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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이 되기 전에 (225)화 (224/366)



〈 22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뭔가 보여주긴 해야한다는 생각에 일단  딱 감고 저지르긴 했는데 막상 저지르고 나니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내게 입을 맞춘 뒤 뒤로 물러나는 디아나의 얼굴은 취하기라도 한 것마냥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어찌되었건 여러모로 신경쓰이는 년한테 차이를 과시하긴 했으니 더이상 이곳에 볼일 따위는 없다는 듯 디아나가 깔끔하게 물러나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니까.


아까 가기 싫다고 미적거리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어찌보면 도망치는 듯한 느낌도 나는 것이 크게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아까 전부터 날아와 꽂히던 주변의 시선들이 꽤나 부담스러웠던 모양.

"얼른 다녀올게.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바이올라를 패닉 속으로 밀어넣은 디아나가 자리를 빠져나가고 자리에 남겨진 것은 말 그대로 눈 뜨고  베인 꼴이 되어버린 바이올라와 씁쓸해보이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클레어였다.


보아하니 주변의 눈치, 그리고  눈치를 본다고 바빠 제대로 된 스킨쉽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하고는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게 방금과 같은 일을 저질러대는 디아나가 부럽기라도 했던 모양.

그리고 그런 것에 부러움을 느껴버린 스스로가 한심스럽게 느껴지고 그랬던 것이겠지.


분명 그런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표정이 나올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 클레어보다도 더욱 극심한 감정의 풍파에 시달리고 있는 이가 바로 바이올라였다.

설마 눈앞에서 그런 일을 당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해던 건지 아까 전부터 떡하니 벌어져있던 바이올라의 입은 도저히 닫힐 줄을 몰랐다.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턱이 빠질 때까지 그러고 있을 기세라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바이올라님?"

여전히 이쪽을 향하고 있는 수많은 시선들을 생각하면 황녀님이라고 제대로 불러야함이 맞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크게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바이올라는 내가 자길 그런 식으로 부르는 걸 싫어했으니까.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싫다나?

그래서 나름대로 타협을 본 것이 바로 방금 사용한 호칭이었다.

그렇게 둘이 합의를 통해서 정한 호칭이었던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그녀를 부르는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간 순간 떡하니 벌어져있던 바이올라의 입이 다물어졌으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내 앞에서 멋진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란데 얼이 빠져있는 모습을 보여줬던  민망했던 모양이다.

큼큼하고 두어번 정도 헛기침을 한 바이올라가 이내 내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뭔가 묻고 싶은 것이라도 생긴 모양인데..


그래서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뜻으로 그녀와 시선을 맞춰봤다.

그러자 돌아온 것은 도둑이 제발을 저리는 듯한 반응이었다. 비단을 생각나게 하는 광택을 흩뿌리는 하얀 천으로 뒤덮인 그녀의 어깨가 흠칫거리더니 이내 위를 향해 튀어올랐으니까.


"혹시 뭐 궁금하신 거라도.."

"아, 아니 난 그.."

"바이올라님?"


맞추고 있던 시선을 떼어내지 않은 채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해보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연분홍빛 입술 사이에서 간신히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은가.. 싶어서.."


대체 뭘 물어볼 생각이길래 이리도 뜸을 들이나 했더니만 고작 이런 질문이었을 줄이야.

아니,  부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괜찮냐니?

대체 뭐가 괜찮냐는 걸까.


순간적으로 그 부분이 이해가 잘  되서 의아해하고 있으니 그런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뭔가를 말할 듯 말 듯 입술을 열심히 오물대던 바이올라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얼굴 위로 내려앉은 것은 시무룩함이라는 이름의 그늘이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바로 조금 전까지 기대감과 흥분으로 햐앟게 빛나던 얼굴 위로 그러한 것이 슥 드리워지는 광경을 목도한 순간 깨달았다.

바이올라가 물었던 괜찮냐는 질문의 의미를 말이다.

저렇게 시무룩해하는 이유는 덤이었다.

아무래도 바이올라는 나와 디아나의 관계가 자기가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깊어보이는 것 같아서 낙담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모처럼 정말로 마음에 드는 이성이 나타나서 잘해볼 생각으로 접근하고 있는 와중에  사람한테 이미 연인이 있다는 걸 알게되면 아마 나라도 저랬을테니까.


보통이라면 그 시점에서 열에 아홉이나 여덟 정도는 포기를 선언할테지만..


바이올라는 그 정도까지는 아닌  같았다.

낙담한 것하고는 별개로 말이다.

그럴 수 있었던  이 세계에서 일부다처가 일반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연인을 뺏고 뺏기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으니까.

아마 지금쯤 자기가 더 잘해서 뺏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같은 걸 하고 있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어딘가 시무룩해보이던 바이올라의 얼굴이 다부지게 변했다.


그리고 정확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바이올라의 태도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한  말이다.


디아나가 그런 짓을 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아직 만난지 얼마 안 된만큼 시간을 두고 알아가보겠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뭐랄까..


"여기도 한  구경해볼래?"


날 어떻게든 제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몸 곳곳에서부터 풀풀 풍겨나왔다. 심지어는 행동마저도 그러했다. 이전까지는 자그마한 스킨쉽에도 부끄러워하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디아나의 선전포고 후로는 그런 느낌이 많이 사라졌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이 정도쯤은 거뜬히 해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마냥 부끄러운 걸 억지로 참는 듯한 느낌이긴 했지만 말이다.

덕분에 나름대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실수나 우연을 가장해 손이라도 스치면 순간적으로 얼굴을 화악하고 붉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괜히 헛기침을 해대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해대는게 꽤 귀여웠으니까.

특히 귀여웠던 건 뭐니뭐니해도 꼬리 쪽의 반응이었다.


표정까지는 어찌어찌 컨트롤할 수 있어도 꼬리 쪽만큼은 의지로 어찌할 수가 없었는지 우연을 가장한 스킨십이 벌어질 때마다 그곳이 풍차 돌아가듯 돌아가곤 했으니까.


처음에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더니만 내가 자꾸만 그쪽을 힐끔대니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서 손으로 황급히 꼬리를 움켜쥐어 단속을 시도하는 모습또한 별미였다.

덕분에 웃지 못할 헤프닝도 몇  있었다.


민감하기 그지없는 곳을 계속 움켜쥐고 있을 수는 없었는지 바이올라는 꼬리가 그런 반응을 보일 때마다 그것을 움켜쥐는 식으로 꼬리의 반응을 단속했는데 한 번은 힘조절에 실패해버리는 바람에 굉장한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적도 있었다.

-끼이잉!

기본적으로는  위풍당당함이라는 것을 장착하고 있는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귀여운 비명이었고, 그 탓에 상당히 이목을 끌었다.

그렇게 쏟아지기 시작한 시선들은 바이올라로서도 감당키 어려운 것들이었는지 또다시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든 얼굴을 풍성한 꼬리를 이용해 감춰보려고 하는 모습은 정말로..

꼭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맛이 있었다.


뭐, 그런 헤프닝 뿐만 아니라 나와의 스킨십에 반응해 풍차마냥 돌아가기 시작한 꼬리에 지나가던 사람이 채이는 일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한결 적극적으로 변한 바이올라가 다음으로 구경해보자 권한 곳은 다름아닌 각양각색의 옷들을 걸친 마네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부스였다.


그렇게 여기도 옷, 저기도 옷인 풍경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한 건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한국판 카사노바 놈 말이다.

'그  분명..'

이성한테 옷을 선물하는 건 보통 의미가 아니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말이다.

뭐라 그랬더라.


놈을 떠올리는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 지 몰라도 선명하게 떠오르질 않았다.

'그러니까 분명..'


-이성한테 옷을 선물한다는 건, 특히나 남자가 여자한테 옷을 선물한다는 건 말이야..

분명 그런 식으로 시작되는 대화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때 듣는  마는 둥 하니까 놈이 뭐라고 그랬더라..


속으로 그리 되뇌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새벽안개마냥 머릿속에 부옇게 끼어있던 것이 화악하고 걷히며 놈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직접 벗겨보고 싶다는 뜻이야.


그 말이 지금 이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이유는 뭘까.

아무리 여자와 남자의 성욕이 뒤바뀐 세계라 해도 여자가 남자가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는 건 아닌데 말이다.


지금 들어가려는 곳이 옷가게 비슷한 곳이라서?

그래서 그 말이 떠올랐던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넘기려니 그럴 수가 없어져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봐버리고 말았으니까.


부스 안을 채우고 있는 각양각색의 옷들을 둘러보며 달뜬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바이올라의 모습을 말이다.


눈동자까지 살짝 몽롱한 것이 누가봐도 뭔가를 상상하며 흥분하고 있다는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문제는 바이올라만 그런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바이올라만큼은 아니어도 흥분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클레어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 그녀가 특히나 눈을 못 떼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다름아닌 벽에 걸려있는 한 복장이었다.

그래서 한 번 살펴봤다.

대체 뭘 보고 그리도 눈을 못 떼는가 싶었으니까.


그렇게 클레어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쫓아간 순간 눈으로 들어온 것은 참으로 괴랄하기 짝이 없는 디자인의 복장이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게 어떻게 비춰졌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저걸..'


마린룩이라고 부르던가?


하늘하늘 해보이는 천에 시원한 색감을 가진 옷이 클레어의 시선이 못박혀있는 쪽 벽에 걸려있었다.

뭐, 그것 외에도 옆에 다른 옷들도 많았지만 그걸 바라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쪽에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에 맞춰 호흡또한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 변화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느껴져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목덜미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아날 지경이었다.

저런 옷이 취향이었던 걸까.

그 순간 처음으로 클레어와의 관계를 역전시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저걸 강요당했을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실제로 그리 된다면 순순히 입어주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만큼 저건 아무리 나라도  그랬다.

남성 마린룩이라니.

여성 마린룩이라면 모를까 그딴  대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딱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부스 앞에 늘어선 줄이 꽤나 길었기에 들어서기에 앞서 뭐가 좋을까하는 느낌으로 안에 진열되어있던 것들을 흥미 가득한 시선을 한채 쭉 훑던 바이올라의 시선이 클레어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에 닿았다.


그 순간 등골을 타고 내달린 것은 흔히 소름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아마 입고 있는 옷을 까뒤집어 등을 확인해보면 등골을 따라서 돋아난 닭살들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식으로 불안하기 그지없는 예감과 함께 부스 안으로 들어섰지만, 그런 예감과는 별개로 구경하는 재미 하나만큼은 쏠쏠했다.


황실에서나 입을 법한 화려하기 그지없는 복식은 물론 평상복이라는  믿기 힘들 정도로 과감하기 그지없는 복장들이 부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까.

개중에는 꽤 탐이 나는 것들도 있었다.


보고 있으면  번쯤 입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코스튬들이라고 해야할까.


관계를 맺은 여성들이 하나같이 몸매가 뛰어난 편이다보니 자꾸만 그런 쪽으로 상상이 되는 건 솔직히 어쩔 수 없었다.

'아씨..'

눈  감고 하나 질러봐?

보니까 눈여겨 본 것들 중에서  개는 그리 비싼 것 같지도 않던데 말이다.

 그대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는데 푹 빠져있으니 귓가로 울려퍼진 것은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제안이었다.

"그.. 필요한  있으면 사줄까?"

그 제안을 건네온 것은 다름아닌 클레어였다.


그에 그녀 쪽을 바라보니 그녀가 내 시선을 받자마자 허둥지둥 말을 쏟아냈다.

"아니, 오늘 선물 받은 것도 있고 하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그 빚을 갚는 것일 뿐이니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뉘앙스의 말이 귓가로 울려퍼졌다.

우스운 점은 뭣이 중한지도 모르고 옆에서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클레어의 말에 은근히 동의를 표하는 바이올라의 행동이었다.

클레어가 언급한 선물이 신경쓰이진 않는 걸까.


'하긴..'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다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올라는 선물의 정체를 모르니까.


만약 그녀가 클레어가 언급한 선물의 정체가 귀걸이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저렇게 순순히 동의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분명 그것부터 짚고 넘어가려고 들었겠지.

아무튼 둘이 그런 식으로 나오니 무작정 거절하기도 좀 그랬다.

그렇다고 무작정 받아들이자니 자칫 잘못하면  갈아입는 인형 신세가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잽싸게 조건을 덧붙였다.


"음..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서로 상대방에게 어울릴 것 같은 옷을 골라주자.

그런 제안이 내 입으로부터 흘러나온 순간 클레어와 바이올라의 시선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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