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29)화 (228/366)



〈 22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목소리라는 것이 촉촉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는 걸 오늘이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그만큼 따뜻하고 촉촉했다. 이런 말을 하면 좀 뜬금없긴 하지만 잘 쪄진 호빵같달까. 그것도 그냥 호빵이 아니라 한겨울에 한입 베어문 호빵 말이다.


그런 것이 귓속으로 밀고 들어와 그 안을 제멋대로 헤집어대는데..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갈 뻔했다. 그만큼 아찔했으니까.

그러한 감상과는 별개로 바이올렛의 행동에 저항해 꿈틀대는 걸 잊지 않았다.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댄다는데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반응을 내보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테니까.

물론, 효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애초에 몸을 완전히 제압당한 상태에서 꿈틀댄다 한들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살짝 짜증이 담겨있는 목소리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번  몸을 꿈틀거렸다. 이번에도 효과가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자기가 뭐라고 말한들 내 저항이 멈추는 일은 없을 거라 판단한 것일까.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딱히 이렇다할 힘이 실려있지 않았던 바이올렛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그대로 내 몸을 압박해왔다. 양 겨드랑이를 점령한 것이 몸을 꾸욱꾸욱하고 눌러대니 살짝이지만 숨쉬는  불편해지더라.

그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내 몸을 단단히 고정시키는데 성공한 바이올렛이 다시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의 손이 이내 내 몸 위를 더듬대기 시작했다.

사륵-

그러면서 탈의실 안으로 울려퍼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얇은 천 위를 노니는 느낌은 당하는 이의 애간장을 닳게 만드는 마력같은 것이 있었다.

"..놓으시죠."


 느낌을 최대한 억눌러가며 나름대로 위협적으로 느껴질만한 목소리를 쥐어짜내 입밖으로 내뱉었다. 그랬더니 답이랍시고 돌아온 건 반문이었다.

"싫다면요?"

그리 묻는 바이올렛의 목소리에는 약간이지만 웃음기가 서려있었다. 내가  놓으면 네가 뭐 어쩔거냐고 말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덕분에 그녀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그녀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 지를   있었다.


보나마나 입꼬리를 한쪽만 비뚜름하게 말아올린채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짓고 있겠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아무튼 질문을 받은 입장에서 가만히 있는 것도 좀 그랬기에 약간의 텀을 둔 뒤에 그녀의 물음에 답을 했다.


"..정식으로 항의할 겁니다."

답을 하기 전에 살짝 텀을 뒀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내가 정말 어렵게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인상을 주기 위함이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대상이 바이올렛이 아닌 바이올라였다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바이올렛이기에 이렇게 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올렛은 나와 관련해서 돌았던 온갖 소문들에 관한 것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까.

물론, 누가봐도 한 사람을 악의적으로 깎아내리기 위해 날조한 것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들 중 태반이 사실은 진실에 가깝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하긴 하지만..

아무튼 내가 악의적으로 꾸며낸 추문에 의해 상당히 시달려왔다는 걸 알고 있는 바이올렛에게 있어 방금  행동은 과연 어떤 식으로 비춰졌을까.

모르긴 몰라도 또다시 추문에 휘말릴 것까지 '감수'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분명 그랬을 거다.

그리고 보통은 그 시점에서  발 물러나는 쪽을 택했겠지.

그게 말 그대로 보통의 대응이니 말이다.


허나 바이올렛은 달랐다.

"흠, 정식으로 항의라.. 한 번 해봐요. 그럼."

그녀의 선택은 전술적 후퇴가 아닌 부채질이었다. 어디 한 번 해볼테면 해보라는 듯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던져진 그녀의 발언에 솔직히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뭘 믿고 저렇게까지 자신만만해하는지 알 것도 같았으니까.

"다만.. 그게 과연 좋은 선택일지 의문이 들긴 하네요."


정확히 그녀의 말대로였다.

일이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게 된다면?

바이올렛이 입을 손해는 체면이 구겨지는 것과 동생인 바이올라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 그리고 교류전에서의 양보 정도가 끝일 것이다.


사실 그것도 일이 철저히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아갔을 때의 이야기다.

실제로 그리 될 가능성?

솔직히 얼마나 될까.

장담하기 어려웠다.

우리측 책임자랍시고 앉아있는 외무대신의 성향과 바이올렛의 능력, 그리고 교류전을 무사히 끝내고 싶어하는 교국의 의향같은 것까지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랬다.

국가간의 문제에서 개인의 입장이나 피해사실같은  쉽게 무시되기 일수니까.

바이올렛이 교류를 청하자마자 이 때가 기회랍시고  포함한 남성진들을 넙죽 넘겨버렸던 외무대신 년의 성향을 고려하면 아마 이번에도 적당한 양보만 받고 좋게좋게 끝내자는 식으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까.

교국 측도 옳다구나하고 그걸 부추길 것이고 말이다.

그에 비해  사실을 수면 위로 부상시킬 경우 내가 입을 피해는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일단 가장 쉽게 예상되는 건 날 둘러싼 추문의 부활일 것이다. 거기에다가 바이올렛과 날 한데 엮은 새로운 것도 탄생하지 않을까.

분명 그럴 거다.


경찰들도 범죄 경력이 있는 사람들부터 의심하듯 소문이라는 것도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아예 전적이 없다면 모를까 이미 비슷한 케이스가 소문으로 돈 전적이 있다면?

전까지는 별 생각 없었던 사람도 '그럼 그렇지..'라고 중얼거리면서 날 까내리는 대열에 합류하게 될 터.

솔직히 나야 내 평판이 박살이 나든 말든 크게 상관없다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쯤되면 관심이 있든 말든 치명적일 수밖에 없을 거다.

일단 있을 자리부터가 사라져버릴테니까.

'이래서..'

레이시아가 책임자로 따라왔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렇게 꿀릴 일도 없었을테지. 겸사겸사 교류전에서도 확실하게 1승을 확보하고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고.

오늘따라 유난히 그립게 느껴지는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이고 있으니 바이올렛은 그런 내 침묵을 자신의 말에 납득해서 그런 것이라 보았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그렇죠?"


예의  웃음기어린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아마 표정을 확인해보면 싱글벙글 웃고 있지 않을까. 자기가 이겼다면서 말이다.

그런 식으로 날 놀리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바이올렛의 손은 쉬지않고  몸 위를 노닐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참 부지런하다 싶었다.

원래 몸처럼 근육질인 것도 아니고 근육이라 부르기 민망한 것들밖에 붙어있지 않은 몸 어디에 저렇게까지 열심히 만져댈만한 매력이 있는 건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뭐, 부지런한 건 손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전부터 그녀의 코도 열심히 숨을 들이켜가며 내게서 나는 냄새를 흠미하고 있었으니까.

나름대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 것 같긴 한데 자세가 자세다보니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안 들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바이올렛으로 하여금 보란듯이 입술을 앙 깨문 채 그녀의 품 안에 폭 갇혀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 찾았다."

열심히 내 몸을 더듬어대던 바이올렛이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찾았다니.

대체 뭘 찾았다는 걸까.


의아해하고 있으니 이제  위로 만지작대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되질 않는다고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손이 입고 있던 옷 안으로 쑤욱하고 밀고 들어왔다.


그 타이밍이 너무도 갑작스러웠기에 이번만큼은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러건 말건 내 옷 안으로 무사히 손을 밀어넣는데 성공한 바이올렛이 이내 그것을 이용해 뭔가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설마 이대로 벗기려는 건..'


아무리 그래도 주변에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돌아다니는 곳에서 거기까지 가려고 들겠냐만은 쉬이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바이올렛은 이미 내게서 풍겨져나오는 페로몬을 흠뻑 들이킨 상태였으니까.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었고, 그렇기에 안심할 수가 없었다.

'여차하면..'


그렇게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해가며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무슨 미꾸라지가 진흙을 파고들듯 옷 안으로 쑤욱하고 밀고들어갔던 바이올렛의 손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의 손에 잡혀있는 건..


'응?'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굵은 실로 된 고리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옷 밖으로 끄집어낸 바이올렛이 다른 손에 움켜쥐고 있던 실을 그 사이로 끼워넣었다.

그리고는 반대편으로 빠져나온 그것을 가볍게 잡아당기니 너무 헐렁헐렁해서 살짝이지만 불편한 느낌을 주던 것이 몸에 착 달라붙는 식으로 고정이 되었다.

기껏 끼워넣은 실이 다시 빠지는 일이 없도록 그것을 고리에다가 단단히 묶은 바이올렛이 그대로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몸부림까지 쳐댔음에도 놓아주지 않으려고 하던 아까하고는 다르게 담백해도 너무 담백한 태도라 솔직히 좀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 내 심정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나기라도 헀던 것일까.


"왜요? 놀랐어요? 순순히 놓아줘서?"

꼭 놀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귀 주위를 맴돌았다.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입는 거 도와주겠다고."

그게 끝났으니 물러났을 뿐이라고 바이올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게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명백히 내 실수였다.

 그래도 날 놀릴 기회만 엿보고 있던 이의 손에 제대로 된 건수를 쥐어준 거나 다름없는 행동이었으니까.


"왜 그렇게 봐요? 혹시 뭐.. 이상한 상상이라도 했어요?"

 그저 네가 옷 입는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도와주려고 했을 뿐인데 그런 내 순수한 마음을 놓고 넌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것이냐.


바이올렛은 그런 식으로 날 놀리려 들고 있었다.


내가 민망해하는 꼴이라도 보고 싶었던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시선을 피하듯 그녀를 향하고 있던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게 바이올렛 입장에서는 꽤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던 모양이다.

흐흥하고 만족스럽다는 감정이 그득하게 담겨있는 콧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모습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훑어내리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자기네 전통복장을 차려입은, 나름 진귀하다면 진귀하다 말할 수 있는 풍경을 눈에 새겨두려는 모양.


그에 민망한  몸을 살짝 움츠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니 바이올렛이 그녀답지 않게 진심에 가까운 말을 입에 담았다.

"음, 역시  어울리네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칭찬을 다 하는 걸까.

그런 의미로 그녀쪽을 향해 힐끔하고 시선을 던지니 눈으로 들어온 건 싱글벙글 웃고 잇는 바이올렛의 모습이었다.

그 상태로 그녀가 말했다.

"이러면 다른 것도 입혀보고 싶어지는데 말이죠.."

혹시 조금  전통적인  입어볼 생각 없냐고 넌지시 묻는 것처럼 말을 하길래 그녀 쪽을 향해 던지고 있던 시선을 다시 원래 방향을 향해 돌렸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 퐁당 빠져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스윽하는 소리와 함께 바이올렛의 손이 다시금 날 향해 뻗어져왔다.


옷이 구겨진 게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옷자락을 잡고 그걸 두어차례 꾹꾹 잡아당긴 바이올렛이 나와 높이를 맞춘답시고 어정쩡하게 기울이고 있던 몸을 바로했다. 그러더니..


"이만 가봐야겠네요."


오늘은 여기까지라며 작별을 고해왔다.

그또한 의외였다.


보나마나 분명  핑계 저 핑계를 대가며 눌러앉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바이올라를 의식하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예의 그 테러 사건 때문에?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빈말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증거로 그리 말한 바이올렛이 곧장 탈의실의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보아하니 등장할 때처럼 그곳을 통해 몰래 빠져나가려는 모양.

거기에 대고 뭐라 말하기도 애매해서 침묵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

그런 소리와 함께 바이올렛의 움직임이 우뚝하고 정지했다.

"그 옷은 계산하지 않아도 돼요."

그러더니 내 쪽을 돌아보며 그리 말하는 게 아닌가?


"제가 선물한 걸로 처리해뒀으니까."


거기에 대고 뭐라 말할 타이밍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반박따윈 받지 않겠다는 것처럼 내가 입을 열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바이올렛이 걷어올린 천 사이로 드러난 틈을 통해  빠져나가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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