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 왜 가끔 그럴 때 있지 않은가?
감이라는 놈이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 말이다.
내게는 지금이 딱 그랬다. 감이라는 놈이 자꾸 귀에 대고 속살거리고 있었다. 네가 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바이올렛이 따라 들어올 거라는 식으로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국의 황녀쯤 되는 위치에 있는 이가 그런 무도한 짓거리를 저지르겠냐만은 가능성은 충분했다. 상대가 바이올렛이라서 그랬다. 얼핏보면 굉장히 냉철해보이고 스스로를 절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지만 저 절제된 듯한 모습 안에는 브레이크 따위는 모르는 그야말로 욕망의 화신이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뭣보다 이곳은 바이올렛의 손바닥 안이라 할 수 있는 제국 측 부스가 아니던가.
그러니 탈의실 안으로 밀고 들어올 명분이야 만들어내면 그만일 터.
그런만큼 내가 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바이올렛이 따라 들어오는 것은 사실상 필연적인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는 건?
마땅히 당해줘야지 않겠는가.
'아직 성녀인지 이쪽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뭐, 그런 결심을 한 건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것저것 많이 생각해보고 내린 결정이었으니까.
특히나 진지하게 고려해봤던 것은 레이시아의 대항마로서의 가능성이었다. 바이올렛과 바이올라 듀오라면 레이시아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했다.
그동안은 딱히 레이시아의 대항마라 할 수 있는 존재하질 않았으니까.
저번 납치 사태같은 일이 발생한 것도 사실 그 탓이 컸다. 만약 레이시아를 견제할 수 있을만한 존재가 내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면?
그 만만치 않은 상대를 견제하기 바빠 그런 어줍잖은 시도따위는 벌이지 못했을테지.
굳이 그럴 의무 따위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렛이나 바이올라와 어울려주는 건 그 탓도 컸다. 아까도 말했듯 나는 둘에게서 레이시아의 대항마로서의 가능성을 봤으니까.
'사실 최고는..'
역시 둘보다는 삼파전인데 말이다. 대립하는 세력이 둘이라면 둘이서 손을 잡고 작당을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셋이 되면 사실상 그러니 힘드니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바이올렛이 선사하는 압박감을 배겨내지 못한 척,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린 채 탈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와서 보니 이건 뭐 바깥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허술했다.
말이 탈의실이지 일정한 공간을 따라 커다란 커튼을 둘려쳐놓은 식이랄까. 이곳이 부스 안이었기에 망정이지 야외였다면 돌풍이라도 분 순간 탈의실이고 뭐고 그대로 뒤집어졌겠지.
바깥과 탈의실을 구분 지어주는 것이라고는 조금 두꺼운 천이 전부인 상황.
그렇기에 탈의실 바깥의 소리가 누락되거나 그러는 일 없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이를테면 날 이곳까지 이끈 바이올렛이 내는 소리같은 것들이 말이다.
-바스락
저런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탈의실 앞을 서성거리고 있기라도 한 걸까. 천이 조금이라도 덜 두꺼웠다면 그 위로 비치는 실루엣같은 걸로 확인이 가능했을텐데 그러질 못한다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바깥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촉각을 기울이면서도 손을 움직이는 것또한 잊지 않았다.
물론, 서두르지는 않았다. 아무리 이곳이 바이올렛의 손바닥 안이라고 해도 이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면 마음의 준비나 겉보기엔 그럴 듯한 명분을 마련할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테니 거기에 타이밍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해서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가며 몸에 걸치고 있던 것을 한꺼풀씩 벗어던지고 있으니 아까 전부터 쉬지 않고 들려오던 바스락대는 소리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뚝 멎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직감했다. 지금쯤 바이올렛이 이쪽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거라는 걸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듣지도 못했던 소리를 단번에 포착해낼 정도로 뛰어난 청력의 보유자가 바로 바이올렛 아니던가. 뛰어난 후각을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병때문에 그동안 그것을 제대로 써먹지 못했던 여파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청각은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소리의 작음이나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얼마 두껍지도 않은 천따위는 사실상 별 문제도 아닐 터.
그러니 아마 지금쯤 성능 좋은 헤드폰을 뒤집어 쓰고 ASMR을 감상하는 느낌으로다가 내가 옷 벗는 소리를 감상하고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니 지금껏 들이닥치지 않고 참은 게 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때로는 대놓고 보이는 것보다 소리나 실루엣 같은 걸로 상상력을 자극하는게 훨씬 자극적인 때도 있는 법이니까.
바이올렛에게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딱 그럴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걸 게을리 하지 않고 있으니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누군가 꼴깍하고 입 안 가득 차오른 군침을 삼키는 듯한 소리가 벽 역할을 맡고 있던 천을 뚫고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직감했다.
모르긴 몰라도 저 천이 걷어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아마 지금쯤 손을 뻗고 싶어서 미치기 일보직전이지 않을까.
탈의실 바깥에서 버티고 있을 바이올렛의 상태를 나름대로 상상해보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스륵
그렇게 입고 있던 것들을 속옷만 남겨두고 모두 벗어던진 뒤 들고 들어온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랑인족의 전통복장은 상의와 하의로 나누어진 굉장히 일반적인 구조였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하의부터 걸쳤다. 그리고는 상의까지 몸에 걸치니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이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입기 까다로운 물건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원인은 옷 곳곳에 달려있는 고정용 끈 때문이었다.
특이하게도 랑인족의 전통복장은 옷 곳곳에 달린 끈을 이용해 고정을 시키는 형식이었는데 끈이 손이 쉬이 닿을만한 위치에만 달려있는 게 아니다보니 그걸 묶는게 은근히 고역이었다.
그렇다고 묶지 않고 내버려둘 수도 없는 것이 일단 굉장히 꼴보기 싫을 뿐더러 기본적으로 펑퍼짐한 스타일의 옷인지라 끈으로 고정해두지 않으면 그대로 스르륵 흘러내려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묶어보려고 끙끙거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스윽하고 벽 역할을 맡아주고 있던 천에 손을 대는 듯한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리고 뒤이어 울려퍼진 것은 천이 걷히는 소리였다.
무슨 핑계를 대며 안으로 밀고 들어올 생각인가 했더니만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올테면 오라지. 안 그래도 나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으니 말이다.
"잘 안 되나봐요?"
딱 그리 생각한 순간, 제법 능청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자박하고 가볍게 바닥을 밟는 소리가 났다.
그에 이게 지금 무슨 개짓거리냐고 따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려 막 안으로 들어선 이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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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 시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꼭 마치 맨몸으로 사막에 던져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하도 바짝 말라서 입 안이 꺼끌꺼끌하기까지 한 것이 꼭 모래라도 한웅큼 집어삼킨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축였던 건 그래서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입술이 부르터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 모습을 보일 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리했던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리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기껏 입술을 축였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짝 마른 상태로 돌아가버렸으니까.
그렇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좋고 나쁨을 따지면 오히려 좋은 쪽에 속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끝이 저릿저릿거리는 이 느낌은 몇 번을 겪어도 적응이 되지 않을 것 같긴 했지만 그것하고는 별개로 심장이 기분 좋은 느낌으로 뛰고 있었으니까.
이게 기분좋은 스릴이라고 하는 걸까.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두꺼운 편인줄로만 알았던 스스로의 인내심이 실은 종잇장마냥 얄팍한 수준이었다는 걸 말이다.
쿵쿵하고 북소리를 닮은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질 때마다 사람을 약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저 천을 당장이라도 치워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불쑥 솟구쳤다.
그 욕망이 어찌나 강렬한지 스스로 생각해도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기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어린 애도 아니고..'
이래서야 좋아하는 애를 괴롭혀서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끌려하는 꼬맹이하고 다를 게 없지 않나.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생겨먹길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
이런 망를 하면 좀 우습다는 건 알지만 자신이 이러는 데에는 이안의 탓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그러게 적당히 먹음직스럽고, 적당히 사랑스러웠어야지 짜증을 내거나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워 버리면 자신더러 대체 어쩌란 말인가?
좀 꼬인 구석이 있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자신도 평범한 이들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자신이라고 해서 좋아하는 이가 진심으로 미소를 짓는 모습이 궁금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궁금하다.
짜증을 내는 모습마저도 이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질진데 이쪽을 향해 진심으로 미소를 지어보이는 모습은 어떻겠는가.
분명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사랑스럽겠지.
그렇지만 시작부터 잘못된만큼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가질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기에 지금 주어지는 것만으로 만족해야한다는 걸 알기에 이러는 것이다.
바이올라에게는 비교적 쉽게 주어지는 것이 자신에게는 그럴 리 없으니까.
거기서 오는 박탈감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참..'
살다살다 동생한테 질투를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이래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하는 건가 보다.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올줄은 말 그대로 꿈에도 몰랐으니까.
'..보고 싶다.'
천은 그 안의 풍경이 드러나는 것까지는 막아줄 지언정 안에 든 것이 풍기는 달큰하기 그지없는 냄새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래서 미칠 것 같았다.
아까 전부터 달달하기 그지없는 냄새가 자꾸만 콧속으로 흘러들어와 이성을 흐릿하게 만들어놓고 있었으니까.
그것만해도 충분히 미칠 것 같은데 거기에 대고 기름을 끼얹어대는 것은 손에 살짝 힘을 줘서 잡아당기면 그대로 부욱 소리를 내며 찢어질 것만 같은 천 너머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들이었다.
-스륵
천이 살결을 스치며 나는, 평소에도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이다지도 자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았을까.
기분 탓인지 아니면 이쪽을 경계하기 바빠서 상대적으로 다른 쪽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어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도 느릿하게 울려퍼지는 그 소리가 자꾸만 욕망에 불을 지펴댔다.
'미리 사람을 물려놓길 잘했네..'
그렇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지금쯤 사방으로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겠지.
2황녀가 처음 보는 남자를 데리고 오더니 그 남자가 들어간 탈의실 앞을 서성대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뭐, 그런 점을 떠나서 그냥 이안의 모습을 남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남이 본다고 해서 닳아 없어지는게 아니라는 것쯤은 자신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왠지 그랬다. 그 모습을 자신만 봤으면 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또한 알고 있다.
이안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두지라도 않는 이상은 분명 그럴테지.
그래서.. 하다못해 그 모습을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이라도 자신이었으면 했다.
고작 그 정도로 이 불쑥불쑥 고개를 치켜드는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목 마를 때 삼키는 한모금의 물 정도는 되어줄 것 같았다.
'돌겠네..'
딱 그리 중얼거린 순간이었을 것이다.
천으로 된 벽 너머에서부터 끄응하고 곤란해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순간 다른 것보다 먼저 손이 튀어나갔던 건 말 그대로 겉잡을 수 없는 충동 하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천이 걷어지면서 난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지고 나서야 뒤늦게 아차했지만, 일은 이미 터져버린 상황.
그렇기에 뻔뻔해지기로 했다.
이제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챙길 수 있는 것이라도 챙겨야하지 않겠는가?
"잘 안 되나봐요?"
해서 능청스레 그런 말을 지껄이며 걷힌 천 사이로 몸을 욱여넣었다.
두근- 두근- 하고 천을 움켜쥔 손가락 끝이 제법 애타는 느낌으로 맥박치는 것을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