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허.."
황당했다.
하도 황당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헛웃음소리까지 낼 정도였다.
아니, 뭔놈의 몸놀림이 저리도 잽싸단 말인가.
왕도에서 이름 깨나 날린다는 소매치기도 방금 바이올렛이 보여준 움직임에는 못 미치지 않을까.
오죽하면 그녀가 타고난 형질의 늑대가 아니라 실은 토끼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 정도로 잽싼 도주였으니까.
그렇게 누가 붙잡기도 전에 도망쳐버린 탓에 졸지에 탈의실 안에 홀로 남겨진 꼴이 되어버린 나는 바로 조금 전까지 바이올렛이 열심히 더듬어대고 있던 곳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곳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어찌나 찐득찐득했던지 떨어져나간지 꽤 된 지금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래 놓고서는 뭐?
순수하게 옷입는 것만 도와줄 생각이었다고?
"하.."
둘러댈거면 좀 그럴 듯하게 둘러대던가.
어디 네살배기 애도 믿지 않을 법한 소리를..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기가 차는 소리라서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제와서 그래봐야 한참 늦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탈의실 안에 우두커니 서서 연신 헛웃음을 흘리던 것도 잠시, 이내 몸을 숙여 한쪽에 방치되어 있던 내 원래 옷가지들을 주워들었다.
어찌되었건 상황은 이미 종료된만큼 언제까지 이곳에서 버티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해서 주워든 것들을 곱게 접어서 팔에다 걸친 뒤 그대로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그 뒤에 들고 들어가기는 좀 그래서 밖에 있던 의자에다가 대충 걸쳐놓았던 것까지 집어드니..
"아, 이안!"
주변을 점령하고 있던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웅성거림을 뚫고 날아온 소리가 그대로 귓속으로 박혀들었다.
그에 살짝 앞을 향해 숙이고 있던 상체를 들어올려 곧장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눈으로 들어온 건 여길 봐달라고 외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높게 치켜든 손을 좌우로 붕붕 흔들어대고 있는 바이올라의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멀찌감치 서서 손을 흔드는 것만으로는 살짝 모자랐던 모양이다.
바이올렛과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그녀가 날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이번에는 팔대신 예의 그 탐스러운 꼬리를 좌우로 흔들어가면서.
주변에 사람도 적지 않은데 저렇게 커다랗고 탐스러운 것을 마구잡이로 흔들어대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의외로 그런 그녀에게 뭐라고 하는 이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누군가와 닿으려고만 하면 바이올라가 귀신같은 몸놀림을 선보이며 샥 피해버렸으니까.
덕분에 그 누구하고도 부딪히는 일없이 무사히 내 앞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한 바이올라가 잠깐의 숨고르기 후에 가장 먼저 꺼내든 말은 다름아닌..
"어디갔었어. 길 잃어버렸나 해서 한참 찾.."
사실상 푸념에 가까운 말이었다.
주변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꽤나 또렷하게 들리는 그 말에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생각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약간이지만 안도라는 감정이 담겨있던 바이올라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져버렸다.
그에 잘 말하다가 말은 또 왜 끊나 싶어서 그녀 쪽을 바라보니?
눈으로 들어온 건 거나하게 취한 사람처럼 벌겋게 달아올라있는 바이올라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누가보면 대낮부터 한 잔 때린 건가 착각하기에 충분한 얼굴을 한채 제 입가를 틀어막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틀어막은게 아니라 나름 절박함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그 모습을 처음 목도한 순간 다른 것보다 의아함이 앞섰던 것은 그래서였다. 저렇게까지 절박할 이유가 있나 싶었으니까.
물론, 그리 생각했던 건 말 그대로 잠시 뿐이었다.
밤하늘의 별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눈동자를 한채 열심히 내 모습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스캔을 떠대는 바이올렛의 행동 덕분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으니까. 그녀가 저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말이다.
분명 감격했던 거겠지.
특별한 기대없이 그저 날 찾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달려왔을텐데 내 앞에 도착해서 확인을 해보니 내가 생각치도 못한 복장을 차려입고 있었을테니까.
심지어 그렇게 차려입은 것이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자기네 전통복장이기까지 하니..
'과연..'
생각해보니 저렇게 격하게 반응할만 했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여버린 바이올라의 눈에는 지금 내 모습이 자기하고 커플룩을 차려입은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을테니까.
"그, 그건.. 어떻게.."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어쩌다가 자기네 전통복장을 입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아드레날린 솟구치듯 솟구치는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는지 그녀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던져왔다. 그 마저도 목소리를 신경쓴답시고 제대로 끝을 맺지 못하긴 했지만 말이다.
'음..'
뭐라고 답을 해주는 게 좋으려나.
평소였다면?
이런 고민조차 하지 않고 바이올라의 귀에 달콤하게 들릴만한 말을 골라 바로 내뱉었겠지.
헌데 그러지 못했던 건 기분이 영 요상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언니인 바이올렛에게 엄한 짓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바이올라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기분이 자꾸만 요상해졌다. 바이올라의 반응이 브레이크 따위는 없는 언니하고 비교하면 순진하기 짝이 없어서 더더욱 그랬다.
꼭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를 속여먹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양심따위는 진작에 내다버린지 오래지만 아무리 그런 나라도 그러한 느낌을 견뎌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이게 편해보이더라구요. 운동할 때 입으면 좋을 것 같아서 하나 사봤어요."
그나마 가장 진실에 가까운 말을 입에 담았다.
내가 이걸 입은 건 어디까지나 그런 이유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말을 하니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바이올라의 얼굴이 살짝이지만 시무룩한 낯빛을 띄었다. 아무래도 본인이 기대하고 있던 내용하고는 살짝 달랐던 모양.
물론, 실망의 순간은 말 그대로 잠깐에 불과했다.
언제 그런 표정을 했었냐는 듯 바이올라가 동조의 의미를 담은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워올린 채 내 말에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그나저나 괜찮았어? 혼자 입기 쉽지 않았을텐데.."
그것도 잠시 바이올라가 그리 말하면서 날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반사적으로 움찔했던 것은 간과하고 있던 것이 머릿속으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지금이야 주변에서 나는 온갖 냄새들 때문에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데 이 이상 가까이 다가와도 그럴까?
그렇다면야 다행이겠지만 왠지 그렇지 않을 것만 같아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게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려보기 위함이었는데..
턱-
그런 내 시도는 얼마 가지 못했다.
몇 걸음이나 움직였다고 뭔지 모를 것이 내 움직임을 가로막아버렸으니까.
바이올라의 입에서 '그 소리'가 흘러나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응?"
뭔가 이상하다는 듯한 음성과 함께 바이올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목도한 순간 깨달았다. 바이올라가 내 몸에 남아있는 제 언니의 냄새를 포착했다는 걸.
그럼에도 저렇게 의아하다는 반응부터 튀어나온 건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와 그녀의 언니가 서로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겠지.
그만큼 바이올라의 눈에 비친 나와 바이올렛은 서로 데면데면한 사이이니 말이다.
그러니 바이올라로서는 나와 바이올렛이 엄한 짓을 한다는 상상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허나 그게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얼마 버텨주지 못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올라는 이미 냄새라는 확증을 얻은 상태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질문이 바이올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혹시 언니랑 만났었어?"
순진하기 짝이 없는 형태를 한채로 말이다.
날 향해 질문을 던지는 바이올라의 목소리에서 의심같은 감정은 단 한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마냥 쿵쿵하고 거칠게 뛰어댔다.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어떻게..'
답을 해야할까.
어떻게 답을 해야 바이올라의 머릿속에 위화감을 남기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한가하게 그런 생각따위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대답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바이올라가 위화감을 느낄 가능성또한 커질테니까.
"..아, 바이올렛님이요?"
바로 입을 열었던 건 그래서였다.
일단 그리 뱉고 나서 속으로 기도했다. 질문과 대답 사이에 존재하는 약간의 텀을 부디 바이올라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참으로 다행히도 모처럼 내 기도가 먹혀든 것 같았다.
"응, 언니가 왔었어?"
적어도 내가 볼 때는 그랬다.
날 향해 그리 묻는 바이올라의 얼굴은 처음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으니까.
"아까 잠깐 오시긴 하셨는데.."
그건 어떻게 알았냐는 식으로 말끝을 흐리니 바이올라가 헤헤하고 어색하게 웃더니 이내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냥.. 언니 냄새가 나길래."
그렇게 덧붙여진 말이 또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바이올라의 표정을 보니 그걸 노리고 던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 제가 탈의실이 어딘지 몰라서 헤매고 있었었는데.."
그러던 와중에 네 언니하고 마주쳤고, 네 언니가 날 여기까지 안내해주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 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뱉으면서도 이게 먹힐지 아닐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내 몸에서 바이올렛의 냄새가 나는 걸 해명하긴 해야했기에 일단 내뱉고 봤던 것인데..
"흠, 그래?"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다만 좀 애매하달까.
그래서 잽싸게 덧붙였다.
"네, 그리고 나서 바로 돌아가시더라구요. 보니까 많이 바쁘신 것 같더라구요."
"음, 하긴 그런 것 같긴 하더라. 뭘 하고 다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대체 뭘 하느라 그리 바쁜 건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바이올라가 이내 뭔가를 중얼중얼대기 시작했다.
대충 '시찰하러 온 건가?'라는 식의 말이었다.
자연스럽게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관심사가 그쪽으로 돌아간 듯 했으니까.
뭐, 이런 수법이 통한 데에는 주변에 풍기는 온갖 냄새들이 바이올라의 후각을 흐릿하게 만들어놓은 덕도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런 식으로 수습하는 건 아마 불가능했겠지.
일단은 어찌어찌 잘 넘긴 것 같아서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한 발 늦게 클레어가 현장에 당도했다.
얼굴에 살짝이지만 땀방울이 맺혀있고, 호흡도 살짝 흐트러져 있는 걸 보면 그녀도 날 찾아서 돌아다니고 있었던 모양.
나름대로 기가막힌 타이밍이었다.
바이올라의 관심이 다른 곳을 향해 돌아간 타이밍에 딱 맞춰서 그녀가 도착한 덕분에 바이올라의 관심이 다른 곳을 향할 겨를이 없어져버렸으니까.
클레어의 눈치를 본답시고 바이올라가 살짝 수그리고 있던 자세를 바로 하는 사이 내 무사함을 확인한 클레어의 얼굴 위로 안도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허나 그건 말 그대로 잠깐에 불과했다.
그걸 너무 티를 내버리면 나중에 내가 역정을 낼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황급히 표정을 바꿔대길래 그런 건줄 알았더니 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건 곧 알 수 있었다.
클레어의 눈동자가 내 모습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훑음과 동시에 그녀의 얼굴 위로 실망이라는 감정이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었으니까.
'아니, 저건 실망이라기 보다는..'
시무룩한 느낌?
그래, 차라리 그것에 가까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클레어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잘 이해가 안 갔다. 대체 뭐 때문에 저토록 시무룩해하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해서 내심 의아해하고 있으니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한 가지 가능성이었다.
'아, 혹시..?'
질투하고 있는 건가?
바이올라하고 옷을 맞춰입기라도 한 것같은 내 모습 때문에?
애도 아니고 설마 그럴까 싶긴 했지만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아, 맞다. 스승님."
잠시 까먹고 있었던 걸 떠올린 사람처럼 클레어를 불렀던 건 그래서였다.
그런 내 부름에 클레어가 얼굴 위로 띄우고 있던 시무룩함이라는 감정을 황급히 주워모아 숨긴 순간..
"이거 한 번 입어보시겠어요?"
들고 있던 걸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정확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길 향해 내밀어진 것의 모습을 확인한 클레어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