 수단이 필요했다.
"혹시 의자하고 테이블 좀 구할 수 있어요?"
어딘가 멍해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클레어 쪽을 힐끔거리며 카트린느를 향해 그리 물었던 건 그걸 위해서였다.
"의자하고 테이블? 남는 게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리 중얼거리면서 난감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것도 잠시 '아!'하고 카트린느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반응을 보니 뭔가 떠오른 게 분명해서 곧장 그녀를 앞장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