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아무래도 추첨이 끝나는대로 바로 달려오겠다던 말은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벽을 가르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디아나는 아침에 입고 나갔던 기사용 정복을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보아하니 옷조차 갈아입지 않고 바로 달려온 모양.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디아나의 얼굴은 발그레하니 상기되어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또렷해지는 숨소리또한 멀리서부터 달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퍽 거칠었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확인하게된 디아나의 표정은 좋은 일이라도 있는 사람마냥 꽤 밝았다.
덕분에 그녀로부터 듣기도 전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추첨 결과가 나쁘지 않게 나왔다는 걸.
'그렇다는 건..'
일단 제국하고 1차전에서 맞붙는 경우는 피했다는 소리겠지.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오늘 아침에 숙소를 떠나기 전에 잠깐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떠올려보면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1회전에서 제국하고 맞붙게 되는 경우를 최악의 시나리오로 꼽았으니까.
만약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지금도 이쪽을 향해 열심히 다가오고 있는 디아나의 표정이 저렇게 밝지만은 않았겠지.
오히려 세상의 근심이란 근심은 죄다 짊어진 것처럼 우중충한 표정이었을 거다.
'그러면..'
제국 말고 어디랑 붙게 된 걸까.
결국 궁금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제국을 제외하면 남는 곳이라고 해봐야 교국 측하고 왕국 연합 쪽뿐인데 둘 중에 어느 쪽이 우리랑 1회전에서 만나게 된 걸까.
이제 몇 걸음만 더 내딛으면 내 앞에 도착하게될 디아나로부터 진실을 듣기 전에 내 개인적인 소망부터 말해보자면 개인적으로는 왕국 연합 측이기를 바랬다.
그쪽이 더 약할 것 같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쪽은 물론 교국 측의 전력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누가 더 쌔고 누가 더 약한지를 가리겠는가.
그보다는 그쪽이 그나마 덜 껄끄러울 것 같아서 그런 것이었다.
그만큼 홈 어드밴티지라는 것은 쉬이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교국 측이 생각이 있다면 어줍잖은 짓거리 따위는 벌이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 부분이 신경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때로는 자그마한 차이가 결과를 완전히 뒤집어 놓기도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우리의 첫 상대는 어느 곳일까.
디아나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호기심이라는 놈의 몸집이 산더미처럼 불어나는 걸 느끼면서 그녀가 내 앞에 도달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어느새 내 양옆을 차지한 클레어와 바이올라를 향해 한 번씩 시선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당연히 둘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일단 클레어가 보여준 반응부터 말해보자면 그녀의 반응은 딱 예상범위 내에 속해있었다.
올게 왔구나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과 함께 살짝 낙담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디아나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이전처럼 나와 데이트를 즐기듯 움직이는 건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렇게 평범한 축에 속하는 반응을 내보인 클레어에 비해 바이올라가 내보인 반응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일단 반은 자체는 그리 격렬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클레어와 마주쳤을 때처럼 대놓고 경계심을 드러내거나 금방이라도 으르렁댈 것처럼 그러진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의외였다.
디아나가 내 이름을 우렁차게 외친 시점에서 나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텐데 저렇게 침착한 반응이라니.
혹시 포기하기라도 한 걸까.
얼굴을 보면 또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한 두어 걸음 정도를 남겨둔 디아나를 바이올라는 아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디아나의 행동이나 외모를 하나하나 눈에 새겨놓고 말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딱봐도 만만치 않은 상대로 보이니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기 보다는 일단 상대에 대한 파악부터 해볼 생각인 모양인데..
딱 거기까지만 보고 바이올라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이제는 디아나를 맞이해야할 시간이었으니까. 겸사겸사 아까 전부터 궁금했던 것도 해결하고 말이다.
안 그래도 날 찾는 답시고 꽤나 헤맸던 모양인데 거기에 어마어마한 인파로 인해 생겨난 사람의 벽을 뚫어낸다고 꽤나 심력을 소모했던 것일까.
마침내 내 앞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한 디아나의 얼굴에는 인파에 질린 기색이 역력하게 서려있었다.
"오셨어요? 사람 진짜 많죠?"
"그러게 어우.."
보기만해도 질린다는 것처럼 진저리를 쳐대는 디아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클레어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그녀가 작게 숨을 고르기 시작한 타이밍에 맞춰서 입을 열었다.
"추첨은 어떻게 됐어요?"
여기서 시간을 더 주게 되면 관심이 바이올라 쪽으로 옮겨가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라 일부러 그리했던 것인데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바이올라를 향해 돌아가던 디아나의 시선이 다시금 내쪽으로 돌아왔으니까.
그러면서 얼굴이 다시 한 번 활짝 피어나는 것이 대답을 기대해봐도 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귓가로 울려퍼진 것은 웃음기가 어려있는 물음이었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여기서는 장단에 맞춰주는 게 좋겠지.
옆쪽에서 바이올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심통어린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졌지만 일단은 무시했다.
'저 정도면..'
역시 왕국 연합 측이려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교국 츠깅 제국하고는 다른 의미로 껄끄러운 상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디아나도 이미 인정한 바 있으니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솔솔 풍겨왔지만 일부러 한 번 헛다리를 짚어주었다.
교국 아니냐는 식으로 말이다.
그랬더니..
"흐흐흐.."
의기양양해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디아나의 어깨가 조금씩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땡!"
그러더니 자신만만한 어조로 그리 외치는 디아나였다.
"왕국 연합 측이에요?"
"응!"
아니나 다를까 역시는 역시였다.
우리의 상대가 왕국 연합 측이라면?
제국 측 상대는 교국이라는 소리겠지.
그리고 교국 측을 꺼렸던 건 아무래도 우리 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물음에 디아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순간, 옆쪽에서 '윽..'하고 침음성이 들려왔으니까.
무조건 자기들이 이길 수 밖에 없다고 그토록 자신만만해 하더니만 자신감과 상대에 대한 난감함은 명백히 별개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침음성 뒤로 이어진 것은 '쓰읍..'하고 귀찮게 됐다는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그런 음성이었다.
안 그래도 꼴보기 싫었던 년이 곤란해하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보기 고소하기라도 했던 걸까. 어느덧 클레어의 얼굴 위로 자리한 것은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서로 상반된 둘의 반응을 눈에 담으며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것마냥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고 있는 디아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궁금한 게 하나 있었으니까.
"근데 위에 보고는 하고 온 거죠?"
아마도 그리 물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디아나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말로써 표현해보자면 그야말로 '아차..'하는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디아나가 제가 했던 말을 아주 철저하게 지켰다는 걸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우리도 나름 군인인데 군인이 보고를 빼먹으면 쓰나.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그렇게까지 늦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얼른 다녀오세요."
디아나를 보며 그리 말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일단 추첨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야하지 않겠는가. 기사 부문에 대한 기대감이 적지 않은만큼 추첨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나나 클레어 뿐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디아나가 보인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진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다들 투마치 토커들이 포진해있는 탓에 거기에 발목이 한 번 잡히게 되면 언제까지 그곳에 있어야할지 알 수 없으니까.
얼른 추첨을 끝마치고 나랑 부스를 돌아다닐 생각만 하고 있었던 디아나로서는 결코 반갑지 않은 일일 터.
그런 디아나에 비해 바이올라나 클레어의 반응은 굉장히 긍정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바이올라 입장에서는 면밀하게 파악해야할 정도로 강력할 경쟁자가 알아서 나가떨어지는 것일 뿐더러 클레어의 입장에서는 눈치볼 사람이 사라지는 셈이니까.
그래도 클레어 쪽은 혹시 모를 디아나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나름대로 표정관리라는 걸 하긴 했다.
바이올라 쪽은 그런 게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누가봐도 디아나가 자리를 뜨는 걸 기뻐하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안 그래도 아까 전부터 간간히 바이올라 쪽을 힐끔대며 그녀를 신경쓰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디아나는 상당히 꼴받아했다.
그럼에도 울컥해서 행동에 나서지 않은 건 아마도 상대방이 제국의 황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황녀 쯤 되는 인물을 상대로 감정적으로 행동했다간 그게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 모르니까. 그게 걱정이 됐던 거겠지.
한 소리 듣고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지 제국 측에서 작정하고 그 부분을 물고 늘어지기라도 하면 그만큼 귀찮은 일이 또 없을테니 말이다.
막말로 일이 재수없게 꼬여서 거기에 내가 휘말리기라도 한다면 디아나의 입장에서는 그것만큼 최악의 경우도 또 없을 터.
설마 하등 상관없는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겠냐만은 그 가능성을 쉬이 부정할 수가 없는 게 사실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올라도 그렇고 저쪽의 책임자인 바이올렛도 그렇고 나라는 존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태니까. 지금까지야 기회가 없었어서 그렇지 자그마한 건덕지라도 주어진다면?
분명 그걸 가지고 날 어떻게든 자기들 쪽에 엮으려고 들 것이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아마 나라도 그랬을테니까.
바이올라나 바이올렛에게 있어서 최선의 시나리오는 뭐니뭐니해도 교류전에서 승리하여 당당하고 합법적으로 날 자기들 쪽으로 끌어들여서 취하는 것일테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늘 그렇듯 실제로 닥쳐오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막말로 갑자기 우리나 제국 측 참가자들의 신변에 트러블이 생겨서 왕국 연합 측이나 교국 측이 최종승자가 될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리 되면 바이올라나 바이올렛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는 셈이니 혹시 모를 상황을 생각해서라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일 때 잡으려고 할 터.
디아나가 울컥한 것치고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은 건 다름아닌 그 점을 우려해서 그랬던 것이겠지.
물론,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격렬하지 않아서 그렇지 디아나도 대응을 하긴 했다.
바이올라를 향해 보란듯이 입꼬리를 말아올리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 거기까지만 본다면 디아나 쪽이 살짝 손해긴 했다. 준 데미지가 받은 것에 비해 한참 못 미쳤으니까.
그리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걸까.
디아나의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얼굴 위에 예의 그 미소를 내건 채로 그녀가 날 향해 손을 뻗어왔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디아나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바이올라마저도 순간적으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날 향해 손을 뻗는데 성공한 디아나가 부드럽게 내 볼을 쓰다듬었다.
"알겠어. 금방 다녀올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보아하니 나름대로 여유있는 척을 해보려 했던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어색하게밖에 느껴지진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는데 다른 이들의 눈에는 또 달랐던 모양이다.
내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디아나의 손이 볼을 지나 어깨까지 도달했을 때 바이올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뿌득하고 이를 가는 소리였다.
아직 그 정도로 친밀한 관계는 아닌 것 같아 자기는 하고 싶었도 못했던 행동을 디아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니 부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질투가 났던 모양.
그런 상대방의 동요를 놓칠 디아나가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안 그래도 신경이 쓰였던 상대인 바이올라의 기를 완전히 죽여놓고자 마음먹은 것일까.
순간적으로 입술을 한 차례 앙하고 깨문 디아나가 이내 예의 그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을 입가에 머금더니 그대로 날 향해 고개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어하는 사이에 디아나의 분홍빛 입술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런 짓을 하는 게 내심 부끄러웠는지 발그레하니 홍조를 띈 볼은 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귓가로 울려퍼진 건..
쪽-
가볍게 입을 맞추는 소리였다.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이쪽을 향해 손을 뻗을 것처럼 눈을 부릅 뜨고 있던 바이올라의 얼굴이 경악으로 얼룩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