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34)화 (233/366)



〈 23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스타트는 빨간 녀석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구미가 당기는 비쥬얼은 아니었다.

색이 딸기를 생각나게 만드는 분홍빛에 가까운 빨간색이었다면 딸기우유를 상상하면서 나름대로 기대를 해봤을텐데 이쪽의 '빨갛다.'는 딸기우유의 그것보다는 차라리 립스틱의 '빨갛다.'에 가까웠으니까.

어찌보면 장미의 붉은색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정도로 제법 짙은 색을 자랑하는 액체가  안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상상이 잘  되네..'


뚜껑을 땄을 때 풍겨왔던 냄새가 색하고 매치가 잘 안 되서 더욱 그랬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 걸 느끼고 있자니 바이올라가 여기서부터는 자기가 하겠다면서 우리 테이블을 맡은 이를 물러나게 했다.


태도에서 자신감이 느껴지는 걸 보면 나름 이쪽에 조예가 깊은 모양.

'하긴..'

생각해보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황녀씩이나 되는 인물이 술에 취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만큼 꼴사나운 모습도 또 없을테니까. 당연히 그녀는 주도와 관련된 교육또한 받았을 것이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술과 관련된 온갖 지식들도 습득하게 되었겠지.


아니나 다를까 우리 테이블을 담당했던 이가 뒤로 물러나며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남겨지게된 술병을 집어든 바이올라가 자연스럽게 그 안에  액체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건 말이지.."

주로 유목생활을 했던 종족의 전통주이며 가축의 젖과 제국 남부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인디카라는 이름의 붉은 열매를 커다란 가죽 자루에다가 넣고 발효시켜서 만든 물건이란다.


"일설에 따르면 장기간 이동하느라 가죽 주머니 안에서 방치되어 탄생한  조금 더 맛있게 먹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다가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확실한  아니니 흘려들으라며 마무리지은 바이올라가 손에 든 병을 기울여 그 안을 채우고 있던 것을 내 몫의 잔에다가 따라냈다.

꼴꼴꼴꼴하고 술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아까 전부터 묘하게 코를 간지럽히던 우유 비스무리한 향이 확 강해졌다.

허나 그것보다  관심이 가는 건 잔과 만나 탄생한 비쥬얼이었다.

병 안에 담겨있을 때도 특이한 색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따라놓고 보니 특이한 수준을 넘어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꼭 철없는 아이가 장난으로 만들어놓은 걸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해본 적은 없지만 우유에다가 빨간 립스틱을 잘게 부순 걸 섞으면 대충 저런 비쥬얼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데 또 냄새는 입 맛이  돌게 만드는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이..


'으..'


이게 뭐라고 인지부조화가 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될 일은 절대 없겠지만은 꼭 마치 파인애플이 올라간 피자나 민트초코를 보며 '맛있을 것 같다.'라고 생각해버린 기분이랄까.


그런 내 복잡하기 그지없는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을 반 정도 채운 바이올라가 클레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클레어 님도 드셔보시겠어요?"


그 순간만큼은 바이올라가 그렇게 눈치 없어보일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원래 있던 이를 쫓아내고 그녀가 가이드 역할을 차지한 순간부터 클레어의 심기는  좋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생각해보면 그럴만도 했다.


계산을 한  자긴데 바이올라가 하고 있는 짓만 보면 그녀가 나와 클레어한테 대접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졸지에 재주 부리는 곰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버린 클레어가 심기 불편한 눈으로 자길 쳐다보든 말든 바이올라는 제가 맡기로 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쪼르르륵-

그렇게 클레어의 잔까지 채운 바이올라가 이내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목도한 순간 알아차렸다.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말이다.


아무래도 바이올라는 내가 따라주길 원하는 것 같았다.

헌데  말을 섣불리 입밖으로 꺼내들지 못했던 것은 나와 단둘이 있는 자리가 아닐 뿐더러 혹시라도 그게 무례가 되어 내 기분이 상할 것을 우려해서 그랬던 거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좀 안쓰러웠다.

까짓거 술 좀 따라줄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눈치를 보나 싶었으니까.


해서 막 입을 열어 '따라드릴까요?'라는 말을 입밖으로 내뱉으려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말보다 손이 빠르다고 하던가.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이  그러했다.


막 입을 연 내가 무어라고 내뱉기도 전에 먼저 움직인 클레어의 손이 바이올라 쪽으로 내밀어졌으니까.


손금과 거기에 새겨진 자잘한 흉터까지도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쫙 펼쳐진 클레어의 손바닥이 말하고 있었다.

-내가 한 잔 따라줄테니까 손에 들고있는  내놔.

내심 제가 바라던 전개하고는 달라서 그랬던 걸까.  앞으로 들이밀어진 클레어의 손바닥을 확인한 바이올라의 눈동자가 일순간 거칠게 흔들렸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병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도 순간 힘이 들어갔고 말이다.


대체 순간적으로 힘을 얼마나 준 건지 다시  바이올라의 손등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저저..'

저러다가 와장창 엔딩이 나버리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 가겠냐만은 그 가능성을 쉬이 부정할 수가 없는 게 문제였다.

화장실에서 날 옥죄오던 바이올렛이 힘이 어마어마했던 걸 떠올려보면 동생인 바이올라라고 해서 약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불안한 상상을 해버린 탓일까.

왠지 모르게 빠직빠직하고 유리같은 것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여러모로 불안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지금이라도 끼어들어서 중재를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손에 주고 있는 힘만 보면 절대로 넘겨주지 않을  같았는데 의외로 바이올라는 순순히 병의 소유권을 클레어에게 넘겼다.

그렇다고 억지로 넘기는  같지는 또 않았다.

병을 넘기는 바이올라의 얼굴 위에는 어쩐지 뿌듯해하는 미소가 맴돌고 있었으니까.


설마 방금 그걸로 클레어가 자길 인정해줬다고 여기기라도 한 걸까.

놀랍게도 그런  같았다.

상황이 이리되니 역으로 못마땅해진 것은 다름아닌 클레어였다.


제 딴에는 내심완벽하게 훼방을 놓았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짜증을 내기는 커녕 기분 좋다는 듯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으니 이게 대체 뭔가 싶었던 모양이다.

얼떨결에 병을 받아들게된 클레어의 입꼬리가 일순간 거칠게 꿈틀거렸다.

그것도 잠시, 순간적으로 욱했던 나머지 너무 나서버렸다는 생각이 들기라도 했던 모양인지 클레어가 힐끔힐끔 내 얼굴을 곁눈질해대기 시작했다.

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클레어와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주니 그제서야 그녀가 바이올라에 잔에 대고 병을 기울였다.

그렇게 바이올라 몫의 잔까지 완벽하게 채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내 몫의 잔을 집어들 수 있었다.

"흐음.."

잔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올린채 살살 흔드니 아까 전부터 묘하게 침샘을 자극하던 우유향이 한층 더 강렬해진채 확 끼쳐왔다.

그렇다고 마냥 우유같지는 않았다.

견과류 특유의 향기가 섞여있었으니까.

이건 발효시킬때 같이 넣는다던 인디카인지 뭔지하는 열매의 향인 걸까.


냄새만 맡아보면 굉장히 고소한 맛이 날 것 같았다.


실제로 어떨지는 직접 확인해봐야겠지만 말이다.


더는 눈치 볼 필요가 없어진만큼 이이상 참는 것도 고역이어서 곧바로 잔을 입에다가 가져다댔다.

차게 식혀진 유리 특유의 냉기가 입술을 꾸욱하고 짓눌러왔다.

그 감각을 느끼며 잔을 움켜쥐고 있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색이 색인지라 어쩌면 굉장히 괴랄한 맛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흠?'

첫인상은 내심 예상했던 것들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주로 식전에 한 잔 가볍게 걸치는 술이라고 하더니만 과연 딱 그 말대로였다.

그만큼 가벼웠다. 동시에 부드러웠고.


가축의 젖을 발효시켰다길래 내심 마유주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던 내게는 그야말로 기분좋은 오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특색이 없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술을 입 안에 머금고 있으면 사과를 생각나게 하는 과일 특유의 상큼한 맛이 혀를 살살 간지럽혔으니까.


"되게 괜찮은데요?"


덕분에 그 말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현생에서 과일 소주 붐이 불었을 때 덩달아 과일 맛이 나는 막걸리들이 우후죽순 튀어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것들의 궁극적인 형태가 있다면 아마 대충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절로  정도로 어찌보면 막걸리하고도 닮은 부분이 있었다.


그러니까 굉장히 소프트하면서도 부드러운 막걸리라고 해야할까.

가타부타 길게 말할 필요없이 그냥 좋았다.


 잔 더를 외쳤던  그래서였다.

크리미한 것이 술술 넘어가는 느낌이 상당히 좋았으니까.


'이제 여기다가..'


소고기가 속으로 들어간 투구빵을 집어와 그대로 크게 한 입 베어물어 곁들여봤다.


빠자자작-

바이올라의 눈치를 보며 깨작거렸던 아까하고는 다르게 눈치보지 않고   크게 베어무니 낮은 온도에서 오랫동안 튀겨서 기름이 쪽 빠져 빠삭빠삭하게 변한 겉면이 요란하게 부숴져내리며  안에 담긴 것이 드러났다.


아까 볼 때는 단순히 짭짤한 양념에 볶은 고기를 넣어두기만 한줄 알았는데 실은 그것만 넣어뒀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까 먹었던 기본 버전하고 크게 다를  없는 부드럽고 쫀쫀한 속살이 이빨에 닿아 무너지며 페스츄리마냥 겹겹이 겹쳐진 속살 사이에 담겨있던 육즙이 입 안에서 팡하고 터졌다.


아무래도 딱 좋은 타이밍에 집어들었던 모양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집어들었다면 그대로  안을 흠씬 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뜨끈하면서도 짭짤한 액체가 달달함에 젖어있던  안으로 확 끼얹어졌다.


"어우.."

이건 미친 조합이었다. 그야말로 막걸리와 육전급의 궁합이라고 해야할까.


단맛과 짠맛의 조합이 완벽해서  번을 먹어도 질릴 것 같지가 않았다.


뭔가를 먹고 이 정도로 전율한 것이 대체 얼마만이던가.

'..확 넘어가버려?'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 옆자리를 차지한 둘은 그저 내가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모양이다.

한 병만으로는 모자랄  같았는지 나머지 두 병도 오픈한 둘이 번갈아가며 내 잔을 채워되는데 덕분에 시음이라기 보단 본격적으로  잔하는 듯한 분위기가 났다.


뭐, 그런 감상하고는 별개로 이대로 가면 나만 취하고 끝날 것 같아서 둘에게도 부지런히 술을 권했다.


애초에 형식 자체가 시음이었기에 셋이서 작정하고 달리다보니 술은 금방 동이 났다.

그러나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동이 나기 무섭게 다음 코스라면서 새로운 술들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제일 비싼 코스다웠다.

그만큼 코스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 하나하나가 고급이 아닌 게 없었으며 죄다 마음에 들었으니까.


다만 딱 하나 단점이 있다면 종류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이 세계의 유일한 제국답게 영토는 물론 그 안을 채우는 인종들또한 다양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종류의 술들이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는데..

"으으음.."

안 취할래야 안 취할 수가 없었다.

처음의 그 신호등주 이후로는 나름대로 페이스 조절이라는 걸 했음에도 그랬다.


내가 스스로가 확실히 취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코스가 종반쯔음에 이르렀을 때였다.

나름대로 기승전결의 느낌을 주고 싶었던 건지 중반을 넘어서고 나서부터는 하나같이 화끈한 녀석들만 모습을 드러내는데 덕분에 나름대로 호기로운 모습을 보여주던 둘도 시간이 갈수록 점차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바이올라보다는 클레어가 술이 더 센 것 같았다.

발음은 물론이거니와 얼굴까지 벌겋게 변해서 눈이 게슴츠레하게 풀려있는 바이올라하고는 다르게 클레어는 얼굴만 조금 빨개졌을뿐 비교적 멀쩡해보였으니까.


그렇다고 안 취했다는 건 또 아니었다.

보기에는 멀쩡해보여도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취기가 묻어나오고 있었으니까.


뭐, 그것도 바이올라에 비하면 멀쩡한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바이올라가 어느 정도로 취했냐면은..

주륵-

자기도 모르게 마시던 걸 흘릴 정도였다.

그래, 문제는 그거였다.


바이올라가 황녀라는 직위에 어울리지 않게 마시던 걸 흘렸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턱을 흘러내린게 하필이면  굉장히 귀한 거라 사람당 한 모금을 간신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적게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보니 바이올라의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황금빛 액체를  순간 나도 모르게 '아깝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있었다.

"..에?"


그야말로 내게 불의의 기습을 당해버린 바이올라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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