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일단 바이올라 쪽부터 살펴보자면 짧은 순간동안 수많은 감정들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개중에서도 다른 것에 묻히지 않을 정도로 뚜렷한 존재감을 보인 건 총 세 개였다.
그 세 가지 것들 중에서 가장 먼저 바이올라의 얼굴을 차지한 것은 다름아닌 경계심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이올라가 내 옆에 서 있는 클레어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내보인 감정이기도 했다.
그 시점에서 바이올라가 가진 클레어에 관한 정보가 사실상 제로에 가까운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좀 과하다고 말할 수 있는 반응이기도 했다.
클레어의 정체로 알지 못한 채 일단 경계심부터 내비치고 본 꼴이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바이올라가 그런 식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이미 앨리스라는 만만치 않은 경쟁자의 존재를 경험한 바 있으니까.
그러니 클레어를 보자마자 다른 가능성보다도 또다른 경쟁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들었을 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처음 대면했을 때만 하더라도 바이올라는 클레어를 향해서 있는 힘껏 경계심을 드러냈다.
상대를 어찌나 경계하는지 자기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영역을 침범당한 늑대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그랬던 바이올라의 반응은 내가 클레어의 정체에 대해 오픈한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싹 바뀌었다.
이전까지 드러내고 있던 경계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대신 '어어..?'라고 중얼거리는 듯한 얼빠진 표정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얼빠진 표정이 두 번째 감정이었고, 그걸 지나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당황한 와중에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억지로 쥐어짜낸 듯한 미소였다.
좀 다른 느낌으로 말해보면 생각치도 못한 타이밍에 좋아하는 사람의 아버지쯤 되는 인물하고 딱 마주쳐버린 탓에 당황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첫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애를 쓰는 듯한 그런 느낌이이었다.
그 느낌이 어찌나 비장한지 조금만 더 있으면 '아드님을 제게 주십시오!'라는 말이 튀어나오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는 그 부분이 가장 이해가 잘 안 됐다.
대체 어떤 식의 흐름을 거치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건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됐으니까.
이래서야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클레어가 내 어머니라고 착각하지 않겠는가. 우리 둘이 닮은 구석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데 말이다.
'아, 설마..'
이 몸에게 부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저러는 건가?
가능성이야 충분했다.
일전에 바이올렛이 본인의 입으로 직접 밝히기를 나에 관해 자체적으로 조사를 좀 했다고 그랬으니까. 말이 좀이지 당시 바이올렛이 보여주었던 깐깐함을 고려하면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몸이 가진 피붙이라고 해봐야 가끔씩 편지로 용돈만 조금 던져주고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는 형이 전부라는 것도 이미 파악이 끝나지 않았을까?
겸사겸사 내게 클레어라는 이름의, 왕국 내에서는 손에 꼽히는 실력이 가진 스승이 있다는 사실또한 파악했을 것이고 말이다.
그러한 정보들이 바이올렛을 거쳐 바이올라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라면?
정말로 그런 거라면야 바이올라가 지금 저렇게 클레어의 눈치만 슬금슬금 보고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클레어야 명목상의 사제관계일 뿐이라서 그런 점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그렇지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케이스들을 살펴보면 스승을 부모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굉장히 흔했으니까.
하물며 제자에게 부모가 없다면?
스승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았다. 아끼는 제자일수록 더더욱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는 편이었고 말이다.
그러니 아마 지금쯤 바이올라의 머릿속에서는 '이안=고아, 클레어=이안의 스승님, 스승=부모, 이안의 스승?=이안의 부모나 다름없는 사람=잘 보여야하는 사람.'같은 공식이 한창 세워지고 있겠지.
물론, 거기에는 딱 좋은 타이밍에 덧붙여진 내 소개로 인해 '눈앞의 여자=이안의 스승님.'이라는 이미지가 바이올라의 머릿속에 재대로 박혀버린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미 그런 이미지가 머릿속에 자리를 잡아버린 탓에 지금 바이올라의 눈에 나와 클레어는 구경도 같이 나올 정도로 사이좋은 사제관계로밖에 보이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런 바이올라에 비해 클레어의 반응은 어땠는가 하면 세 번의 격렬하기 그지없는 감정변화를 보인 건 클레어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순서까지 같지는 않았다.
바이올라가 경계심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때 클레어는 거기에 대고 가소롭다는 식으로 대응했으니까. 내 눈치를 본답시고 나름대로 자제를 해서 그렇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바로 코웃음부터 쳤을 것이다. 분명 어디서 개가 짖냐는 식으로 대응했겠지.
그랬던 클레어의 태도가 뒤바뀐 것은 마찬가지로 내 입에서 그녀에 관한 소개가 흘러나왔을 때였다.
이쪽은 내 스승님이다.
대충 그런 뉘앙스를 띈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자길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던 바이올라를 가소롭다는 식으로 응시하던 클레어의 표정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때 그녀가 보여주었던 반응은 뭐랄까.. 결국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듯 하면서도 실제로 겪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따끔해서 살짝 충격을 받은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아마도 순간적으로 뒤집어 썼던 겉으로 보기에는 퍽 담담해보이는 표정을 끝끝내 무너뜨리지 않고 유지했던 것이 그 순간 클레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 아니었을까.
그런 식으로 순간적으로 움찔했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한 척을 하던 클레어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뒤바뀐 것은 바이올라가 예의 그 잘 보이고 싶어하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리고 나서였다.
단순히 표정만 그런 게 아니라 눈빛까지 초롱초롱하게 물들인채 쳐다보는 것이 퍽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
바이올라를 향해 내려꽂히는 클레어의 눈빛 속으로 뭔가를 잘못 집어먹은 듯한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감정이 어리기 시작했다.
마치 '얘가 왜 이래?'내지 '미쳤나?'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라고 해야할까.
옆에서 봐도 보이는 것을 당사자인 바이올라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니 자길 향해 쏟아지는 클레어의 시선을 받고 꿈쩍이라도 할 법도 한데 바이올라는 그런 기색따윈 일절 없이 그저 꿋꿋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클레어에게 잘보이는 걸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웃겼다.
내 입장에서 보면 떡줄 놈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전혀 상관없는 곳에 가서 김칫국 좀 줄 수 없겠냐고 부탁을 하고 있는 꼴로밖에는 보이질 않았으니까.
'착각도 저정도면 병인데..'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지만 굳이 내쪽에서 먼저 나서서 정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보는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히 있었으니까.
그렇게 내가 자꾸만 새어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참고 있는 사이,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는 클레어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어떻게하면 점수를 딸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바이올라가 내쪽으로 눈을 돌렸다.
뭐, 또 궁금한 거라도 남은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오늘따라 반들반들하니 꽤나 매혹적인 자태를 자랑하던 분홍빛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까지 뜸을 들이나 싶었는데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말은 생각외로 평범했다.
"그.. 혹시 우리 쪽 좌판 구경하러 온 거야?"
"아, 네. 뭐가 있는 지 궁금해서요."
그렇기에 거기에 대고 답을 하는 것또한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살짝 의외였던 건 바이올라가 보인 반응이었다. 대체 내 말 어디에 그렇게까지 기뻐할만한 구석이 있었던 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이쪽을 향해 던져진 물음에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하니 그 순간 바이올라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바로 조금 전까지 묘하게 안절부절 못하는 느낌을 사방으로 흩뿌리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극명하기 그지없는 변화였다.
혹시 내가 제국쪽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기쁜 걸까.
어쩌면 그래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올라가 본인의 입으로 직접 밝혔으니까.
"그러면 내가 안내해줘도 될까?"
퍽 간곡하게 들리는 어조와 함께 부디 이것만큼은 거절하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이 얼굴로 날아와 꽂혔다.
앞서 말했듯 거절하고 싶어도 거절하기가 힘든 눈빛이었고 바이올라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던 건 그 때문이었다.
덕분에 생각치도 못하게 과분하기 그지없는 가이드를 앞세운 채 제국 측에서 차려놓은 부스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알게 된 것은 바이올라를 앞세워 돌아다니는 것이 상당히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온갖 종족이 어우러져있는 제국 측 부스 내에서도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존재가 바로 바이올라다보니 어딜가든 눈에 띌 수밖에 없었으니까. 덕분에 어딜 가든 주변 이들이 받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친절하기 그지없는 태도가 나와 클레어를 반겨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알게된 것은 제국 쪽이 진짜 이 악물고 준비를 했다는 점이었다.
남성 접객원이라는 치트키까지 동원했으면 준비라도 좀 대충할 법도 하건만 어째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볼 때는 그랬다.
그래서일까.
제국 측 부스에서는 왕국 연합 측에서 받았던 감상하고는 사뭇 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었다.
왕국 연합 측 부스가 선택과 집중이라는 걸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알려주는 듯한 표본같은 느낌이었다면 제국 측 부스는 말 그대로 완전체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안내역을 꿰찬 바이올라라고 해서 모르지 않았는지 어느 한 부스에 들릴 때마다 그곳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 바이올라의 얼굴에는 어느덧 자부심이라는 감정이 그득하게 차올라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나와 클레어를 위해서 자비를 소모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그렇게 되면 제국 측에서 자체적으로 소모한 것으로 처리되어 점수로 카운트 되지 않을 텐데도 그랬다.
고작 두 명분 빠지는 것 가지고 뭐 그리 큰 영향이 있겠냐만은 그건 말 그대로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 또 모르지. 마지막 날에 결산을 했을 때 그 얼마 안 되는 차이가 승부를 갈라놓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런 바이올라의 시도는 말 그대로 시도 선에서 그쳤다.
모처럼 둘이서만 돌아다니고 있던 상황이 깨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빡이 치는데 자기가 돈까지 전부 내겠다면서 깝치는 꼬락서니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정도로 클레어는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사양하죠."
짧지만 거기다 대고 뭐라 말을 덧붙이기가 어려운 단호하기 그지없는 말과 함께 클레어가 품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이내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녀의 품속에서 끄집어내진 것은 꽤나 두둑해보이는 두께를 자랑하는 지갑이었다.
대체 현금을 얼마나 들고 나온 걸까.
보고 있으면 그런 궁금증이 절로 드는 것을 보란듯이 손에 움켜쥔채 클레어가 바이올라를 향해 싱긋 웃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내뱉어진 한 마디가 꼭 '우리가 거지로 보여?'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던 것은 과연 기분 탓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딱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바이올라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다는 점이었다.
자기 딴에는 나와 클레어한테 점수 좀 따보려고 했던 것인데 클레어의 입에서 흘러나온 거절의 말을 듣고 나니 어쩌면 실수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 바이올라의 얼굴 위로 자리하고 있던 자부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어느덧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모습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저 자리에 있는 것이 바이올라가 아니라 나였다면 분명 표정관리에 실패했을테니까.
그렇게 어찌어찌 무사히 넘어가는 듯 했더니만..
안심하고 있을 때가 제일 위험한 법이라고 일은 바로 그때 벌어졌다.
"이안!"
바이올라 입장에서는 여태껏 마주쳤던 그 어떤 이보다도 강력하게 느껴질 경쟁자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드디어 찾았다고 말이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로 제 존재감 어필해온 이는..
"찾았잖아."
다름아닌 대진표 추첨을 끝마치고 달려온 디아나였다.