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일을 벌인 나조차도 해놓고서 내심 당황했을 정도였는데 바이올라는 어땠겠는가.
얼빠진 소리를 흘리고 나서 그대로 굳어버린 바이올라의 얼굴은 그야말로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꼭 이제 막 첫키스를 한 소녀를 보는듯 했다.
'귀엽네.'
그만큼 수줍기 그지없는 반응이었고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어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오르는 걸 막지 못했다.
안 그래도 부끄러워 죽겠는데 내가 자길 바라보면서 귀엽다는 듯 히죽히죽 웃고 있으니 그게 또 치명적이었던 걸까.
"윽.."
내 눈빛을 확인한 바이올라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오더니 그녀가 황급히 팔을 들어올려 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라도 해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고 싶었던 걸까.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별로 효과는 없는 듯 했다.
팔로 가려진 눈부분만 빼고 나머지 부분은 여전히 훤히 드러나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들어올린 팔을 이용해 내 시선을 차단한 바이올라가 후하후하하고 심호흡을 반복했다.
많이 흥분한 모양이다.
얼굴까지 와닿는 숨결이 제법 거칠었다.
동시에 뜨거웠고.
꼭 뜨겁게 뎁혀진 탕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촉촉한 공기 속에는 강렬하기 그지없는 알코올의 냄새가 섞여있었다.
그렇다고 불쾌하지는 않았다.
여태껏 들이마신 것들이 죄다 좋은 향을 가진 것들 뿐이다보니 알코올의 냄새 속에 그것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니까.
온갖 종류의 과일들을 적당히 섞어서 넣어둔 다음에 각양각색의 꽃들로다가 마무리를 한 바구니에다가 코를 박고 숨을 들이키면 대충 이런 냄새가 나지 않을까.
그런 냄새를 풀풀 풍겨대며 심호흡을 반복하는 바이올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음 차례랍시고 나온 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보아하니 그녀는 저 상태가 진정이 되기 전까지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으니까.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기에 다음으로 나온 술은 어떤 맛일지 미리 맛좀 봐두려고 그리했던 것인데..
"그,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다."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내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바이올라가 술병을 향해 뻗어나가던 내 손목을 그대로 잡아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게 좀 의외였다.
애초에 이런 자리를 제안한 이유 자체가 내가 취한 모습도 구경할겸 그걸 빌미로 날 어떻게 해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내가 스스로 취해주겠다고 하니 이제와서 말리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부분이 이해가 안 되서 제법 단단하게 내 손목을 틀어쥐고 있는 바이올라와 시선을 맞춘채 질문을 던져봤다.
"네? 왜요?"
네가 바라던 게 이런 것 아니었느냐.
대충 그런 느낌으로 던져진 질문에 바이올라의 입술을 뚫고 튀어나온 건 아까 들었던 것하고 비슷한 침음성이었다.
정곡을 찔리니 꽤나 아팠던 모양.
그러고 나서도 바람빠지는 소리와 함께 쓴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던 바이올라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것처럼.
"많이 취한 것 같으니까.."
이쯤에서 끊는 게 좋을 것 같다면서 손을 들어올려 막 나온 것들을 다시 물리려고 하길래 그건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붙잡힌 손에 힘을 줘봤다.
그대로 뿌리치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했더니 바이올라의 눈썹이 일순간 꿈틀거렸다.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 힘이 훨씬 더 강해서 놀라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순순히 놓아줄 생각은 없어보인다는 점이었다.
그 증거로 그녀의 눈썹이 흔들림과 동시에 내 손목을 틀어쥐고 있던 그녀의 손아귀에 조금씩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꾸우욱-
아마 여기서 조금 더 힘을 준다면 내 손목에 그녀의 손모양대로 벌겋게 자욱이 남지 않을까.
그 정도로 강한 힘이었고, 딱 보니 혼자 힘으로 떨쳐내는 건 무리일 것 같아서 클레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연히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그리 했던 것이었는데..
'..자네?'
눈으로 들어온 건 생각치도 못했던 광경이었다.
술만 들어가면 세상 모르고 골아떨어지는 사람이 간혹가다 있는데 아무래도 클레어가 그런 타입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누가봐도 취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채로 병든 닭마냥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쩐지..'
내가 바이올라의 턱을 타고 흘러내리던 걸 혀로 핥짝거렸을 때도 그렇고 손목을 잡혔을 때도 그렇고 이렇다할 리액션이 없더니만 아무래도 그때부터 졸고 있었나 보다.
어째 고개가 기울어지는 각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것이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테이블에 머리라도 박을 기세였다.
해서 바이올라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움직여 꾸벅꾸벅 졸고 있던 클레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효과는 확실했다.
귀찮을 법도 한데 늘 단련을 빼먹지 않는 그녀답게 제법 탄탄함이 느껴지는 옆구리를 팔꿈치가 꾸욱하고 짓누름과 동시에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지던 클레어의 몸이 꼿꼿하게 펴졌으니까.
"하윽-?!"
술기운도 제법 올라왔겠다 그래도 나름대로 내부라고 공기도 훈훈하겠다 그것들에 취해 기분 좋게 졸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뭔가가 옆구리를 파고들어오니 놀랐던 것일까.
숨을 크게 들이키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지그시 감겨있던 클레어의 두 눈이 번쩍 뜨이더니 그녀의 눈빛이 대번 날카롭게 변했다.
동시에 소리없이 움직인 그녀의 손이 옆구리를 압박하고 있던 내 팔을 휘감았다.
그러더니 제쪽을 향해 쭉 잡아당기는 것이 그대로 기술이라도 걸 기세였다.
"자, 잠깐..!"
가만히 있으면 암바든 뭐든 아무튼 내 팔에게는 영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아직 잠에서 덜 깬 듯한 클레어를 향해 황급히 외쳤다.
그 순간 그녀의 손은 휘감은 내 팔을 제 가슴 사이에다가 끼워넣고 쭉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러느라 상체도 뒤로 한껏 기울어져 있었고 말이다.
덕분에 말캉말캉한 감촉이 양옆에서부터 팔뚝을 꾸욱하고 눌러오는 제법 사치스러운 감각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걸 만끽할 여유따윈 없었다.
바이올라에게 손목이 잡힌 상태에서 반대쪽 팔마저도 기술이 걸려버리니 말 그대로 양옆에서 잡아당겨지는 듯한 구도가 완성되어버렸으니까.
덕분에 어깨하고 팔뚝 쪽이 슬슬 땡기기 시작하는 것이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고통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커보였다.
황급히 클레어를 만류한 건 그래서였다.
보아하니 나만큼이나 취해버린 바이올라는 내가 무슨 말을 한들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였으니까. 그나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클레어였고 그래서 그리했던 것인데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내 목소리를 듣고 잠기운에서 완전히 벗어나는데 성공한 그녀가 언제 기술을 걸고 있었냐는 듯 양손을 이용해 감싸쥐고 있던 내 팔을 그대로 놓아주었으니까.
"좀 도와주시겠어요?"
조금 졸았을 뿐이지 정신은 비교적 멀쩡한 듯 해서 그런 그녀를 상대로 곧바로 도움을 청했다.
그런 클레어의 조력에 힘입어 무사히 바이올라의 손아귀를 탈출하는데 성공한 나는 이쯤에서 자리를 파하는게 어떻겠냐고 둘을 상대로 제안했다.
이 자리를 더 이어가자니 흥이 팍 식어버렸을 뿐더러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가 있었으니까.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도 여전히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고 있을 카트린느 쪽도 어떻게 해줘야하지 않겠는가.
해서 내뱉은 제안은 다행히도 받아들여졌다.
보아하니 바이올라도 여기서 내가 더 취해버리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모양.
그렇게 그 부스를 빠져나와 우리 쪽 부스로 향하려하니 바이올라가 자연스럽게 나와 클레어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그대로 우리 쪽 부스까지 따라오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해서 그녀를 향해서 물었다.
우릴 따라올 생각이냐고.
"..같이 가시려고요?"
"응? 왜?"
그리고 저게 답이랍시고 돌아온 것이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인데 무슨 문제될 거라도 있냐는 것처럼 반문을 해대길래 속으로 생각해봤다. 정말로 그래도 되는 건가하고.
'뭐, 안 될거야 없긴 한데..'
괜찮을지는 모르겠다.
날 따라오겠다는 건 우리 측 부스 쪽으로 넘어가서도 자기네 부스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걸 기대하고 있다는 소린데 혹시라도 그 모습을 제국 측 사람이 봤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그러니까 자기네 황녀가 경쟁자 측 부스를 남자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히히덕거리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면..
'음..'
모르긴 몰라도 사기가 뚝 떨어지지 않을까.
자기들은 어떻게든 이겨서 제국의 명예를 드높여 보겠답시고 온갖 똥꼬쇼들을 다 하고 있는데 황녀라는 년이 돌아다니면서 격려는 못해줄망정 상대 측으로 넘어가 매상을 올려주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후폭풍은 고스란히 바이올라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도 황녀이니만큼 대놓고 뭐라하긴 힘들테지만 제국 쪽에서 나름대로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이들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게 될테니까.
이대로 따라오도록 내버려두면 그러한 미래가 닥쳐올 거라는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차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바이올라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과 나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다고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래서 그리 내뱉었던 것인데..
"뭐가?"
"아니 호옥시 제국 측 사람들이 보기라도 하며는.."
그 말을 내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얼큰하게 취한 상태라는 걸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였다면 분명 납득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바이올라에게서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것은 내 말을 듣고 울컥한 듯한 기색 뿐이었다.
"보며는 뭐?"
짤막하기 그지없는 바이올라의 말 속에는 참으로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내가 황녀인데 즈그들이 뭐 어쩔거냐는 식의 배짱부터 시작해서 혹시 내가 창피해서 그러는 거냐는 자그마한 오해까지 그 말 속에 모두 깃들어있었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간다는데에..!"
아무래도 바이올라의 주사는 자기 감정에 더없이 솔직해지는 건가 보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바이올라에게서 개진상으로 진화할 것같은 기색이 풀풀 풍겨왔다.
'이야..'
그나마 부스 중에서도 외곽에 쳐박혀있는 곳이라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중앙 쪽 부스였다면 아마 지금쯤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황녀가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리는 광경이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나저나..'
저걸 어쩐다.
말을 하면할수록 점점 더 개로 화해가는 바이올라를 바라보며 일단은 달래줘야하나 생각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응..?"
"네가 뭐?"
바이올라의 뒷편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하힛-?!"
날카롭기 그지없는 신음성과 함께 바이올라의 몸에 제자리에서 펄쩍 튀어올랐다.
그 순간 눈으로 들어온 것은 삐죽삐죽하게 선 꼬리털 사이로 파고들어가있는 누군가의 손이었다.
"응? 바이올라? 계속 해봐."
역시라고 해야할까.
익숙하다고 생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바이올렛이었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어느새 바이올라의 뒷편을 점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그녀가 바이올라를 향해서 물었다.
어디 하려던 말이 있으면 계속 한 번 해보라고.
참으로 악질적인 건 그냥 묻는 게 아니라 꼬리를 움켜쥐고 있는 손을 위아래로 움직여가며 그런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민감한 곳을 그런 식으로 자극해대면서 질문을 던진다?
제대로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급하게 양손을 들어올려 제 입을 틀어막은 바이올라가 그대로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지금 동생이 어떤 감각을 느끼고 있을지 비슷한 몸을 가진 사람으로서 모르지 않을텐데 바이올렛은 예의 그 겉보기에만 상냥해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계속해서 손을 놀려댔다.
그런 상황에서 바이올라가 할 수 있었던 건..
"꼬리잇.. 그렇게 하지마앗.."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 말을 간신히 쥐어짜내는 것뿐이었다.
그 이상으로 길게 말을 하자니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와버릴 것 같았던 모양.
"분명 내가 시킨 게 있었을텐데? 응? 어디를 간다고?"
언니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는 바이올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봐선 안 되는 무언가를 봐버린 것처럼 심장이 제멋대로 두근두근거려서 특히 그랬다.
바이올라와 관련된 문제에는 신경 쓸 생각이 없다는 듯 딴청을 부리고 있는 클레어를 옆에 세워둔 채 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손놀림으로 바이올라를 제 입맛대로 주무르던 바이올렛이 날 향해 눈짓을 해보였다.
자신이 바이올라를 붙잡아두고 있는 사이에 얼른 빠져나가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