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26)화 (225/366)



〈 22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딱 보니까 인형이 되는 운명을 피하기 힘들 것 같은데 그렇다면 눈요기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인데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것은 그리 긍정적인지만은 않았다.


난감해하는 눈치랄까.

그런 것이 바이올라는 물론이거니와 클레어의 얼굴에도 묻어있었다.


날 갈아입히고는 싶지만 갈아입기는 귀찮은 걸까.

물론, 그런다고 봐줄 생각은 없었다.


"싫으시면 말고요."

싫으면 하지말고 그냥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구경이나 다니자는 식으로 말을 하니 둘의 얼굴 위로 내려앉은 것은 고민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어야하는 귀찮음과 본연의 욕망 사이에서 열심히 저울질을 해대던 둘 중에서 먼저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다름아닌 바이올라였다. 귀찮은 것보다 내 색다른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 쪽이 훨씬  강했던 모양.

그런 식으로 바이올라가 선수를 치니 클레어또한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뜻밖의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다만 그대로 진행할 수는 없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식으로 코디를 하자니 내가 아닌 다른 이가 걸렸을   사람이 최선을 다하지 않을 거라는 게 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둘다 어떻게든 자기가 눈 여겨본 옷을 내게 입히려고 귀찮음까지 감수해가며 내 제안을 수락했던 것인데 다른 여자가 걸린다?

나라도 그 순간 흥미를 잃어버릴 거다.


그래서 그냥 깔끔하게 내가 둘에게 어울릴만한 옷을 하나씩 골라주고, 둘이 내게 어울릴만한 것을 하나씩 고르는 식으로 하기로 했다.


"그러면 다 고른 다음에 다시 여기서 보는 걸로 하죠."

진열되어있는 옷들의 종류가 하도 많다보니 부스는 상당히 넓었고, 제대로 돌아다니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서 그리 말했더니 둘은 살짝 아쉬워하기는 했지만 금세 괜찮은 걸 찾기 위해 흩어졌다. 둘다 눈여겨 봐둔 게 있는 걸로 아는데 이왕 이렇게  김에 봐둔 것보다 더 괜찮은 게 있을지 찾아보려는 모양.

그렇게 서서히 멀어져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둘에게 입혀보면 괜찮겠다 싶은 것을 찾아 부스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까 대충 돌아다녀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부스 안에는 정말 별의별 의상이 다 진열되어 있었다. 단순히 전통복장들만 진열해놓은 줄 알았더니 약간 코스튬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것도 섞여있는 식이랄까.

심지어는 코스튬의 왕도 격이라  수 있는 바니복 비스무리하게 생긴 하이레그 형태의 코스튬또한 버젓이 자리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걸 보며 다시 한 번 느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걸.

다만 바니복이 아니라 바니복 비스무리하게 생긴 것이라 했던 것은 어째 내가 아는  바니복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전체적인 외관은 내가 아는그 바니복이 맞는데 사타구니 부분의 생김새가.. 좀 그랬다. 뭔가가 튀어나올 걸 대비해서 만들어진 것같은 게 꼭..


'이거 설마..'

남성용은 아니겠지?

남성용 바니복이라니.

거의 민트초코나 파인애플 피자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지닌 단어 조합이었다.


그런 게 현실에 존재한다는 걸 믿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아니, 이딴 게..'


대체 왜 필요한 거지?

이런 게 정말 수요가 있나?


머릿속이 하도 혼란스러워서 존재의 부정을 시도해봤지만 진열용으로 구비되어 있는 것들 아래에 차곡차곡 개어져있는 것들이 그런  시도를 방해했다.


남녀의 정조관이 역전된 세계라서 이 세계에서는 남성용 바니복이 이만큼 수요가 있는 것일까.

마네킹 아래에 자리한 진열장들을 그득하게 채우고 있는 바니복들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한채 나름대로 철학적인 고찰을 이어나가고 있자니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오해를 했던 모양이다.


무슨 순찰도는 경비병 NPC마냥 멀리서 서성거리고 있던 제국 측 접객원이  향해 다가왔다.


문제는 그렇게 날 향해 다가온 이가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여성 손님은 남성 접객원이 상대하고 남성 손님은 여성 접객원이 상대하는 것이 기본 방침인 걸까.


아무튼 그런 식으로 날 향해서 다가오다가 한 발 늦게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접객원이 어깨를 움찔하고 떨었다. 뭔가를 찾는 것같아서 도와줄 생각으로 왔는데 손님이라는 이가 들여다보고 있던 게 생각치도 못했던 물건이라 당황했던 모양.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예쁘장한 편인 접객원의 얼굴이 민망함이라는 감정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렇지만 그건  그대로 잠깐에 불과헀고 괜히 접객원 역할을 맡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순식간에 원래의 얼굴색을 되찾은 그녀가 자연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향해 말을 걸어왔다.


"손님? 혹시 뭐 찾고 계신 거 있으신가요?"


네 몸에 맞을 사이즈를 찾고 있는 것이냐라고 묻는 듯한 그녀의 발언에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말도  되는 모함이었으니까.


내게 입힐 옷을 찾겠답시고 떠나간 바이올라나 클레어가 들고 와도 꺼지라고 할판에 뭣하러 저딴 걸 내 스스로 입는단 말인가?


"아뇨, 없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날카롭게 받아쳤더니 접객원이 찔끔하며 물러났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리 좋지 않은 타이밍에 들이댔다고 자책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는 쓸데없는 오해를 추가하는 걸 피하기 위해 곧장 그 앞을 떠났다.

'아니..'


됐다고 했으면 다른 손님이나 케어해주러  것이지 쓸데없이 왜 쫓아오는 걸까.

제대로 케어하지 못한 것 같아서 신경이라도 쓰였나?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약간의 거리를 둔채 졸졸 쫓아오는 접객원을 뒤에 매단 채로 부스 탐방을 이어나갔다.

그러다보니  괜찮아보이는 것들도 몇 개 발견할 수 있었다.


개중에 하나는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대체 어디서 봐서 그런 느낌이 드나 했더니만 지나가듯 들려온 접객원의 설명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아, 혹시 그 옷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옷은 랑인족 남성들이 주로 입는 전통복장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던 건지를 말이다.


어쩐지 낯설지가 않더라니만.


바이올라가 입고 있는 것하고 세트 격의 복장이라서 그랬던 모양이다.

뭐, 그런  떠나서 일단 생긴 것 자체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품이 상당히 넉넉해보이는 것이 움직일 때 굉장히 편할 것 같았으니까.

여기 남자들이 입는 복장은 기본적으로 몸에 달라붙는 경향이 있어서 운동할 때는 일부러 본래 사이즈보다  사이즈 정도는 큰 걸 입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말이다.


이거하고 비슷한 걸 몇  구비해놓으면 굳이 그런 짓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덤으로 자기하고 세트라고 바이올라가 좋아할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그걸로 하나 골랐다.

"아, 혹시 여성용도 하나 구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는 겸사겸사 어느새 옆으로 와서 자리한 접객원에게 클레어의 것도 요청했다.

바이올라가 입고 있었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틀림없이 그녀한테도 잘 어울릴테니까.

"여성용 말씀이신가요? 혹시 치수는 어떻게.."

"어.."


클레어 사이즈가 어떻게 되더라.


잠시 고민하다가 눈치껏 불러봤다.


'틀리면 뭐..'


그때 맞는 걸로 바꾸면 되겠지.

그렇게  주문을 접수한 접객원이 그걸 소화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빠져나가고, 홀로 남겨진 나는 바이올라에게 잘 어울릴만한 것을 찾기 위해 열심히 눈을 굴렸다.

아마도 그러고 있던 와중이었을 것이다.

뭉클한 감각이 뒤통수를 꾸욱하고 내리누름과 동시에 시야가 갑자기 까맣게 물들었다. 그와 함께 귓가로 울려퍼진 건..


"흐으음.."


어쩐지 낯익게 느껴지는 누군가의 콧소리였다.


귓가로 울려퍼진 그 소리를 들은 순간 깨달았다.


지금 뒤에서 날 끌어안고 있는 이의 정체를 말이다.


"..장난치지 마시죠. 황녀님."


해서 곧바로 그 점을 찌르고 들어갔더니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건 분위기 참 못 맞춘다고 탓이라도 하는 것처럼 작게 혀를 차는 소리였다.


"지금 누군지 알겠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말이죠."


그걸 못한 게 그리도 아쉬웠던 것일까. 아쉬움이 그득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와 함께 눈앞을 가리고 있던 손이 치워졌다.


그렇게 원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 시야를 확인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정상적인 루트로 접근했다면 아무리 이런 상태라고 한들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구경하는데 푹 빠져있는 상태였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그런 상태도 아니었는데..

'흠.'

그 순간 목덜미를 스치며 물러나는 바이올렛의 손길과 함께 목덜미를 간질인 것은 바깥 특유의 서늘한 공기였다.

'설마..?'


천막을 걷어내고 거기로 들어온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황녀씩이나 되는 이가 그런 짓까지 했을까 싶기는 했지만 그게 아니고서는 지금 목덜미를 스치며 지나가는 이 바람을 설명할 길이 없긴 했다.

아니, 그 부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온 걸까.

이토록 은밀하게 접근한 걸 보면 그냥 얼굴보려고  것 같지만은 않은데 말이다.

그 부분을 궁금해하고 있자니 어쩐지 흡족해하는 목소리가 귓바퀴를 따라서 난 솜털을 스치며 귓속으로 파고들어왔다.

"그거 사려고요?"

그 오싹오싹하기 그지없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가느다란 것이 귓속을 간질이는 느낌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으니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바이올렛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하긴, 우리 전통복장이 괜찮긴 하죠. 생긴 것도 깔끔하고 다른 것들하고는 다르게 움직이기도 편하고."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순전히 내 의지로 랑인족의 전통복장을 구매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상당히 기꺼워하고 있는 듯 했다.

'하긴..'

 입장에서 보면 관심있는 외국인 여성이 우리나라에 흥미를 보인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니까.


은근히 국뽕이 차오르기도 하면서 혹시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닐지 두근거리기도 하겠지.

"괜찮은 안목이네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바이올렛이 예의 그 흡족해하는 목소리로  안목을 칭찬해왔다.

그리고  뒤로 따라붙은 것은..

"이왕 이렇게  김에 한 번 입어보는 건 어때요? 지금 입고 있는 거.. 꽤 불편해보이는데."


다름아닌 그런 제안이었다.

대체 뭘 기대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살짝 들뜬 목소리로 던져진 그 제안을 날카롭게 받아쳤다.

"왜요? 사주기라도 하시려고요?"

일부러 비꼬듯 내뱉었던 것인데 안타깝게도 효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뭐, 선물 하나 쯤이야 못해줄 것도 없죠."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이루어진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이것저것 많은 걸 공유하는 사이잖아요?"


심지어는 추가타까지 곧바로 날아왔다. 네 어깨에 새겨져있는 것을, 그리고 네가 지금과 같은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게 누구 덕분인지를 잊지 말라는 것처럼 바이올렛의 손으로 추정되는 것이 목덜미 부근을 툭툭 두들겨댔다.

그에 반박할 도리를 찾지 못해서 분해하는 척 침묵하고 있었더니 이내 귓가로 울려퍼진 건 피식하고 가볍게 웃는 소리였다.


"아무튼 갈아입고 나와봐요. 탈의실이라면 저쪽에 있으니까."

어떻게든 내가 자기네 전통 복장을 차려입은 꼴을 봐야겠나 보다.

바로 조금 전에 협박 비스무리한 멘트를 내뱉은 사람하고 동일인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친절한 태도를 한채 그녀가 손수 한쪽을 가리켰다.

그런 바이올렛의 손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따라가보니 눈으로 들어온 것은 커튼같은 질감을 가진 커다란 천을 이용해 만들어놓은 간이 탈의실이었다.


문제는 너무 간이로 만들어놓은 탓에 잠금장치같은 게 없어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드륵하는 소리와 함께 둘러쳐져있던 천이 걷히며 그 안에서 남자 한 명이 걸어나왔다.

 안구건강에 심히 좋지 않은 복장을 몸에 걸친채로 말이다.

'쓰읍..'

덕분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간이탈의실에 잠금장치같이 거창한 물건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있는 탈의실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미친 짓거리를 저지를 인간은 없을 거다.


제국 측에서 맘 먹고 차려놓은 부스에서 그런 소리를 벌인다는 건 제국 측에 대고 한 판 해보자고 선언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얘만 빼고 말이지..'

보안이 참으로 형편없어보이는 탈의실의 모습을 목도한 순간 난 느꼈다.

저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누군가 따라 들어올 거라는 강렬하기 그지없는 예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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